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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91화 (92/260)

91화

“아니 그 정도 실력자를 사방에서 탐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요. 고정 파트너야 안 바뀌지만, 그래도 팀은 종종 바뀌어요. 우린 꽤 괜찮은 파트너였다고요. 자주 싸웠지만, 그만큼 친했어요. 그때는요.”

박 팀장의 얼굴을 본 지호는 짙은 그리움을 읽어 냈다. 서로의 길이 너무도 달라져 버린 두 사람이다. 투닥거리는 걸 보면 사이가 엄청 나쁜 것 같진 않았었다.

“제가 팀장님을, 믿으면.”

“남들한테 못 할 이야기가 있다면 해 달란 이야기예요. 뭘 찾고 뭘 발견해서 사방을 돌아다니는지 전부 알려 달라곤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헌터의 감을 따라 움직이고 있겠죠. 그리고 그건 뛰어난 헌터일수록 더 예리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호 씨한테 걸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면, 어떻게 해요.”

“그럼 다시 찾아보면 되죠. 우린 다른 사람들보다 천천히 나이 먹어요. 아직 헌터가 되고 노화해서 죽은 사람이 없으니, 어쩌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확인된 바 없는 신인류에 가깝지 않나 생각도 해요. 이건 좀 헛소리네요.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지금 지호 씨가 찾는 것 족족 방해하는 모종의 세력이 있단 점이에요. 진실에 다가가고 있으니 막는 자도 있겠죠.”

박 팀장의 힘 있는 말은 지호의 마음을 움직였다. 멍하니 천장의 얼룩을 올려다보던 지호는 입을 열었다.

“균열에서, 만난 여자가, 있었어요.”

지호는 힘겹게 이야기를 이었다. 수원 균열이 사라지자마자 수상한 대화를 듣고 판교 균열로 날아갔던 일, 거기에서 찾아낸 이상한 두 사람. 그리고 지호 본인이 죽인 것 같은 남자와, 판교에 이형 에너지 폭풍을 불러일으켰던 여자.

눈을 떴을 때는 균열이 사라져 있었단 이야기에 박 팀장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일어났다.

“일단 쉬고 있어요. 판교로 가서 흔적을 찾아볼게요.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지호가 붙잡거나 다른 말을 덧붙일 새가 없었다. 박 팀장은 자기 이야기를 끝내기 무섭게 곧바로 사라졌다. 사실 성격이 급해야 이동 능력자가 될 수 있는 걸까? 지호는 헛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마석 치료기의 영향으로 몸은 노곤하게 풀어졌다. 이대로 긴장을 풀면 금세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반쯤 눈을 감은 채 지호는 박 팀장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했다.

보현과 박 팀장은 데면데면한 사이로 보이진 않았다. 다만, 썩 친한 사이로도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한때 친구였던 사이일수록 멀어졌을 때 더 미워하게 되던가. 그런 이유라면 지금 으르렁 대는 걸 어느 정도 이해해 볼 수는 있겠지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상념을 끊었다. 누구 올 사람이 있던가.

“들어갈게요.”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벌써?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승찬은 착잡한 얼굴로 병문안 선물을 문 옆에 내려놓았다.

“출동 없어서 바로 올 수 있었어요.”

“어떻게…….”

“협회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지금 임보현 헌터가 없어서 지호 씨 보호자가 공석이잖아요. 차나연 헌터라는 분이 저한테 연락을 주셨습니다. 이동 능력자 분도 데리러 오셨고요.”

일전에 놈들의 흔적을 쫓겠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 승찬과 함께했던 걸 기억한 모양이었다. 승찬은 뭐라고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약간의 침묵 후,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질문했다.

“전에 그놈들을 쫓다가 다친 겁니까?”

“균열 소멸기에, 휘말려서…….”

“진짜로요?”

지호는 어설프게 웃었다. 웃는 것도 갈비뼈 한쪽이 쿡쿡 쑤셔 오도록 아팠다. 힘이 돌아오는 대로 자가 치유에 모든 기운을 쏟아붓고 있는데도 그랬다. 지호는 그냥 눈을 감아 버리며 한숨 쉬었다.

“왜요. 뭐 이상한 거라도, 찾아서?”

