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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56화 (56/110)

00056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무영이 자리에 앉는 것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던 연제는 안건을 꺼냈다.

“서북에서는 올해 들어 유독 겨울 가뭄이 심해 우물까지 말라버렸다고 하고, 호북에서는 오히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다는 상소가 끊이지 않소. 호북지방이라면 형부상서의 현(縣)이 있지 않소. 어떻소, 형부상서…….응? 형부상서 눈이 왜 그러시오? 누가 보면 운줄 알겠소.”

실제로 방금 전 까지 자신의 딸 강 예진을 생각하며 울고 있었던 형부 상서는 발갛게 부어오른 눈을 한번 비빈 뒤 고개를 숙였다.

“벼, 별일 아니옵니다. 며칠 잠을 못자서…….저희 현감(縣監)도 그런 내용의 연통을 계속 보내왔었습니다. 이번에 내린 폭설로 수 백 가구가 눈에 묻히고, 한파로 인해 우물이 얼어 물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는 다고 합니다. 긴급조치로 가문에서 보유하고 있는 곡식을 풀고 눈을 녹여 사용하는 방법을 권장 하였지만 미봉책일 뿐이라 도움이 시급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연제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아까부터 태자를 집요하게 노려보는 류 충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상…….흠, 흠. 재상! 뭐 좋은 의견 없겠소.”

류 충은 무영을 샅샅이 훑어보며 이 더러운 기분의 정체를 알아내려다 연제의 부름을 뒤늦게 듣고 고개를 숙였다.

“폐하, 지금 즉시 국고를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들 다 할 수 있는 말을 무성의하게 하더니 다시 무영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후- 재상. 왜 그런 당연한 말씀을 하시오. 당연히 국고는 풀어야겠지. 허나 그곳에 도달하는 데만 시일이 꽤 걸리지 않소…….재상! 집중 좀 하시오! 그러다 태자 얼굴 뚫어지겠소.”

연제의 호통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영을 노려보던 류 충은 아무리 보아도 무표정한 무영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낌새를 읽을 수가 없자 눈을 가늘게 뜨면서 침음 성을 흘렸다.

대학사 기류 명률은 연제의 다그침에도 불구하고 무영만 보고 있는 류 충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재상! 이 무슨 방자한 행동이오! 도가 지나쳐도 너무,”

류 충이 기류 명률의 말을 싹둑 끊었다.

“폐하.”

“말해보시오.”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서 덧붙여 말씀드리지 않았을 뿐이옵니다.”

으득-

내각 쪽에서 기류 명률의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연제는 기류 명률을 흘끔 보고서 류 충에게 눈치를 주었다.

쟤 너무 괴롭히지 마.

“흠…….그럼 그 해결책을 말해보시오.”

류 충이 노기로 얼굴이 붉어진 기류 명률은 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너나 나 괴롭히지 마.

“폐하, 국고는 오늘이라도 당장 푸셔야 합니다. 서둘러 구호지역으로 물품을 옮기되 군인들로 하여금 수송하도록 하십시오. 도착하여 물품의 분배는 현감에게 맡기고 군인들은 바로 복구 작업에 들어가면 시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을 겁니다.”

“오호…….그럼 구호물자가 도착할 때 까지는? 그때까지는 마냥 기다리라고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그때 까지는 주변 현(縣)에서 도와야지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래서 내가 쟤를 좋아한다니까……. 연제는 이 말을 기다렸었다. 처음부터 주변에서 도우면 문제가 이토록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주변에 있는 현(縣)은 공교롭게도 대부분 죄다 내각 쪽 인물들이 관장하는지라 모르는 척 하고 미적거리다가 일을 키운 것이었다. 당연히, 다짜고짜 주변에서 도우라고 명한다면 반발이 심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 그래서 누군가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던 터였다.

류 충도 이런 연제의 속셈을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속에 수십 마리의 능구렁이가 앉아있을 그의 뜻대로 해주기는 싫었지만 죄 없는 양민들이 굶어 죽어간다는데 모르는 척 하고 있을 수는 없어 류 충이 칼자루를 잡은 것이었다.

“오- 그러면 되겠군…….재상. 아주 좋은 생각이시오. 경들 생각은 어떠시오?”

신료들이 일제히 남궁 평을 쳐다봤다.

호부지역의 제일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현(縣)이라면 남궁 현(縣)이 아닌가. 눈 뜬 채로 곳간 도둑맞게 생긴 남궁 평은 안절부절 안달이 났다. 실은 호북에서 구호를 바라는 연통이 몇 번 오긴 왔었지만 볼 때마다 이 무슨 개소린가 싶어 무시했었다.

나중에는 연통을 전해주는 총관에게, 내가 자선사업간줄 알아!! 이딴 거 앞으로 전해주면 넌 바로 모가지야!! 라고 고함을 지르며 읽어 보지도 않고 던져 버렸었는데…….이럴 줄 알았으면 감자 몇 포대 정도는 보내줄걸 그랬다. 자칫 잘못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생겼으니 입맛이 썼다.

“폐, 폐하…….저희 현(縣) 또한 작금 상황이 좋지 못하옵니다. 저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상황이 상황인지라…….올해는 세금도 얼마 걷지 못하였고, 양민들에게 곡식도 푼 지도 얼마 되지 않아 곳간도 비어있는 상태,”

류 충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남궁 평의 말이 멈췄다.

“얼마 안 되긴 안됐지. 한 8년 전이었나? 아니지. 한 10년은 됐구먼. 그것도 한 가구 당 감자 한 알이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남궁 평의 얼굴이 벌게지면서 턱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재, 재상. 말씀이 너무 과하신 거,”

“과 한건 자네 살들이고. 아무튼 못 내겠다는 건가?”

