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지호는 눈도 비비고 얼굴도 두드려 봤다. 뺨을 꼬집어 꽈악 잡아당길 때쯤 되었을 때 지나가던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김 반장님 가셨어요. 위험 대상 아님 표식 찍어 주셨고요. 시킨 거 다 한 다음에 가도 된다고 하시네요.”
“네?”
“테스트 거친 거 처음이시죠? 원래 처음엔 되게 정신없고 그래요. 그게 익숙해질 때가 되면 정신 계열 침식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나. 아무튼, 종종 겪으셔야 할 거예요. 특별 관리 대상이시더라고요.”
“네?”
“정확하진 않은데 아마 마주쳐서 몇 마디 나누곤 곧바로 시작하셨을 것 같거든요. 보고에 따르면 총 다섯 번 사용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용 당시 감지하거나 막아 낸 게 있나요?”
“네? 아뇨.”
드디어 네 말고 다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르겠는 상황은 매한가지다. 다행히 이런 상황에 익숙한 연구실 직원이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김 반장님은 정신 계열 헌터시고 특수 훈련도 담당하고 계시거든요. 아무래도 특수 훈련 자체가 방심하는 상태에서의 침식을 방어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다 보니까 이런 경우가 생겨요.”
“그렇다고 이렇게 함부로 남을 공격하고 그래도 돼요? 불쾌합니다.”
연구실 직원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음, 김 반장님께 그러시다고 전달해 둘게요. 바쁜 분이라 회복까지 기다리진 않고 금방 가셨어요. 참, 균열 근처에 가실 거면 전투복 지급 받고 가라고 하시던데요.”
“그게 다였어요?”
“불만 있으면 임시 떼고 오라시더라고요.”
직원은 전달 사항은 다 전달했다며 자리를 떠났다.
바닥은 깨끗했다. 지호가 게워 낸 토사물의 흔적도, 컵이 무너지며 쏟아진 물의 흔적도 전혀 없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아 지호는 얼굴을 세게 두드렸다. 옆을 지나던 사람이 흠칫 놀랄 만큼 큰 소리다.
웃는 낯으로 사과를 건네며 그는 심호흡했다. 신체 강화 계열이라 별것 아닌 행동 하나하나 무지막지한 힘이 들어가 있어 조절이 필요했다.
동주의 허락도 있겠다, 반납했던 전투복을 다시 가지러 연구실 보조의 뒤를 쪼르르 쫓아간 지호는 분명 바쁜 분이라 떠났다고 했던 동주의 커다란 등짝을 목격하곤 뻣뻣하게 굳었다.
“실전에 바로 투입할 생각이 없긴 했는데, 감지계 능력을 먼저 강화시키지 않고는 다른 데 써먹기 어렵겠습니다. 이래서야 그냥 유리 대포 정도 되나?”
-완전 전투계 위주란 말인가?
“다른 건 차츰 테스트해 봐야죠. 우선 계양 균열에 들여보낼 순 없겠습니다. 어쩌다 그런 이상한 놈이 튀어나왔나 모르겠네요. 조사는 끝났습니까?”
-아직이야. 균열 안정기 들어서고 나서 다른 헌터들과 합류하게 되면 정확히 알 수 있겠지. 아직까진 변인을 통제하기 어려워.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한데 하나같이 몸 사려서는.
“코드 레드. 이만 출발해야 해서. 자주 보고드리겠습니다.”
삑. 버튼 끄는 소리와 함께 통신이 끊겼다. 목소리만으로는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모르는 목소린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지호는 숨을 죽인 채 동주의 뒤를 살폈다. 본디 작지 않은 패널을 핸드폰처럼 조작한 그는 곧 이동 포트 쪽으로 이동했다.
누구였을까? 보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지호의 능력에 관심이 있다. 이 정도 되는 사람이 보고를 올릴 만한 헌터. 혹은 각성자……. 정말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고작 한두 마디의 통화를 엿들은 게 다다. 건너편 사람이 남자라는 것 외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으나, 당장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닌 터라 어쩔 수 없이 지호는 몸을 돌렸다.
