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지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얼굴 반반한 퓨어 헌터를 노려보다가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꺼냈다. 상원은 자기 연락처를 입력하고 통화까지 눌러 지호의 번호를 받아 낸 다음 기쁘게 웃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네. 그래서 어느 센터로…….”
“서상원, 한다빈 앞으로!”
박 팀장이 호명하는 두 사람은 좀 전에 거수했던 신체 계열 퓨어 헌터들이다. 상원은 다녀오겠다며 일어섰고 나머지 한 사람은 썩 편치 않은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만 들었다.
“안정화되지 않은 균열은 출입할 수 없는 거로 아는데요.”
“양솔 박사의 연구 결과로 해당 헌터들은 출입 가능합니다. 1번 출구로 이동합니다.”
박 팀장의 파장이 두 사람을 훑었고, 세 사람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박사의 이름이 유명한지 임시 헌터들 사이로 퍼졌던 불안감은 금세 가라앉았다. 그러나 지호는 박 팀장의 말이 맞는 건지 상원의 말이 맞는 건지 몰라 갈등했다.
그러고 보니 급성 균열이 터져 난리가 났는데 양 박사는 어디로 갔나. 연구실엔 분명 없었다. 거기서 김 반장의 테스튼지 뭔지를 받는 동안에 지나갔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적어도 연구실을 돌아다니는 일은 없었다. 실험실 중 하나에 처박혀 실험만 하고 있는 거라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호는 계양 균열이 터지던 날 양 박사를 부르며 이동 포트로 뛰어 들어오던 박 팀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급성 균열이 터졌으니 관련 연구를 하던 양솔 박사를 찾아온 건가? 박사는 그것과 관련된 연구로 어디 박혀 있는 거고?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추측하는 의미도 없다. 그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이리 조합했다가 저리 조합하기를 반복할 뿐.
급작스러운 폭발음.
생각이 뚝 끊겼다. 몇몇이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지호는 그들 중 하나였다. 무슨 소리지? 감지계 임시 각성자 몇몇이 파장을 펼치려는 것을 보고 지호는 빽 소리쳤다.
“감지계 능력 거둬요! 사고 납니다!”
몇몇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능력을 거두었으나 한 명은 아니었다. 동주를 이해하게 될 줄이야. 지호는 다급히 그 각성자의 팔을 붙들었다.
“이봐요!”
여자가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동공이 풀렸고 초점이 정확하지 않다. 패닉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몸은 흔들리는데도 능력이 균열로 뻗어 나갔다. 균열 구조대원들이 안에 들어갔는지 구조 차량에서 연결된 줄이 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제 함께했던 대원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단박에 머리로 피가 몰렸다. 안 돼! 지호는 다급히 손을 뻗었다.
지호는 동주처럼 난폭하게 행동하거나 남에게 손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균열 부근이다. 빠른 속도로 주변을 향해 퍼져 나가던 타인의 힘. 그보다 빠르게, 살처럼 쏘아진 지호의 힘이 그물처럼 펼쳐졌다. 남의 힘을 막을 수 있나?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다. 그러나 당장 지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뿐이었으므로.
성질이 다른 두 힘이 물감처럼 섞이는 듯하다가 서로를 밀어냈다. 패닉에 빠졌던 각성자는 뻗어 냈던 힘이 막히자 반동을 받아 요란하게 기침을 토하며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정신 좀 들어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몇 있다. 당연한 일이다. 모인 대부분이 임시 각성자들. 전투복에 자기 이름 하나 없는 병아리들이었으니.
균열에서 돌아와 아직도 삶을 되찾지 못한 사람들을 당장 데려다 놓고 무슨 일을 하겠다는 말인가.
지호 본인 역시도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텐데. 그나마 바로 어제 균열 구조대원들과 함께 현장을 뛰면서 균열에 적응했다.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무엇이 아니라 그저 자연재해일 뿐인 현상이라고 계속 세뇌하듯 이야기했다. 구조대원들이 그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지호의 몸이 떨릴 때마다 그들의 얼굴을 보게 했다. 회색빛으로 변해 온통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균열 내부 풍경이 아니라 거뭇하게 검댕 묻어 지저분하지만,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게 했다.
