92화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지호는 회복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사람이 아니었다.
반나절 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나아지자마자 지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승찬이 맡기고 간 자료를 찾는 거였다. 간호사는 요전에 들렀던 동료가 두고 간 업무 자료라는 말에 의심 없이 서류 뭉치를 내어 주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지호는 승찬이 왜 그런 복잡한 표정이었는지 알았다. 거기엔 구조대원이었던 이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파일을 열자 맨 앞에 메모가 붙어 있다. 승찬 글씨였다.
<퇴원하고 보라니까 말 또 안 듣죠?>
지호는 짧게 웃고 메모를 파일 커버로 옮겨 붙였다. 파일은 한 사람과 그가 반출한 몇 품목에 대한 자료가 들어 있었다.
구조대원 송예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찍힌 사진 한 장이 맨 앞에 붙어 있었다. 균열 3기 때 가족을 잃었고, 승찬과 비슷한 시기부터 균열 구조대에 들어와 일했다. 다양한 업무에 많이 자원해 출동했는데 종종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품목들을 연구 목적으로 가지고 나갔다.
아무도 찾지 않는 것. 주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예진이 가지고 나간 건 승찬과 지호가 잘 아는 바로 그 기계였다.
지호는 설마 하며 기록들을 뚫어지도록 노려보았다. 화소 낮은 영상 자료를 캡처한 부연 이미지엔 예진이 들고 나가는 그 기계가 잘 보이게 찍혀 있었다.
그밖에 다른 걸 가져간 기록은 없다. 이건 대놓고 수상할 지경이었다.
지호는 기다리지 못하고 주소록에서 승찬의 이름을 찾았다. 수화 음은 몇 번 울리지도 않았다. 그는 받자마자 대뜸 질문했다.
-예진 씨는 장기 휴가 중이에요. 공교롭게도 수원 균열이 닫히던 그 시점에 휴가를 냈고요.
“제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대뜸 누군지도 모를 사람 이야길 해요?”
-갑자기 저한테 못 한 말이 생각나서 전화하진 않았을 거 아녜요. 새삼스레 안부가 궁금해졌을 리도 없고.
너무 맞는 말이라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짧은 웃음소리 후에, 승찬은 하던 이야길 계속했다.
-유관 시설에서 처리했다고 보고가 올라와 있길래 그쪽에 가 본 다음에 지호 씨한테도 알려 줄 예정이었어요. 예진 선배는 그러니까, 좀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이었어요. 실종자들을 구하러 갈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이야기했었고요. 아마 그쪽 집단과 접촉한 게 아닐까 싶어요. 정확하진 않으니 일단 걸러서 들어요.
“어떻게 그렇게 수상한 행동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원래 이형 에너지가 다수 검출되는 물품들은 각성자 연합에 가져가야만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다른 물품 빼 갈 때 본인도 지원 나가는 척 하나둘 추가한다고 이상할 건 없습니다. 사실 누가 뭘 치우는지 누가 관심이나 있겠어요.
“아저씨도 해 봤어요? 어떻게 처리하는데요?”
-각성자 연합으로 가는 게 제일 빠르긴 한데, 일반인 중에 교육 다 받은 분들 있죠? 그분들 중에서도 폐기 처리하는 일 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쪽에서 분쇄해서 마정석 가루 일부를…….
승찬은 말하다 말고 아, 했다. 지호 역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그 기계의 동력원은 일반 마정석이 아니었다. 고가가 아닌 마정석 가루들을 채운 필터. 연합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라면 송예진 대원이 해당 물품을 처리한 곳이 곧 그 집단과 연결될 수도 있었다.
-좀 더 빨리 다녀와야겠어요. 갔다 와서 마저 연락하죠. 그때까지 마저 회복해 놔요. 튼튼하다고 했었죠? 믿을게요.
“아저씨도 수상한 거 있으면 바로 빠져요. 혼자 들어가지 말고.”
-누가 누구한테 그런 충고를 하는 거예요. 누가 제일 안 지키는데?