먼저 물품실에 들어간 연구실 보조로부터 새 전투복을 받은 지호는 여전히 가슴팍에 붙어 있는 샛노란 표식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병아리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동주와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조차 낯설어 지호는 김 반장의 이름자를 속으로 중얼거려 보다 고개를 저었다. 남들 부르는 것처럼 불러야지. 그 편이 어울리기도 했다.
전투복을 갈아입고 나온 지호를 맞이한 건 뜻밖의 얼굴이다. 물론 여기서 만나야 당연한 얼굴이긴 한데, 워낙 바쁜 사람이라 쉽사리 마주치긴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 이지호 각성자! 아니지. 이제 헌터라고 불러야 하죠?”
“아직 임시잖아요, 박 팀장님. 좀 주무셨어요?”
“몇 시간 잔 것 같습니다.”
눈가로 다크서클이 잔뜩 흘러내린 찬민은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로 웃었다. 가운 입은 연구실 사람 중 하나가 익숙한 듯 실험대 한쪽에서 앰플을 팀장에게 건넸다. 그는 벌컥벌컥 들이켜곤 끔찍하단 얼굴을 한다.
“으윽, 회복력 촉진 효과만 없었어도 이런 괴이한 걸 입에 넣을 일은 없었을 건데요.”
“또 어디 가세요?”
“아, 균열 구조 센터에서 헌터 지원 요청이 왔다면서요. 계양 균열에 각별 경계 등급의 이종이 나타나는 바람에 대기 중이던 헌터 대부분이 투입 불가로 전환됐지 뭡니까.”
“아, 들었어요. 무슨 기생체 같은 거.”
“당장 구조 인원이 부족해서 큰일이에요. 이지호 각성자는 적합 심사받았습니까?”
“바로 전에 김 반장님인지 뭔지 하는 사람한테요.”
오, 저런. 박 팀장은 짧은 탄식과 함께 지호를 동정하며 어깨를 토닥였다.
“그분 방식이 과격하기로 유명하죠. 고생했습니다.”
“저, 지금 혹시 균열 구조 센터 가시는 거면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어제도 다녀오긴 했는데.”
“같이 가려고 대기 중이었던 겁니다. 타 센터 한 번 들러서 다른 교육생 좀 챙겨 가지요. 포트로 올라오십시오.”
이동 능력 파장은 언제나 해일처럼 전신을 덮친다. 지호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능력 때문에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다른 센터의 이동 포트 위였다.
“호명하는 교육생은 포트 위로 올라오십시오.”
울렁거림이 가라앉는 동안 빳빳한 새 전투복을 입은 헌터들이 포트 위로 올라왔다. 하나같이 가슴팍에 샛노란 마크가 박혀 있다. 임시 각성자들을 다 차출해 갈 만큼 급한 일이 있나?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재차 이동 파장이 발부터 머리끝을 순식간에 훑는다.
시퍼런 빛이 가라앉은 뒤, 익숙한 구조 차량이 보였다. 박 팀장은 몇 명의 이름을 불러 두 사람을 한 조로 묶어 주며 필히 함께 다니라고 지시했다. 지호의 이름 뒤로 아는 이름이 불렸다.
“이지호, 서상원!”
이름이 들리자마자 거수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지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대 쪽은 반가워하며 이쪽으로 달려왔지만.
좋지 못하다. 공인 각성 지원부에서 마주쳤던 그 이상한 각성자였다. 손바닥을 긁던 남자. 박 팀장이 교육을 다시 하겠다느니 뭐 그런 소릴 했었던 것 같은데 저 낯짝을 보니 별다른 후속 조치는 없었던 모양이다. 지호의 썩은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남자는 반가워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보네요. 연락 기다렸는데.”
“왜요?”
“저 아무한테나 연락처 주고 그러는 사람 아녜요.”
“아, 예.”
“혹시 잃어버렸어요? 검사하면서 이것저것 거치는 게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좋네요. 인연인가 봐요.”
상원의 얼굴이 수줍음으로 물들었다. 이쪽과 저쪽의 공기가 전혀 다르다. 팀을 바꿔 달라고 말하자. 그렇게 결심하는 찰나, 헌터 팀 전원의 기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당황하지 말고 모이세요. 흩어지지 마십시오!”
