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당연히 급성 균열 건으로 훈련받는 것인 줄 알았다. 지호를 비롯한 헌터 지망생들의 얼굴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훈련관은 빈 벽면에 화면을 띄웠다. 알고 보니 천장에 빔 프로젝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연수 센터의 지령실입니다. 본래는 송도 균열 사태를 지휘하던 사령탑이기도 하죠. 아시다시피 송도 센터가 균열에 휘말렸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연수 센터로 이관된 상황이라서요.”
아시다시피라니. 지호를 비롯한 몇몇 헌터의 표정이 어색했다. 센터 간의 정보 격차가 크긴 한 모양이다. 훈련관은 센트럴 파크를 지목했다.
“이번 사태와 같은 급성 균열 사태가 또 벌어질 경우를 대비해 정식 헌터가 아닌 여러분에게 균열 출입을 허가합니다. 다만, 위험한 괴물이 많은 관계로 안정성이 확보되거나 쉽게 제압 가능한 괴물이 있는 구역만 허가할 예정입니다. 또한, 다른 헌터와 동행해야만 입장이 가능하며, 능력에 따라 팀을 나눌 것이므로 밸런스 조정을 위한 팀원 재배치 단계를 거칠 예정입니다. 질문 있습니까?”
너무 급작스럽다. 균열에 들어간다고? 임시 각성자들이 불안한 듯 술렁였으나 목소리 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훈련관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 사람을 지목했다.
“계양 균열 폭주 사태 때 어디 있었습니까?”
지목받은 각성자는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지호와 같은 곳에 있던 임시 각성자다. 상태가 좋지 않아 다른 사람들에게 부축을 받았던.
“여기 모인 여러분은 모두 이번 급성 균열 파국 전 임시 소집되었던 지망생들입니다.”
샛노란 명찰 붙은 전투복이 지급되어 모두가 어색하고 뻣뻣하게 자리에 앉아 있다. 나이도 성별도 생김새도 제각각인, 그러나 각기 타인을 위해 몸을 던진 선한 사람들. 훈련관은 특히 어려 보이는 작은 헌터 지망생 하나에게 시선을 오래 두었다. 지호는 영문도 모르고 눈치를 살폈다. 뭐 잘못했나.
“균열 파국, 그러니까 균열 폭주로도 불리는 해당 사태 때 운 좋게 잘 대처해 준 각성자가 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 각성자가 아니었으면 여러분 때문에 균열 내부에 있던 사람은 다 죽었을 겁니다.”
훈련관은 덤덤했으나 내용은 치명적이다. 임시 각성자들 중엔 기본적인 교육부터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사실, 여러분에게는 훈련보다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압니다. 이번 훈련을 통해 당장 투입이 가능한 사람과 불가능한 사람을 나누게 되겠죠. 여러분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 각성자가 되었지만, 그 힘의 크기는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괴물을 사냥하는 방법으로 강해질 수 있죠. 그리고 몇 가지 방법이 더 있긴 합니다. 균열의 이형 에너지에 노출되는 게 그 방법의 하나죠. 당장 강해질 의무는 없습니다만, 생각 외로 많은 이들이 희생된 관계로 여러분의 빠른 성장이 필요합니다.”
훈련관은 덤덤하게 이야기하며 열 사람 정도 되는 이들의 사진을 띄웠다. 그들의 사진엔 검은 리본이 둘러 있었다.
사망자 명단이다.
“계양 균열에서 희생된 수가 벌써 열 명이 넘습니다. 아시다시피 각성자들은 수가 많지도 않고, 노련하고 경험 있는 각성자들은 더더욱 적습니다. 여러분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도와줄 이가 아무도 남지 않게 될 때를 대비할 필요는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무리 사망자가 나온대도 이런 이야길 할 상황까진 아니지 않나. 헌터 지망생들이 술렁이자 훈련관은 잠시 그들을 둘러보았다가 한숨 쉬며 화면을 껐다.