“네. 구조대 쪽 기록을 좀 뒤졌습니다. 그쪽에서 전에 봤던 기계랑 비슷한 것들이 유류품으로 분류된 걸 봤습니다. 전에 찍어 뒀던 사진이 있어서 비교할 수 있었어요.”

“사진요?”

“느낌이 좀 이상했거든요. 우리가 찾았던 건 갑자기 소실됐었죠?”

찾자마자 사라진 단서 때문에 한동안 골치 아팠었다. 지호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고 싶단 심정으로 눈을 열심히 끔벅였다.

“왜 바로 연락, 안 하고…….”

“이럴까 봐요. 이렇게 무리하게 뭐라도 하려고 할까 봐. 나중에 정식 헌터 달게 되거든 모아 놓은 자료를 줄 생각이었어요. 어떻게 되긴 되었네요. 썩 좋은 꼴은 아니지만.”

박 팀장이 두고 간 정식 헌터 증명 배지를 한쪽으로 치워 둔 승찬은 손을 뻗어 마석 치료기 출력을 조절했다.

“좀 더 올려도 괜찮아요. 구조 차에 실린 거랑 비슷한 기종이네요. 괴물한테 당한 건 아니죠?”

“그 자료는, 뭐예요?”

“깨끗하게 낫고 나서 퇴원할 때 찾아가도록 병원에 맡겨 둘게요. 그 사람들의 흔적이 꽤 여기저기 무분별하게 남겨져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서 알지 못했지만요.”

“언제부터요?”

“글쎄요. 그건 좀 더 확인해 봐야죠. 일단 알아낸 공통점이 하나 있긴 해요. 그들이 흔적을 남긴 곳은 모두 급성 균열이 열린 지역 부근이란 거죠.”

그들은 균열을 닫을 수 있다.

열 수 있는지까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무작정 여닫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 거라 짐작하기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급성 균열에만 그들의 흔적이 남았다면, 열 줄도 알 것이라 짐작하는 건 무리가 아닐 터였다.

지호는 파닥파닥 손짓해 승찬의 도움을 받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물을 몇 모금 넘긴 통증에 떨면서도 기어코 승찬의 팔을 꽉 붙들었다. 핏발 선 눈이 번들거렸다.

“누군가 균열을 임의로 여닫을 수 있다고 한다면요.”

“무엇을 위해서요?”

박 팀장에게도 이야기했으니 승찬에게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오히려 박 팀장보다 훨씬 믿을 만한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지호는 좀 전에 했던 설명을 조금 더 간략히 풀어냈다.

설명을 들은 승찬은 곤혹스러워했다. 지호는 그가 고민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생각을 쏟아 냈다.

“자기한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자고 남들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건 옳지 못해요. 그 사람들 내버려 두면 또 어딘가에 급성 균열을 열어 버릴 거예요. 그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균열을 닫아 버릴 거고요.”

지호의 열띤 음성을 듣고 있던 승찬은 드물게도 그의 의도에 공감해 주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음을 던졌다.

“그게 단순히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겁니까?”

“그럼 그게 옳아요?”

“임보현 씨가 모종의 일로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그 사람 하나 구하기 위해서 수십 수백 명을 뒤로하고 임 헌터를 구하러 가고 싶을 것 같지 않습니까?”

“언니는 그런 위험에 안 빠져요.”

“글쎄요. 지금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는 예전처럼 헌터의 대명사 같은 위대한 영웅이 아닙니다. 쇠약해졌고, 점점 더 약해지고 있어요. 언젠가 당신의 그런 도움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죠.”

승찬이 마지막 문장을 끊어 말한 건 통증 때문이었다. 지호는 아차 싶어 저도 모르게 꽉 잡고 있던 승찬의 팔을 놓았다. 붉게 변하다 못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승찬이 연약하고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는 걸 종종 잊었다. 자기가 저지른 일에 당황한 지호는 미약하게 모인 힘을 손바닥에 모아 승찬의 팔을 치료했다.

“아니 아프면 이야기를 해요…….”

