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생존자들
‘그래도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산 것 같은데, 지옥에 와 있네.’
지호는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독한 고요를 온몸으로 느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만 느껴졌다. 금 간 건물과 깨진 유리창, 부서진 차와 망가진 도로 같은 것들이 시야 너머로 펼쳐져 있는 것을 보니 지옥은 사실 이미 현세에 도래해 있었던 모양이다. 지옥에도 있네, 도로 표지판…….
그러나 지옥에는 있을 수 없는 지명에 지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쓰며 지호는 직전의 지옥보다 더 지옥 같던 순간을 상기했다.
욕이 절로 나왔다. 괴물들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기 위해 달려들던 아귀도의 한복판을 지나, 지호는 자기가 왜 멀쩡히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키자 옷이라기보다 넝마라고 불러야 할 천 조각이 간신히 몸에 매달려 있는 것부터 알 수 있었다.
옷에만 그것들의 흔적이 남았다. 몸은 멀쩡하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옷이 찢어지는 것에 고통을 느꼈을 턱이 없는데.
지호가 일어난 곳은 마트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그것들이 지호를 뜯으며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하던 것이 기억났다.
구역질과 떨림이 동시에 몰려와 지호는 웩 하고 속을 게워 냈다. 신물도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마트를 돌아다니며 시식 코너에서 집어 먹은 것만 대여섯 개는 넘을 텐데.
신물 대신 눈물만 쭉 뽑고 난 다음에야 지호는 정신을 차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멀쩡하다고까진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살아 있었다. 균열의 특이한 힘에 휘말린 것이 아닐까.
애당초 균열이 열리는 시점에 이형 에너지를 쐬는 것이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완벽히 밝혀진 게 아니라고 했었으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몸을 움직이자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지호는 아는 욕이란 욕은 다 토해 내며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팔이 갓 태어난 병아리 다리처럼 후들거렸다. 미쳐 버리겠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여기가 지옥이 아니라 여전히 인천이라면, 그리고 균열이 열린 지호네 동네라면 이렇게 누워 있는 게 안전할 턱이 없었다.
지호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균열 내부의 괴물들은 모두 특유의 소리를 낸다. 균열이 가장 처음 잡아먹는 것이 고요라고 했다. 그러니 차라리 조용할 때는 안전한 것이라고.
배운 걸 이렇게 알차게 써먹을 수 있을 줄이야. 지호는 억지로 몸을 끌었다. 아직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다행히 팔에 힘이 돌아왔다. 부근의 가게는 완파 상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걸칠 옷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먹을 것도 구할 수 있을지도.
얼마나 오래 쓰러져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상당히 시간이 흘렀음이 분명하다. 배를 만져 보면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것이 분명할 정도로 허기가 느껴졌다.
균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조용할 때 생존 식을 구해 두는 것이라고 배웠다.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지호는 우선 배운 대로 행동했다. 대로변에 누워 있던 몸을 주차라고 하기 민망하리만큼 망가진 차 근처로 끌고 온 것이 그 첫 번째 순서였다.
이곳은 균열이다. 언제까지 고요하겠는가?
지호의 추측은 옳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각다각 금속류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흔적을 쫓을 만큼 지능 높은 놈이 없기를 바라면서, 지호는 차체 높은 차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한쪽이 큰 괴물에게 밟힌 것처럼 우그러져 있었지만, 그만큼 다른 쪽이 기울어 올라가 있어 지호의 몸을 가려 주기에 적합했다.
다각다각다각. 균일한 소리를 내며 가까워진 건 매끈하고 날카로운 다리였다. 뾰족한 발끝에 군청색에 가까운 몸체.
