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거기에 엎어져 가라앉고 싶지 않았다. 지호는 무작정 걸었다. 낡고 오래된 건물들을 지나자 곧 공원이 보였다. 밤이슬을 맞으며 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들 찬바람에 떨고 있었다.
미약하게 보이는 공원 방향의 빛. 본래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뭔가를 실험한다고 했었지. 치료기와 관련된 실험이라니.
이런 종류의 실험이라면 자신을 제공할 사람이 널렸으니 이 동네를 찾아온 건 잘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생각과 달리 지호의 걸음은 곧장 천막으로 향했다. 줄을 선 채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사납게 그를 할퀴었으니 알 바 아니었다. 눈에 힘을 집중하자 이형 에너지 파장 일렁임이 훨씬 잘 보였다. 감지 파장으로 훑어 내리니 알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뿐이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맥이 풀렸다. 양 박사는 아니어도 성 팀장 정도나 그 산하 연구 팀원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하기야 마정석을 연구하고 개량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각성자들만 있을 턱이 없다. 훑어보니 여기 모인 사람 중에 각성자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이형 에너지 계열은 없어 보인다고 해야 옳겠지만.
그런데 기이한 감각이 함께 잡혔다. 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있어서는 안 되는 뭔가가 저 안에 있었다.
“뭐야,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 순서 안 지키면 이용 못 해. 나가!”
이상할 정도로 예민한 반응.
그러나 지호를 가로막은 사람이 뭐라고 떠들건 말건 지호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마석 치료기라고? 그는 호흡을 골랐다.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에 당장에라도 소리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가란 말 안 들려?”
“지금 저 안에서 뭐 하는 거예요?”
말로 해선 안 듣는다는 걸 알았는지 인상 사나운 남자는 으르렁거리며 지호의 어깨를 퍽 밀쳤다. 물론 밀릴 리가 없다. 나동그라지는 지호를 상상했던 남자는 상상 이상의 묵직함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켜요.”
지호는 종잇장 밀치듯 남자를 밀어 내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뭐야 하는 술렁임이 바깥에 퍼졌으나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형 에너지가 퍼진다.
아주 불균형한 파장이었다.
이동 능력자들의 파장이 가장 강렬하지만, 일반적으로 이형 에너지를 다루는 모든 능력자의 힘은 자취를 남긴다. 감지계 능력자에게만 보이는 파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태의 파장을 보면서 실험을 계속할 리 없으니까.
“각성자인가?”
성인 남성을 맨손으로 날려 버리는 학생을 보며 할 타당할 추측을 입 밖에 내어놓은 이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책임자거나 책임자급일 것이다. 그가 쓴 안경에서 미미한 감각이 잡혔다.
“마정석 도구로군요.”
“치료가 필요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데, 무슨 행패냐? 그것도 선량한 자원봉사자한테!”
“자원봉사요? 실험이라고 들었는데.”
“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실험이다. 당연히 자원봉사지.”
지호는 사납게 미소 지었다. 보현의 표정과 비슷했지만 알 턱이 없다. 불균형한 파장이 다시 한 번 뻗어져 나오며 일순간 기기 주변의 색이 어그러졌다.
당연히 본 적 있는 현상이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현상이기도 했다.
“아저씨. 균열에 가 본 적 있어요?”
뒤에서 지호의 어깨를 잡아채려던 사람은 그대로 걷어채었다. 천막에 감겨 나동그라진 탓에 한쪽 천이 부욱 찢겨 나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안쪽을 본다. 한밤을 넘어 새벽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달빛마저 어두워 빛이라곤 오로지 천막 내부의 임시 시설들이 유일했다.
“균열 경계가 이래요. 색이 옅어지고 물 빠진 것처럼 흐려지면서.”
이형 에너지 파장 자체가 일그러지는 현상이란 좋은 것이 아니다. 지호가 본 그 현상은 균열 확장 때 한 번뿐이었으나, 이전에도 본 적은 있었을 것이다. 인지할 능력이 없었을 뿐.
“무슨 개소릴…….”
심장 뛰는 것처럼 규칙적인 박동. 그러나 매 순간의 파장 모양이 다르고, 때론 날카롭게 때로는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도록 흐리게 사방을 훑고 지나가는 이형 에너지가 느껴진다.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색이 변하는 지점이 갈수록 넓어진다.