그래서 지호는 이제 균열 옆에 있을 수 있었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각성자처럼 당장에라도 숨을 쉬지 못할 것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박 팀장과 두 각성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책임자급도 없다. 뭔가 사건이 터진 모양이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어, 지호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제가 균열 구조대분들께 배운 게 몇 가지 있어요. 우선 지금 많이 힘드신 분들은 균열을 등 뒤로 하고 돌아서세요. 괜찮으니까. 천천히 숨 쉬시고요. 옆에 있는 분들이 도와주세요.”
하나같이 힘들어 보이는 얼굴들이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파리하고 죽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도 힘들면서, 각성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우선 챙겼다. 호구들 같으니. 지호는 보현의 그 말을 몇 번이고 떠올리면서 다행이란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성정이 착한 사람들이라 타인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는 힘든 일을 이겨 내려 애쓸 수 있으니.
떨리는 손이 떨리는 몸을 부축한다. 대부분이 돌아서자 지호는 승찬이 했던 것처럼 하나 둘, 하나 둘,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구호했다. 이토록 즉각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 줄은.
저도 모르고 있었지만, 지호 역시 떨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균열에 대해 모르는 임시 각성자들을 위해 앞으로 나선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학생이 그렇게 모두를 추스르려 하자 조금 괜찮은 사람들도 동참했다. 서로를 진정시키는 트라우마 보유자들. 간신히 상태들이 괜찮아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각성자들이 괜찮아지자마자 또 폭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돌아서 있었고, 또 한 차례 들려온 소리에 적응해 패닉에 빠진 사람까지 나타나지는 않았다. 구조 차의 구명줄이 미친 듯한 속도로 되감겼다. 무전 소리가 거칠다. 인간의 성대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가장 숙련된 헌터조차 그 소리 앞에서는 행동을 멈출 것이다. 그러니 임시 각성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간신히 떨림을 멈추었던 일부가 곁에 선 사람이 느낄 정도로 심하게 몸을 떨며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울음을 터뜨리고 일부는 아무 방향으로나 능력을 쏘아 내려 준비했다. 무의식의 발로였다. 조금 전처럼 전부를 막을 수는 없다. 지호의 몸 역시 미친 듯이 떨렸다. 그는 균형을 잃는 자신을 느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손을 바닥에 짚는 순간, 균열 내부에서 강풍에 버금가는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각성자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힘을 뿌리는 사람도, 그를 막으려는 사람들도 넘어졌다. 진작 바닥에 쓰러져 있던 지호는 넘어지는 대신 뒤로 약간 밀렸다. 각성자들이 쏘아 낸 힘이 균열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본 지호는 바람이 부는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현이 했던 행동을 떠올린다.
손을 펼친 방향으로 반구형의 막이 펼쳐졌다. 본디 각성자의 파장을 막는 힘이다. 그들의 힘 또한 막아 낼 수 있다. 더 넓게, 더 멀리! 눈에 핏발이 섰다. 다른 각성자들의 힘이 장막에 부딪칠 때마다 누군가 등을 걷어차는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균열과 각성자들을 동시에 보호하는 건 토악질 날 만큼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구조대 차량이 바람에 슬슬 밀리기 시작하더니 각성자들 쪽으로 향했다. 기우뚱 기우뚱 흔들리는 꼴이 심상치 않았다. 지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저런 무거운 것까지 막아 낼 수 있을까? 미친 듯이 흐르는 땀에 눈이 따가웠다.
그때였다. 누군가 지호의 등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모르는 목소리다. 그리고 손은 하나가 아니었다. 두세 사람의 손이 등에 닿았다. 이내 청량한 느낌이 몸을 천천히 감싸며 통증이 잦아든다. 치유계 능력이었다.
고개를 들자 병아리 임시 각성자들이 엉망이 된 꼴로 지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진짜 엉망이다. 균열 초창기 구조로 사방이 부서져 엉망이 된 길바닥을 바람 따라 나뒹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표정은 괜찮았다. 누군지 모를 이가 울며 치료의 힘을 뿜어냈다.
“고마워요. 덕분에, 정신을…….”
“또 와요!”
누군가 비명처럼 외쳤다. 정신 차린 각성자들이 패닉에 빠진 각성자를 지호 근처로 끌어모았다. 범위가 좁아지자 조절이 한결 수월해졌다. 모래 먼지 섞인 바람을 막으며 지호의 장벽이 천천히 견고해졌다.
구명줄이 거의 다 감겼다. 다행히 차는 쓰러지지 않았고, 구명줄 저편에서 다 망가진 구호복이 질질 끌려 나왔다. 세상에. 지호는 경악하며 곁에서 그에게 치료술을 펼치고 있는 헌터의 팔을 움켜쥐었다.