박 팀장 목소리에 흩어져 있던 병아리들이 후다닥 모여들었다. 불안한 얼굴로 눈을 굴리는 사이 균열 구조대 쪽에서 누군가 황급히 달려왔다.
“헌터분들이십니까? 전원 헌터인가요?”
“균열 내부 비상사탭니까?”
“예. 신체 계열 능력만 있으신 분들 계십니까? 다른 능력 병행자는 안 됩니다.”
해당 헌터의 외침에 박 팀장의 얼굴이 금세 염려로 물들었다. 그는 임시 헌터들을 훑어보며 눈을 찡그렸다.
“아직 시험 단계 아닙니까? 해도 정식 헌터들로만 확인해야 할 텐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 신체 계열 퓨어 능력자 없습니까?”
상원이 손을 들었다. 고작 두 사람이 전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박 팀장이 혀를 차며 통신을 열었다.
“계양 균열 근접. 임시 헌터들과 부근에서 대기 중입니다. 균열 내부에서 비상사태 발생. 신체 계열 퓨어 헌터들만 구조대와 함께 진입합니다. 나머지 대기 바람. 인원 규합해 경인 교대 역 1번 출구로 집합 바랍니다.”
통신 문법을 무시한 명령이었으나 제대로 전달됐다. 왜 신체 계열만 들어갈 수 있지? 균열에 헌터가 들어가면 문제가 생긴다고 했었는데.
불쑥 옆 사람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호는 기겁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상원이 속삭였다.
“신체 계열 퓨어 헌터들이 균열 초창기에도 균열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각성자란 거 아시나요? 이 사실이 발표된 건 고작해야 한 달 전입니다. 우리가 균열에 휘말렸을 때 말이죠.”
지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몸에 함부로 손대는 무례한 이지만 동시에 친절한 설명충이었던 상원은 지호가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저 아는 척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지 열심히 떠들었다. 내내 무시하는 것 같다가 귀 기울이는 게 반가운 것 같기도 했다.
“이마저 아직 공식 발표한 건 아니고 현장 조사를 다녀왔던 헌터가 의심되는 사안을 발표했던 거라 이번 균열에서 확인해 볼 참인 모양이에요. 몇천 명이 고립되긴 했지만, 이 정도 사이즈의 급성 균열 절반 이상이 산이라 피해 인원이 차라리 적을 것으로 예상하는 경우는 또 있기 어려우니까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더 많은 수가 어떻게 되기 전에 뭔가를 한다 이건가요?”
“아마 그런 모양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균열이 안정되기도 전에 헌터를 투입할 리가…….”
어느새 제 말에 집중하고 있는 지호를 본 상원은 빙그레 웃었다. 능글맞은 얼굴에 미소까지 걸리자 지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옆으로 뺐다. 영 가까이하기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이런 극비 정보들이 제가 있는 센터에선 공유되고 있더군요. 다른 곳으로 가셨던데 어느 지역에 계신 겁니까?”
“뭐, 다른 데로 갔어요.”
“아쉽네요. 제 연락처 다시 줄게요. 이번엔 잃어버리지 않게 제가 직접 입력해 주고 싶은데요. 아니면 저한테 연락처를 주셔도 괜찮고.”
상원은 넉살 좋게 웃으며 핸드폰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지호는 그 손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거기에 핸드폰 대신 질문만 하나 던져 놓았다.
“임시 각성자들한테까지 흘릴 만큼 허술한 이야긴데 제가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요?”
“진짜 중요한 이야기라면 임시 각성자뿐 아니라 일반인들한테까지 풀릴 거예요. 그리고 그래도 괜찮은 정보인지 알아내려면 이번 균열에서 확인하는 게 중요할 거고요. 그럼 급성 균열이 터져도 퓨어 헌터들이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겠죠.”
그게 사실이라면 갑자기 다종 계열을 각성한 스스로의 능력이 아쉬워지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유용하긴 하다. 여러 가지로 쓰임새도 많고 강력하고.
그러나 지호가 하고 싶은 구조 일은 아무래도 이쪽에 가깝지 않나.
“다녀와서 어떻게 된 건지 알려 줄게요. 그러니까 연락처 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