땅을 박차는 순간 상황이 끝났다.
지호는 망가진 기계에서 발을 빼냈다. 팔이 아프니 다리로 부수면 되지 하는 무식한 생각으로 갈긴 일격이었는데 운 좋게 그대로 동력원을 부쉈다. 마정석 필터에서 나오던 은은한 빛이 사라지며 일대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무슨 짓이야?”
다른 이들은 핸드폰을 켜느라 당황하고 있었으나 한 사람만 지호를 똑바로 보았다. 그 정체불명의 안경이 시퍼렇게 빛난다. 지호는 생긋 웃었다.
“이런 실험, 불법이에요.”
치료기는커녕 마정석 에너지를 염동력 에너지로 전환해 이형 에너지를 자체 충돌시키는 기이한 실험이다. 반응이 중첩될수록 주변이 일그러졌다. 균열 경계와 같은 현상.
짐작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지금 균열을 열려고 하는 거다.
원리를 알아낼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이형 에너지가 일그러지고 확장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으니. 몸으로 느껴지는 파장이 아니었다면 지호는 집에서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그를 움직이게 한 건 어쩔 수 없는 책임감이었다.
이 동네에 각성자는 없다. 최소한 이 파장을 감지할 능력 있는 각성자는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걸 내버려 두었을 리 없으니까.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이기에 지호가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 누군가가 지호에게 힘을 주지 않았겠는가.
어두워서 다행이다. 지호는 후들거리는 제 꼴을 들키지 않아서 약간 안심했다. 태연한 척하기 위해 헛기침을 가볍게 한 그는 색을 되찾아 가는 천막 내부 풍경을 보고 안심했다.
“여기가 사람도 적당히 많고 구조대나 헌터 협회가 오기에 적합한 위치라서 실험한 건가요? 고속 도로 입구 부근이라 이동이 쉽긴 했겠어요.”
“우린 치료 실험을…….”
“이형 에너지를 쐬기만 해도 증상이 나아지는 사람들에겐 치료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죠.”
모른 척하고 싶었다.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넘어가고 싶었다. 동네에 와서 느낀 익숙한 공기가 지호를 고민하게 했고, 한편으론 이거라도 붙잡고 싶을 사람들을 위해 놔두고 싶단 생각도 했다.
하지만 옳지 않다.
균열을 강제로 여는 실험 같은 건, 결단코 옳은 일이 아니다.
“균열에 안 들어가 봤죠?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아요. 끔찍하죠. 그냥 거기 있는 것만으로 숨 쉬기도 어렵고, 인류는 먹잇감으로 전락해요. 편하게 죽을 수 있다면 차라리 운이 좋죠.”
플래시를 지호에게 비춘 서너 사람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기이하게 비틀렸다. 빛이 얼마 없어도 지호는 그 얼굴들을 잘 볼 수 있었고, 뒤틀린 파장의 이형 에너지에 노출된 사람의 몸에 아른거리며 남아 있는 기이한 에너지 뭉치 같은 것들도 보고 있었다.
동네에 들어설 때 다리를 절뚝이던 사람도 그랬다. 한쪽 다리에 이상할 정도로 이형 에너지가 뭉쳐 있었다. 모두가 무언가에 짓눌린 듯이 아프다. 이전에 가진 질병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고, 이 불법적 실험 때문이기도 했을 터.
“운이 나빴네요. 제가 집에 와 보지만 않았어도 균열 터질 때까지 아무도 몰랐을 텐데. 그렇죠?”
어둠에 감추어졌던 색 빠짐 현상이 사라지자 지호는 완전히 안심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의 인상은 진작 험악했고, 누군가가 쳐! 하고 소리치며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싸울 필요가 있을까? 지호는 곧장 위로 뛰어올랐다. 천막 위쪽 천이 찢어지며 한쪽 면이 완전히 무너지자 바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난리가 났다. 가로등 불빛과 어두운 밤하늘. 흐릿하게 그림자만 보이는 인영을 향해 모두가 삿대질한다.
“저 사람이 치료기를 망가트렸어!”
용의주도한 목소리 이후로 비난이 커졌다. 전등 네 개 중 하나만 불이 켜진 미등 위에 올라앉은 지호는 그 매서운 욕설과 비난들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어찌하겠는가? 가짜 희망이라도 희망이었던 것을. 그가 부숴 버린 게 가짠지 진짠지 저 사람들에게 무엇이 중요할까.