평소라면 좀 더 농담을 나누었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지호는 초조한 심경으로 파일을 몇 번씩 더 열어 보다가 도로 치료기에 누웠다. 힘이 돌아오는 대로 자가 회복에 힘을 쏟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균열에서 다친 상처가 쉽게 낫는다면 그 많은 헌터들이 이토록 고생할 턱이 없다. 지호는 누운 채로 천장에 스크린을 띄웠다. 이번 급성 균열에서 새로이 보고된 괴물들 정보가 많았다. 그밖에도 확인할 것이 산더미다.
본래는 협회에서 요약해서 중요 정보부터 알려 주곤 하지만 브리핑에 참여할 수 없으니 전부 확인할 수밖에.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병들에게 이름이 붙었다. 호위A, B 따위로 부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별개 호칭이 있었다. 퀸 패러사이트와 비슷하게 코드 옐로로 발령이 난다고도 했다. 놈들이 나타난다는 건 곧 퀸이 근처에 있다는 뜻일 테니 과도한 수준은 아니었고, 그것들도 하나하나 너무 강하니 맞상대하기보다는 피하는 쪽으로 전략을 짜야 할 듯했다.
[최소민 : 지호 씨 일어났다면서요? 몸은 좀 어때요?]
[이지호 : 이제 좀 움직여요.]
[장지윤 : 아니 균열 소멸기에 거기 있는 멍청이가 어딨음여? 일반 균열 소멸기 때 이형 에너지 폭풍 부는 거 몰라여?]
[이지호 : 아니, 거기엔 사정이……. 그것보다 그거 균열 소멸 경고령도 없이 픽 꺼졌다고요. 수원 균열 때처럼요.]
[장지윤 : 이 바보! 멍청이!]
[이지호 : 이 언니가 왜 이래.]
[강하나 : 지윤이가 엄청 걱정했었거든요. 그래도 어떻게 신고는 했네요. 안 그랬으면 발견이 늦었을 거예요. 수원 수습하느라 판교 쪽엔 인원도 별로 안 도는데.]
[이지호 : 신고요? 제가요?]
[강하나 : 지호 씨가 자진 신고 했던 거 아닌가요? 용케 정신 차리고 있었나 보다 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지호가 판교 균열로 와 있던 걸 아는 나머지 세 사람이 신고해 줬다고 생각하고만 있던 터라 지호는 멈칫했다. 이동 능력자가 구하러 왔었는데, 그럼 뭘 보고 왔던 거지?
이주환 헌터는 일전에 한 번 스친 것이 전부였던 사람이라 잘 알지 못한다. 부천 센터 소속 이동 능력자란 것 정도나 기억하지.
[이지호 : 저는 여기 계신 분들이 신고해 주신 줄 알았어요. 균열 소멸 뉴스가 뜬 걸 보고요.]
[최소민 : 신고하면서 제가 가려고 했는데 다른 이동 능력자분이 지호 씨 발견했다고 소식 올리셔서요. 지호 씨가 부른 게 아니에요?]
채팅방엔 잠시 동안 아무 말풍선도 올라오지 않았다. 지호는 생각에 잠겼다. 기계를 작동시키던 여자의 손동작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지경이 되었으니 일반인인 그 여자는 정말로 무사하지 못하겠지.
혹여 지호가 균열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을까? 그 후에 균열이 사라졌으니 저 안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신고한 거라면?
추측은 얼추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빙성이 없다. 지호는 자기 신고를 접수했던 이주환 헌터의 연락처를 물었다. 같은 이동 능력자라 소민이 알고 있다고 했다.
[최소민 : 쉬는 동안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우리가 알아볼 테니까.]
[강하나 : 소민 씨는 염동력 능력자보다는 이동 능력자로 분류돼서 현장 정리 업무는 안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중에 균열 닫힌 현장에 투입되는 사람 없어요. 당분간은 헌터들 쉬고 일반인들이 작업할 모양이에요. 또 언제 급성 균열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장지윤 : 그래서 알아보고 싶은 게 있으면 대신 확인해 주겠다, 이거져.]
[이지호 : 안 그래도 승찬 아저씨가 확인하러 간 게 있어요. 소민 씨 괜찮으면 그쪽으로 좀 가 줄래요? 연락처는 이쪽이에요. 나머지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할게요. 다들 고마워요.]
[장지윤 : 별말씀을. 쉬기나 해여. 또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면 엉덩이를 때려 줄 테야.]