아는 괴물이다. 통칭 거미. 다리 개수는 개체에 따라 적기도 하고 많기도 했지만, 모양새만큼은 거미를 닮아 둥근 몸에 길쭉한 다리가 달려 있었다. 결정적으로 놈은 덫을 만들어 생물을 사냥했다. 움직이는 것에 민감한 놈이다. 움직임으로 다른 개체를 인식하기에 자기들끼리는 끊임없이 움직였고, 그래서 특유의 다리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지호는 시험을 보기 위해 외우고 또 외웠던 것들을 복습하며 숨을 죽였다. 개중에 머리가 낮은 곳에 있는 것도 있었으나, 다행히도 바닥에 바짝 붙어 움직이지 않는 지호를 인식하는 놈은 없었다.
세 마리가 서로를 같은 종으로 인식하고는 다른 생물을 찾아 각자의 길로 떠났다. 다각다각 다리 부딪치는 소리가 천천히 멀어지자 지호는 그제야 숨을 토했다.
지능이 낮은 놈이라 다행이다. 들개 같은 놈이었으면 지호는 다시 살아난 이유도 모르고 또 죽어야 했을 것이다.
다시금 떠오르는 죽음의 감각. 잘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마저 퍼드득 긴장될 만큼 끔찍한 기억이다.
움직이자. 쓸데없는 생각은 생존에 방해될 뿐이다. 지호는 그가 ‘균열 생존’ 과목이라고 줄 치고 외우던 것들을 어떻게든 떠올리려고 애쓰며 차 밑을 빠져나왔다. 깨진 유리 조각에 쓸린 팔다리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균열에서는 상처가 잘 낫지 않는다. 그러니 상처 입지 않는 것이 최선의 치료다.
웃기는 소리였지만, 아무튼 그랬다. 균열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신체 수복 기능이 저하된다고 했다. 그러기 전에 나가야 하는데.
열심히 다리를 주무르자 간신히 다리에도 힘이 들어왔다. 지호는 몇 번 휘청이다 힘겹게 균형을 잡았다. 두어 걸음 걷자 어떻게 걸었던 것인지 몸이 기억해 내는 것처럼 멀쩡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럴 거였으면 진작 움직이지! 지호는 제 다리를 치며 욕을 뱉고는 곧바로 후회했다. 욕먹은 것도, 맞은 것도 어차피 자기였다.
다 부서진 상가에 운 좋게 옷 가게가 있었다. 취향에 맞는 걸 고를 때가 아니었다. 대충 보고 사이즈 맞는 걸 아무거나 주워 입은 지호는 곧바로 옆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있는 걸 알았는지, 혹은 부수다가 입에 들어간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본격적으로 날뛴 모양새라 거의 폐허에 가까웠다.
다 부서진 편의점을 대놓고 돌아다니기는 불안했기에 지호는 물건이 쌓여 있는 창고 문을 열었다.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지호는 문을 살그머니 닫기 무섭게 보이는 먹거리란 먹거리를 허겁지겁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도 제가 낸 부스럭 소리 하나하나에 다 놀라느라 시간이 좀 지체됐다.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었으나, 배를 다 채운 뒤 발치에 쌓인 쓰레기들을 보자 갑자기 민망함이 몰려왔다.
목을 축이고 미지근한 물 몇 개와 칼로리 바, 사탕 같은 것을 좀 챙기며 지호는 수시로 행동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미가 한두 번 지나갔으나, 그 이외의 괴물은 근처에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괴물들의 영역이 겹치는 경우는 드물다고 배웠으니.
핸드폰이 없는 게 아쉬웠다. 핸드폰만 있으면 균열 어플로 구조 요청도 할 수 있고, 생존자들과 연락도 할 수 있는데. 균열 내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게 해 주는 어플인데, 이게 있어야 헌터가 신호를 받고 구조하러 올 수가 있었다. 아무것도 없으니 일단은 생존자들을 찾든가, 자력으로 균열을 나가는 수밖에.
후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지호는 일단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 생존자들이 머무는 곳을 알리는 신호는 창문이나 문, 혹은 잘 보일 법한 곳에 흰색 천을 매듭지어 놓는 것이다. 옷이건 수건이건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휴지를 쓸 수도 있었다.