“괴물이 균열을 빠져나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것 중에 흔한 것들만 연구된 상태고, 여전히 미지의 개체들이 많다는 걸 아시지요? 코드 레드 개체 외에 외부 출입을 시도하는 괴물이 한 놈이 더 나타났습니다. 1세대 팀에 중상자가 발생했고, 교전 중이며, 일부 사망했습니다.”
말도 안 돼.
손이 덜덜 떨렸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보현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주머니에서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는 지호를 곁에 앉은 소민이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연수 센터로 간다는 지호의 짧은 상황 보고는 이십 분 전에 보낸 메시지다. 아직 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 메시지는 한밤중에 보현이 보냈던 밥 잘 챙겨 먹으라는 안부 인사.
전화해도 될까? 혹시 정말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지. 아니, 숨어 있는 상황에서 지호의 전화벨 소리가 보현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또 덜컥 겁이 났다. 지호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자 소민은 뒤에 앉은 지윤을 불렀다.
“지윤 씨, 지호 씨 좀 봐 줘요.”
지호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임시 각성자들은 구조자에게 보호받는 경우가 많다. 지호와 마찬가지로 일부 임시 각성자들은 1세대 혹은 2세대 헌터들의 피보호자였으며, 개중에는 이번 급성 균열에 파견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훈련관이 다시 화면을 켰다. 조금 전 영정 사진들이 사라진 깔끔한 지도다.
“만약의 사태를 위해 우리는 모든 교육 과정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영상만으로 할 수 없는 교육이 있기에, 오늘은 균열에 들어갈 겁니다.”
트라우마가 심한 몇몇은 그 말을 듣자마자 떨기 시작했다. 훈련관은 뒤편에 서 있던 훈련 보조 헌터들에게 그들을 지목해 데리고 나가도록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균열까지는 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강해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힘을 한계치까지 사용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로 이동 능력자 여러분이 여기 있는 이들을 균열까지 옮길 겁니다.”
이번에는 지윤 옆에 앉아 있던 하나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소민의 힘에 유독 멀미 증상을 보였던 탓이다. 소민뿐 아니라 다른 이동 능력자들도 비슷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의 두려움엔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훈련관은 봐주는 일 없이 지시했다.
“해당 지점으로 이동합니다. 이동 거리에 오차가 없도록 들어가며, 이동 시 곧장 교전에 들어갈 상황을 대비해 구현화 조가 방벽을, 치유 조가 나머지 둘을 보조하며 다음 이동 구역을 감지계가 관찰하고 보고하십시오. 지시는 이상입니다. 아, 신체 계열 특화 능력자들은 저와 함께 뜁니다.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훈련관이 몇 명을 지목했다. 지호와 친구들은 운 좋게 한 조에 묶였다. 그들이 이미 한 번 함께 활동한 이력이 있어서 그렇게 맺어 준 것일 수도 있었다. 지호가 감지 담당, 하나가 방벽 담당이다. 기존 헌터 한 사람이 도우미 역으로 한 조에 다섯 내지 여섯. 적당한 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이들처럼 출발하진 못했다. 지호의 상태가 너무 안 좋은 탓이었다.
“어, 언니가. 언니가 균열에 들어갔어요. 언니는 다쳤을까요? 다친 사람 목록 같은 건 볼 수 없나요?”
“실시간으로 전투 상황이 업데이트되진 않아서요.”
지호네 조에 배정된 헌터는 난처한 얼굴로 균열 어플까지 확인시켜 주었다. 헌터들 간의 소통 창구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다. 그저 사망자 이름, 사망 원인, 출몰 괴물에 대한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을 뿐.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이름이 올라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물론 보현을 그의 가족처럼 여길 만큼 친해지진 않았다. 그러나 가족과 다름없게 지호를 보호해 주는 사람이고, 이제는 없는 가족들을 제외하면 지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지호는 보현이 던지는 상황에 안 맞는 농담을 열 번이라도 더 들어 줄 수 있었다. 연락만 된다면 백 번도 듣고 웃어 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보현에게 연락은 없다. 지호는 상태 메시지를 [언니 연락 주세요.]로 바꾸고 떨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출발했다. 그들도 떠날 시간이었다.