명은이 그토록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데도 아무도 그를 강제하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 지식 없는 실험은 뭘 일으킬지 모르니까.
헌터들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었기에 지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정석으로 물건을 만들고 가공하고 다듬는 일련의 과정에서 사고가 몇 번 있었다고.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이 적거나 없는 지역을 골라 숨어서 연구하곤 했었다고.
그때는 사고로 터진 소규모 균열도 많았다고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행이다. 누워 있는 동안에 헛된 시간을 보낸 게 아니어서 다행이고.
화가 난 사람들 뒤로 연구자들이 슬그머니 기기를 챙겨 달아나는 게 보였다. 지호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애초에 현장을 습격해서 증거를 잡은 것도 아니었고, 균열 경계와 비슷한 현상 영상을 찍은 것도 아니었다. 천막을 쳐 가며 감추려고 했던 것들을 부수었으나 완전히 끝장내지는 못했으니 어딘가에서 또 이런 짓을 하겠지.
그러나 적어도 그런 일에 휘말리는 사람들이 이들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이형 에너지는 사람에게 잘 들러붙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했지만, 지호는 별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냥 그렇게 말했다. 표면 장력 강한 액체 같기도 하다. 평범하게 아픈 사람들 팔이며 다리며 가리지 않고 오염된 것처럼 보인다. 이 순간만큼은 치유계 특화 능력자가 아닌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지호는 가로등 위에서 공원 저편으로 훌쩍 뛰었다.
신체 계열 능력자였기에 무게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나가지만, 그걸 이겨 낼 근력이 충분하기에 곡예는 어렵지 않았다. 낡은 건물들 앞에 착지한 지호는 금세 아는 얼굴을 마주쳤다.
“네가 소문의 그 각성자였구나.”
“안 자고 있었네. 밤이 늦었는데.”
“며칠 후면 나도 치료받을 수 있었어. 내 차례였는데. 네가 기기를 부순 거지? 네가 그 공원에 갑자기 나타난 각성자 맞지?”
이상한 데서 소문이 빨랐다. 다솔의 품엔 낮에 받아 온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 밤에 저걸 들고나온 이유가 뭐냐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호는 볼 수 있었으니.
“그거 버려. 다신 받으러 가지 말고.”
“왜?”
“공원에 있던 그 사람들이 나눠 준 거지? 치료기 연구하던 거 아니야. 사람들을 좀 더 먹기 좋은 음식으로 만든 거지.”
“뭐?”
“이제 괜찮을 거야. 당분간은.”
지호는 뻣뻣하게 굳은 다솔에게 다가가 손에 들린 상자를 가지고 왔다. 미약한 반항은 있느니만 못하다. 상자는 가벼웠다. 당연한 일이다. 여기 담긴 건 순도 낮은 마정석 가루. 존재하는 것만으로 미약한 기운을 뿜어내고, 움직이거나 부딪히면 그 파장이 강해진다.
“저런 사람들 오면 함부로 믿지 말고 신고해. 큰일 날 뻔했어.”
“치료기는, 그럼, 치료해 주는 건 가짜야? 사람들이 증상이 많이 나아졌댔어.”
“다솔아. 치료의 빛은 이런 거야.”
지호는 상자 속 마정석의 에너지를 천천히 흡수했다. 그 여파로 시퍼렇게 빛나는 지호의 손이 다솔을 순식간에 겁에 질리게 했다. 그러나 차분하고 태연한 지호의 태도는 그를 겁먹게 하지 않았고, 그래서 다솔은 지호의 손이 제 얼굴이 닿을 때까지도 얌전히 굳은 채였다.
부드러운 녹색 빛이 다솔의 피부에 내려앉는다.
지호의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기에 흉터가 극적으로 낫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불그죽죽하게 가 있던 켈로이드성 흉터 자국이 가라앉고 상처가 옅어지는 효과는 있었다. 딱 거기까지다. 지호는 치유계 전공이 아니었고, 본래 이쪽 일은 의학 공부를 마친 다음에나 일 인분을 할 수 있다고 들었으니.
“나는 이런 것보다는 다른 걸 더 잘해. 그래서 제대로 도와줄 순 없겠다. 그치만 저런 사람들보다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