“괜찮아요. 부러진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몰아붙여지는 일이 또 없겠습니까? 더 많으면 많았지, 없지는 않을 겁니다. 지호 씨가 정신 방벽 덕분에 남들보다 좀 더 침착한 인간일 수 있다 한들, 그래도 사람입니다. 분노하고 화가 날 때가 있을 거고요. 그럴 때마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오늘따라 말을 좀 빙빙 돌리시네요. 이거 설명하자고 아프다는 말도 못 했어요?”

승찬은 계속 머뭇거렸으나 오래 망설이진 않았다. 그는 잠시 한숨을 쉰 뒤, 찬찬히 설명했다.

“공리주의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단 이론인데, 아마 많이 들어 봤을 겁니다. 헌터들은 교육받으면서 그런 상황들을 경계하도록 여러 방식으로 다시금 듣곤 할 테니까. 그런 비슷한 예시가 있다고 생각해 봐요. 한쪽에는 임보현 헌터의 목숨이, 다른 한쪽에는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겁니다. 지호 씨가 살릴 수 있는 건 한쪽이라면?”

“언니는 기차에 치여도 안 죽을 거예요. 기차를 날려 버리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회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더 많은 사람을 택하겠죠. 언니가 알아서 살아 나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요. 오히려 그런 선택을 할 저를 도와주러 올걸요.”

승찬은 옅은 한숨을 내쉰 후 손짓해 지호를 도로 눕혔다. 지호는 느릿하게 치료기에 기대 에너지 흐름에 몸을 맡겼다.

“뭔데요. 대충이라도 말해 줘요. 궁금하니까.”

“대균열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운이 좋았다는 거죠. 그 괴물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것도, 균열 소멸기에 거기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일반 균열은 이번 같은 사고를 부르지만, 급성 균열은 그렇지 않죠. 소리 없이 사라지잖습니까. 균열 소멸기에 급성 균열에서 살아 돌아오는 방법을 압니까?”

“에너지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거죠……. 일반인들에겐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요.”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다 실종자가 되죠. 보통은 사망자라고 생각하는 균열 실종자들이 혹시 아직도 그 안에 살아 있고, 만약 그 단서가 발견되었다고 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걸, 실종자의 가족이나 지인이 알게 되었다면…….”

난리가 날 거다.

지금도 실종자들을 기다리는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차라리 지호처럼 가족의 죽음이 확실시된 사람들이 나을 정도란 말이 나올 지경이니 말 다 한 셈이다. 모두가 누군가를 잃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았더라도,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과 주변인으로 채워진 사회란 금방이라도 터질 위험 있는 풍선처럼 위태로웠다.

몸을 감싸는 느슨하고 포근한 에너지 속에서 지호는 생각했다. 만약 아빠가 살아 있다고 하면, 지호 역시 균열에 뛰어들 거다. 지금은 힘이 있고, 예전처럼 무력하지 않을 테니.

그러나 각성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면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을 터였다.

“뭐가 발견된 건가요?”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단서들이 많아서요. 좀 더 찾아봐야겠죠. 그러니 최선을 다해 회복에 전념해요. 낫고 나서 바로 균열로 튀어 가지 말고요. 다쳤다고 해서 걱정했단 말입니다.”

“안 죽어요. 저 튼튼하잖아요.”

“이렇게 다쳐서 돌아왔으니 더는 안 믿을 겁니다. 지호 씨는 자기를 너무 함부로 해요. 다시 죽어도 아쉬울 것 없단 사람처럼…….”

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승찬은 오래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며 가 보겠다고 일어섰다. 남기고 간 자료는 병원에 맡길 거라고 했고, 종종 연락을 주겠단 말도 남겼다. 지호는 감사를 표했으나 배웅하지는 못했다. 대화 도중 입이 좀 풀려 말하기 편해진 것만으로도 꽤 수확이라고 생각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문득 지호는 승찬이 찾아냈을 단서란 걸 확인하기 무섭단 생각을 했다.

지금의 불규칙한 평화마저 깨져 버릴 수도 있으리라는 기묘한 확신. 이럴 때 찾아오는 것이 헌터의 직감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

지호는 눈을 감고 돌아오는 모든 힘을 치유 에너지로 바꾸는 데 집중했다. 그 지친 몸이 잠드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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