“나 말고 저기! 나 말고!”
존칭이고 뭐고 붙일 새가 없었다. 거친 바람에 방호복이 요란하게 뒹굴었다. 안에 든 사람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겠지. 구현화계 일부가 들것을 만들어 냈다. 균열을 빠져나온 구호복 내부를 감지계가 살핀다.
“살아 있어요!”
누군가 신을 찾았다. 바람이 조금 잦아들자 지호는 곧장 방벽을 거두었다. 임시 각성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르르 구조대 쪽으로 달려갔다.
아는 얼굴이 아니길. 지호의 머릿속에 그런 이기적인 기도가 벼락처럼 떠올랐다. 구호복을 열었을 때 거기에 그들의 얼굴이 없었으면. 아니,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정신을 차린 임시 각성자 일부가 지호와 함께 방벽을 펼쳤다. 정신계와 구현화계 하이브리드 헌터들이 소수 있었던 모양이다. 구조 차량이 안정적으로 방벽 내부로 들어올 수 있을 만한 크기가 되자 구조대원들의 창백했던 얼굴에 조금이나마 핏기가 돌았다.
그러나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구조복 내부는 심각했다.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강풍 때문에 지호는 방벽을 유지하느라 응급 처치에 참여하진 못했다. 어차피 다른 치유 능력자들의 힘이 더 뛰어나 지호가 뭔가를 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균열 부근으로 방벽을 펼친 채 지호는 힐끔힐끔 뒤쪽을 확인했다.
비명을 지를 수도 없을 만큼 아픈 모양인지 누군가 구조복 내부 대원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턱 다 상한다고, 좀 참으라며 입에 천을 욱여넣는 모양새가 익숙했다. 각성자들과 균열 구조대원이 뒤섞였으나 모두 지저분하고 엉망진창이란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좋은 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양새의 인원들이 새집처럼 뻗은 머리를 모아 부상자의 구조복을 하나씩 해체했다.
좋게 말하자면 아직 신체 모양이 유지되고 있었고, 현실 그대로를 직시하면 숨만 붙어 있는 꼴이었다. 엉망이 된 살점이 구조복에 그대로 붙어 나와 대원의 몸이 갓 잡은 생선보다 더 힘차게 퍼덕였다. 사방에서 몸을 눌러야 했으나 누르는 것조차 고통이었을 것이다.
“사, 살점을 최대한 오, 오, 옷에서 떼어 내요. 그 부위에 자, 잘 맞게 얹어서.”
지호를 치료해 주던 치료 계열 각성자가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른 각성자들은 최대한 시키는 대로 했다. 그 와중에도 몇 번쯤 강풍이 불어왔고, 균열 내부에서 입간판이나 나뭇가지, 그밖에 잡다한 것들이 굴러 나와 부딪혔다. 말이 좋아 부딪힌 거지 개중에 몇은 방벽을 거의 뚫을 기세로 와 처박혔다. 지호는 침을 삼키며 방벽 유지에 집중했다. 이게 깨지면 환자 치료고 뭐고 불가능했다.
구조복에서 살점을 떼어 내는 그로테스크한 작업이 끝나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치유 계열 헌터들 전원이 집중해 힘을 흘려 보내기 시작했다. 정신계 중 일부는 그들의 힘을 고르게 펼치는 데 일조했다.
각자 배운 대로의 협업이었다. 구현화계 각성자들이 곁에서 부목과 붕대로 쓰일 만한 물건들을 만들어 냈다. 애석하게도 약을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본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 아니라, 부근의 물질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기술에 가까웠으므로.
신체가 천천히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살점이 붙었으나 피는 부족했고, 신체 중 어느 부분이 떨어지거나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치유술 역시 상태 복원의 개념에 가까웠기에 없는 팔다리를 재생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정도로 강한 치유술사가 나타난 적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통증으로 신음하던 대원의 표정이 조금씩 편해졌다. 여전히 창백하다. 당장 수혈이 필요하고,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구급차가 흉물스러운 몰골로 나타났다. 앞 유리에 심각한 금이 갔고 차체가 찌그러져 있다. 각성자들의 방벽 옆으로 날아가는 물건들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대원은 안전하게 구조됐다. 걱정된 모양인지 정신계와 구현화계 하이브리드 헌터 지망생 하나가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치유 계열 각성자도 따라갔다. 구급차는 병원까지 안전할 것이다. 어느 정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