소민이 올려 준 연락처로 이주환 헌터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박 팀장이 부를 때까지 쉬라는 말을 하긴 했었지. 나중에라도 보겠지 싶어 지호는 그쪽에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구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천 센터 이지호입니다. 제가 신고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를 구하러 와 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다짜고짜 보내 놓고 나니 구해 준 사람한테 따지는 어조라, 지호는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그분도 균열 폭풍에 휘말려 다치지 않았는지 걱정도 되고, 감사 인사도 전하고 싶습니다.]
예의 바르게 보이기를 바랄 뿐이었으나 수정하기엔 늦었다. 지호는 침착하지 못한 제 머리를 통통 때렸다. 좀 더 고민해 보고 보낼걸. 몇 분 늦는다고 답을 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닌데.
핸드폰이 위잉 울렸다. 지호는 곧장 메시지를 확인했다. 기다리던 답은 아니었다. 박 팀장에게서 온 메시지다.
[박찬민 : 뭔가를 불태운 흔적이 있습니다. 본디 균열 폭풍이 지나간 뒤라면 찾을 수 없는 재 가루들도 다수 있고요. 뭔가가 벌써 다녀간 모양입니다.]
[이지호 : 제가 죽인 사람일 거예요. 약간 머리를 부딪혔을 뿐인데, 갑자기 죽었어요.]
[박찬민 : 아마 균열 초창기부터 드나든 일반인일 겁니다. 보통은 그렇게까진 안 되죠. 괴물 때문에 보통 사람이 균열에 오래 들어가 있을 수도 없고, 구조대원들도 균열 출입 후에는 각종 검사와 치료 과정을 거치니까요. 보통 사람들도 잘 알고 있잖습니까. 균열에 오래 있으면 몸이 약해진다는 거.]
[이지호 : 제가 방호복을 벗겼다가 씌우는 바람에…….]
[박찬민 : 본인 탓할 생각 마요. 남들 목숨 함부로 하는 놈들이 자기는 소중하려고요? 아무리 실종자들을 구해 달란 명목이 있어도 그들이 하는 짓은 범죄입니다. 자처한 거예요.]
[이지호 : 방호복을 어디서 구했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민간에 쉽게 유통되는 물건이라면 어렵겠지만…….]
[박찬민 : 한번 찾아보죠. 쉬어야 하는데 연락했네요. 혹시 몸 좀 나아졌다고 돌아다니려고 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지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다들 자길 뭘로 생각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그가 여태 해 온 짓이 있어 아니라고 말을 할 수 없는 게 웃겼다.
[이지호 :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 그 자리에 얌전히 누워 있거든요.]
박 팀장의 변동 사항 있으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이 끝나고 지호가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습관적으로 앞을 훑어 내리자 각성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느낌, 아는 감각. 정신계 능력자의 파장이다. 누군지 말 안 해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안 자니까 그냥 들어오셔도 되는데요.”
문은 슬쩍 열렸다. 손에 식판을 든 김 반장이 덤덤한 얼굴로 한쪽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마침 식사 시간이라더군. 대원 몫을 챙겨 왔다.”
“고맙습니다. 제 임시 파트너가 되셨다죠?”
“박 팀장이 왔다 간 모양이군.”
지호는 침대를 조정했다. 등 받침 없이도 앉아 있을 수 있었을 테지만, 당장은 온 힘을 회복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김 반장은 익숙한 듯이 침대 아래쪽 받침대를 올려 주었다. 식판에 올라온 음식은 과할 정도로 많았다.
“신체 계열 능력자라 몇 명 먹을 분량을 챙겨 주는 거다.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아니 제가 무슨 돼지인 줄…….”
“양 박사는 네가 혼자 돌아다니다 다치는 꼴을 더는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누구 덕에 코가 꿰였으니 말이나 잘 듣도록.”
“반장님이 양 박사님 부하예요? 왜 말을 듣고 그런담.”
“나보다 시야 넓고 현명한 이의 조언을 듣는 건 아랫사람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입이 노는데 아직 음식이 그대로군.”
지호는 수저를 들면서 툴툴거렸다. 먹고 누워 있기만 할 텐데 이렇게 많이 주다니, 이러다 살이 찌면 날아다니는 속도가 느려지는 거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