진짜 중요한 건 지호처럼 구조 신호를 보낼 기기를 잃은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아낼 방법이다. 부근에는 생존자들이 없는 모양인지 아무 식별 표시도 없었다. 곤란한 일이다. 거미보다 피하기 어려운 괴물이 있는 구역으로 이동해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엄마는 균열을 잘 벗어났을까?
다른 사람들은?
몸을 멈추면 곧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어지럽혔다. 지호는 주머니에 넣은 것 중 부스럭거리는 것은 까서 입에 집어넣어 버리고 물병을 쥔 채 심호흡했다. 일단 살자. 살아 나가서, 정말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고 엉엉 울어 버릴 거야. 다 큰 애가 운다고 해도 소용없다. 진짜 펑펑 울어 버릴 거라고.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울 힘도 아껴야 한다. 제일 무서운 건 탈수고, 그래서 물은 두 병이나 챙겼다. 가방으로 쓸 만한 걸 찾지 못한 게 좀 아쉬웠다.
균열 생존자들의 수기를 떠올렸다.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현명하게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방향조차 잡을 수 없는 회색 하늘이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분명 걷기만 하던 거미들의 발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지호는 곧장 행동을 멈추었다.
놈들이 달리고 있었다.
조금만 늦게 소리를 들었다면 몸을 움직이는 걸 들켰을 것이다. 그러면 놈들이 달려오는 건 다 부서진 상가 건물이 되었겠지. 무너진 곳이 많아 달아날 수도 없는 곳에서 이번에는 저 금속성 다리에 찢기고 찔려 죽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지호는 상상하는 것을 그만두곤 길가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뭘 쫓는 거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해서 저러는 것일 텐데.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 같은 걸 발견해 쫓아가는 꼴이면 좀 웃길 것 같기도 했다. 세 마리 모두가 달려갔기에 부근을 지날 괴물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지호는 양손에 든 페트병을 놓칠세라 과하게 힘을 준 상태로 다른 블록으로 이동했다. 방향은 거미들이 달려온 쪽, 그러니까 놈들과 반대 방향이었다. 차를 엄폐물 삼아 움직이느라 이동이 느렸으나 수확은 있었다. 멀지 않은 건물에 생존자 표식이 보인 것이다.
“아.”
그러나 상황이 쉽게 풀릴 거란 기대는 할 수 없었다. 거미의 영역을 벗어난 모양인지, 다른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으므로.
지호는 황급히 차 아래로 몸을 숨겼다. 끈적이는 몸에 느린 속도, 그러나 길게 늘어나는 촉수를 가진 놈이다.
소리에 민감한 놈이고 시각은 그리 발달하지 않았으나, 무슨 소리가 들리면 그쪽으로 촉수를 사정없이 휘둘러 대는 까닭에 접근도 상대도 여의치 않은 개체였다. 통칭 해삼. 촉수만 빼면 생긴 것 자체는 비슷해 붙은 별칭이다.
하필 건물 입구에 자리 잡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어 난감했다. 다른 입구가 있나 둘러보기 위해서 움직이는 동안 소리가 나면 어쩌나 싶어 이동하기도 마땅치 않다.
어찌한담.
숙련된 헌터들이나 가질 법한 유인 전술에 관한 지식이 지호에게 있을 턱이 없다. 먼 곳으로 큰 소리 나는 물건을 던져 볼까? 당장 생각나는 건 그런 원시적인 방법뿐이었다.
다른 괴물이 없기를 바라며 지호는 조용히 심호흡했다.
던져서 큰 소리가 날 만한 것을 구하기 마땅치 않아, 들고 있던 페트병 중 하나를 절반 이상 비웠다. 목을 축이고 손과 얼굴, 손 닿는 곳들을 씻었는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날까 봐 다리 위로 물이 흐르게 부어 가며 물을 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