“제가 올해 초에 보고 드린 저의 재정 상태와 현(縣)의 재정 상태를 보셨으니 아실 거 아닙니까. 오히려 저희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재작년 하고 숫자만 조금씩 틀리던 그 재정보고서를 말하는 거라면 봤지. 헌데, 난 또 그 사이에 어디서 큰돈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말일세…….”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돈이 생기긴 어디서,”

“그럼 셰닐은 어떻게 산거야? 그것도 몇 필 씩이나? 그거 한필 값만 하더라도 웬만한 장원도 사들일 수 있을 정도로 비싼 옷감이라며? 자네 딸이 그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입궁했다던데?”

“!!”

의전은 단숨에 술렁거렸다. 남궁 평이 셰닐을 사들인 것에 놀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재상은 그런 정보를 도대체 무슨 수로 알아내는 것일까. 남궁 현(縣)이면 여기에서도 말을 타고 며칠은 넘게 달려야지 겨우 도착하는 곳인데 그곳에 있는 사가에서 옷감을 구입한 것은 어떻게 알았다는 말인가.

황궁 안에 떠도는 소문 중 재상의 집무실 책상 밑을 누르면 바닥이 갈라지고 그 안에는 수백 명의 염탐꾼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 말이 사실인가 싶었다.

그때, 류 충을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던 기류 명률이 남궁 평의 편을 들었다.

“흠-듣자하니 재상의 사가에도 셰닐이 몇 필 들어갔다고 하던데…….그건 어찌된 일이오? 재상이야 말로 어디서 뒷돈이라도 받아 챙긴 거 아니오?”

기류 명률에게 시선을 돌렸던 신료들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류 충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류 충은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 거렸다.

“산 거 아닌데?”

“재상! 어느 안전에서 거짓을 고하려 하시오! 그게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그걸 그냥 줬다는 말이오! 믿을 소리를 해야지!”

“그거, 사절단으로 간 내 첫째 아들에게 상국의 둘째 공주가 선물한 거요. 받기 싫다고 그렇게 고사(固辭)하는데도 동생 옷 한 벌 해 입히라며 억지로 쥐어 줬다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소?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시던지.”

기류 명률과 류 충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제까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류 충에게 힘을 실어줬다.

“대학사. 그건 짐이 보증할 수 있소. 예부에서 올리는 보고서에 부상서가 상국의 공주에게 사적으로 받은 물품들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소. 류 부상서가 공주에게 잡혀 귀국하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도 그러지 못하고 타국에서 긴 시일 체류하고 있지 않소. 그래서 짐이 다 받아 두라고 허락하였소. 대학사, 더 할 말 있으시오?”

“…….아니옵니다. 폐하.”

류 재상 책상 밑의 염탐꾼 설(說)은 허무맹랑한 헛소문일지 모르겠으나, 상국의 둘째 공주가 류 충의 첫째아들 류 창연에게 첫눈에 반해 귀국도 못하게 하면서 선물공세에다 육탄공세까지 마다하지 않는다는 소문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첫째 아들의 딱한 사정에도 심드렁하던 류 충이 귀를 후비다가 귀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구호물품 보낼 텐가 안 보낼 텐가? 안 보낼 거면 빨리 말하게. 내가 서둘러 보내야 하니”

나대신 재상이 보내겠다는 건가? 웬일로? 남궁 평의 작은 눈이 확 커졌다.

연제가 그런 남궁 평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 류 충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재상, 그러면 황궁에서 국고를 보내는 것과 비슷하게 도착하지 않겠소? 아무리 양이 적다고 하더라도 거리가 있는데…….”

“그렇겠지요. 그러나 저는 물자를 보낸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응? 그럼 뭘 보낸다는 말이오?”

“외부감찰단을 보내려고 합니다.”

“남궁 현(縣)에?”

“예, 폐하.”

연제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힘겹게 감추며 남궁 평을 봤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렇지. 찔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

류 충은 남궁 평이 하얗게 질려 백돼지가 되든 꺼멓게 죽어 흑돼지가 되던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올해 초 보고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뭐,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현(縣)의 모든 사람에게 밥 한 공기씩은 충분히 돌릴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 어디서 나서 셰닐을 사들였는지는 따로 조사해 봐야겠지 만요. 하지만 저는 우리 주항서인을 믿습니다.”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제일 얄미웠다. 결국 남궁 평은 울먹거리며 물자를 보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무영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주항서인께서 보내시는 물자만큼 제가 나중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

의전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 졌다. 연제를 비롯한 신료들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의 귀를 후비는 신료까지 있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놀라운 말이었다.

연제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얘가 왜 이러지…….하는 표정으로 무영을 보았다.

“태자,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내탕금 아니냐…….네가 사사로이 운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알고는 있는 게냐.”

“네, 알고 있습니다. 내탕금으로 드린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

“이번 전쟁에서 저에게 내려질 보상금에서 드릴 것 입니다. 보상금은 제가 개인적으로 사용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그렇긴 하다만…….”

연제는 네 돈을 저 돼지한테 왜 줘!! 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류 충에게 말려보라는 눈치를 줬다.

허나, 류 충은 연제의 뜻과는 달랐다. 지가 돈이 썩어 넘쳐 쓰고 싶은데 쓰겠다는데 내가 굳이 머라고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비록 그것이 돼지우리에다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지만…….뭐, 그러고 싶으면 맘대로 하라지.

중요한 것은 저 놈이 왜 저런 말을 꺼냈는지 그 의중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류 충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면서 눈매를 좁혔다. 분명히 뭔가 있는데 그것이 뭔지를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다만, 제가 직접 방문을 해서 드려도 되겠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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