“이, 임보현 헌터라는 1세대 헌터 소식 들어오면 꼭 전해 주세요.”
그러마 하는 이야길 세 번쯤 듣고 나서야 지호네 조 역시 출발했다. 훈련관은 마지막 조가 떠나기 무섭게 혀를 차며 화면을 정리했다.
병아리들을 소집할 때까지만 해도 노는 헌터들 굴려 헌터 지망생들에게 좋은 경험 시켜 주자는 취지만 있었다. 그러나 한 시간 전, 연달아 비보가 도착했다.
정신 방벽 능력이 없다면 균열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들어가지 않는다면 동료 각성자들을 구할 수 없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훈련관은 욕설과 함께 벽을 쳤다.
헌터들은 언제나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구조 작업이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그렇다.
“저, 선배. 임보현 헌터 말인데요…….”
훈련 보조로 들어가지 않은 헌터가 조심스럽게 훈련관에게 다가왔다. 임보현. 그 이름자부터 헌터들 사이에 유명한 1세대 헌터다. 정신 방벽을 비롯해 거의 모든 계열에 재능이 있는 올라운더.
“왜?”
“이번에 팀원 절반이 죽은 헌터 팀에 임보현 헌터가 속해 있어요. 사망자 명단엔 없는데…….”
좀 전에 몸을 덜덜 떨던 작은 헌터 지망생의 허연 얼굴이 떠올랐다. 정확한 소식도 아닌데 전할 이유는 없다. 훈련관은 혀를 차며 센터에 남은 다른 헌터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다.
“괜한 이야기 해서 불안하게 할 것 없다. 부평 기능공 연합에서 정신 방벽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 보조 방어구를 개발한 적이 있고, 그걸 시험해 보는 단계다. 괜히 허튼짓하다 다치지 말고, 훈련 보조는 3세대들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몸이나 풀어.”
헌터 지망생들을 위해 지웠던 상세 자료들이 제대로 출력되며 지도에 현재 상황이 떠올랐다. 상황실에 모인 헌터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코드 레드 개체는 여태까지 하나였다. 생물의 정신을 침식해 균열 경계를 알아내고 탈출 방법을 모색하던 바로 그 괴물. 코드 네임 퀸 패러사이트.
그리고 오늘, 또 한 개체의 정보가 코드 레드 목록에 올랐다.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 임시 각성자들은 치료 시설로 이송 완료했습니다.”
“좋아. 브리핑 시작한다. 2팀의 김동주 반장에게서 온 보고다. 새로이 보고된 괴물의 파악된 특수 능력은 복제. 접촉한 대상과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부여된 코드 네임은, 도플갱어. 독일에서 한 차례 보고된 바 있으며 근방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현재 알려진 개체는 하나. 다른 괴물들처럼 자가 복제 하여 수를 불린다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다행스럽게도 코드 레드 원, 퀸 패러사이트처럼 신체가 튼튼한 것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놈의 발견 당시 부상당한 몸으로 방심한 헌터를 습격하여 정명섭 헌터 사망. 놈의 능력을 무효화하며 물러난 김동주 헌터는 도플갱어의 능력에 환각이 있다고 판단했다. 남의 모습을 훔치는 데다 환상까지 보여 주니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괴물이야. 놈을 포획할 생각은 마라. 발견 즉시 사살한다. 어떻게 모습을 훔치는지까지는 밝혀지지 않았어. 차라리 밝혀지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는 과정에서 희생되는 헌터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훈련관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마치며 현장에서 다른 헌터들이 보내온 영상을 화면에 출력했다. 화질이 나쁘고 빛이 모자라 어두운 화면이지만 놈이 지형지물과 비슷한 모양으로 서 있다가 부근의 헌터를 습격하는 장면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낯선 개체를 만나면 정보 수집부터 시작하는 게 꽤 많은 헌터들의 습관이지. 그러나 이놈을 만날 때는 절대 그러지 마라. 생존이 우선이고, 가능하다면 사살한다. 잊지 마라. 놈의 넘버는 코드 레드 투. 도플갱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