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회의가 시작되기 전 의전으로 하나둘씩 입장한 신료들은 인사를 나누기가 바쁘게 오늘 있었던 중간택 얘기를 꺼내 들었다. 최근 신료들은 둘 이상 모이기만 하면 이 화제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비록 내각과 행정부가 서로 야기하는 방향은 정 반대였지만 같은 주제임은 틀림없었다.
옥좌의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내각의 신료 중 중간택에 통과한 여식을 둔 신료는 탈락한 여식을 둔 신료의 신세한탄을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 가득 비추는 화색은 도저히 감출수가 없었다.
대학사 기류 명률과 주항서인 남궁 평도 그들 중 하나였다.
남궁 평은 작은 방석위에 넓적한 궁둥이를 털썩 내려놓으며 비대한 몸을 들썩거리다 옆에 착석 해 있던 기류 명률의 눈치를 보며 손을 비볐다.
“대학사 어르신, 예상하고는 계셨던 결과라서 크게 기쁘기는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경하 드립니다. 따님께서 중간택을 통과하셨다고요.”
길쭉하니 마른 얼굴의 기류 명률은 칼날처럼 다듬어져 있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자한 표정으로 웃었다.
“허허허. 벌써 들었는가? 그렇게 됐네. 그 아이야 워낙 예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해서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네만 아무튼 고맙네. 헌데 자네의 여식은 어찌되었는가?”
기류 명률은 누가 통과 되었고 누가 탈락 되었는지 이미 다 꿰차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제 여식도 운이 따르는지 통과했다지 뭡니까. 크게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소식을 들으니 기분은 참 좋더군요. 허허허허허.”
남궁 평은 투실투실 터질듯 한 얼굴을 흔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살들이 일제히 출렁거렸다.
그때 의전으로 입장한 중서사인 공 형문이 기류 명률에게 다가와 깊게 고개를 숙였다. 관모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대머리가 의전의 조명아래 번들 거렸다.
“어르신, 경하 드립니다. 따님께서 무사히 중간택을 통과하셨다고요.”
“자네도 아는구먼. 이거, 별것도 아닌데 너무 수선들을 피우니 내가 다 무안해 지는 구먼…….아무튼 고맙네.”
공 형문이 남궁 평 옆 자리에 앉더니 남궁 평의 볼록 튀어나와있는 옆구리 살을 쿡 찔렀다.
“흐흠…….이번에 신세 많았네. 내 이 일은 나중에 꼭 갚음세.”
남궁 평은 의아스러웠다.
분명히 공 형문의 여식인 공 혜민이 저지른 일이 노 상궁의 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명 상궁에게 전해 들었었다. 당연히 중간택에서 탈락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통과했다는 말인가?
남궁 평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그렇지…….그럼, 자네의 여식도 이번에......”
공 형문은 크게 웃으면서 남궁 평의 어깨를 두들겼다.
“허허허- 다 자네 덕분일세. 내가 친우 하나는 아주 잘 뒀단 말이야.”
남궁 평의 살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럴 리가…….명 상궁이 잘못 안 것인가?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안되겠군. 회의 끝나고 명 상궁을 좀 만나봐야겠어.
남궁 평의 이런 생각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공 형문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혹시, 연릉각에 도는 소문 못 들었나?”
무슨 소문인지는 몰라도 연릉각에 도는 소문이라면 태자비에 관련된 소문이 분명했다. 기류 명률과 남궁 평이 귀를 쫑긋 세우면서 공 형문에게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나? 어서 말해 보게.”
공 형문은 주위를 한 번 더 살피더니 더 작은 목소리로 소근 거렸다.
“첩지가 적소(赤沼)로 내려온다는데...”
“!!”
“뭐?!”
남궁 평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에서 대화를 나누던 신료들이 죄다 남궁 평을 쳐다봤다. 공 형문은 그들을 주시하는 신료들에게 어색한 웃음을 던지면서도 은밀하게 손을 내려 남궁 평의 두툼한 허벅지를 거세게 꼬집어 비틀었다.
“윽!”
“쉿! 이 사람이 지금! 조용히 하게. 동네방네 죄다 알리고 싶어서 이러는가!”
“미, 미안하네...”
남궁 평은 허벅지의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그게 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놀란 상태였다.
적소, 붉은 연못이라면 붉은색 관복을 입는 내각을 뜻하는 말이 아닌가.
기류 명률이 허벅지를 문지르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남궁 평을 대신하여 물었다.
“그 말인 즉, 적소에 속한 꽃 중에 하나로 이미 결정이 났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어르신.”
남궁 평은 허벅지를 문지르던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 세 겹의 턱을 차례대로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헌데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었나? 주항서인인 나조차도 금시초문인데?”
“알고 보니 예전에 나에게 신세를 졌던 궁녀가 연릉각 궁녀로 배정되어있지 않겠나. 그 아이가 해준 말일세. 쉬쉬하느라 상궁들은 아직 모르지만 이미 후보들 사이에서는 기정사실화 되어있다고 하더군.”
신세 졌던 궁녀 좋아하시네...처소 궁녀에게 뒷돈을 줬군. 하여튼 그런데 있어서는 행동 참 빨라. 남궁 평은 자신은 그 생각을 왜 미리 하지 못했는지 아쉬웠다. 명 상궁만 믿고 있을 것이 아니고 처소궁녀를 하나 더 매수 해야겠군. 이거 바쁘겠구만.
“내가 듣기에는 단순한 소문 같네만...그리 큰일은 아닌 듯싶네. 문제 삼을 일은 아니구먼. 아니 그런가?”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기류 명률을 보니 남궁 평은 굳이 묻지 않아도 무슨 꿍꿍이 인지 잘 알 것 같았다. 지 딸이라고 생각하는 군...그러니 문제 삼지 말자는 거겠지...흥! 누구 딸일지 어떻게 알아? 내 딸 진류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남궁 평도 역시 괜히 공론화 시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결론을 내고 기류 명률의 말이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어르신. 아이들 사이에서 퍼진 헛소문에 어른들이 왈가왈부해서야 되겠습니까? 자네는 생각은 어떠한가?”
공 형문 또한 공으로 30년 동안 황궁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눈치를 보고 시류를 읽는 것 하나는 기가 막혔다. 공 형문은 나중에 말이 나올지도 몰라 미리 연막을 치기 위해 말을 꺼낸 것일 뿐, 처음부터 그 주인공은 자신의 딸 공 혜민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나도 그리 생각하고는 있었네. 철없는 아이들의 입소문에 좌지우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일세. 그럼 이일은 그냥 못들은 걸로 하게나. 어르신, 괜한 소리로 귀를 어지럽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흘려버리시지요.”
“허허허. 이미 그렇게 했네.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자네도 마음에 두지 말게.”
서로를 마주보며 평온한 표정으로 웃고는 있지만, 이들의 속마음에는 욕심으로 가득해 터지기 직전 이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아주 기분 좋아 보이는 내각의 주요 인사들과는 달리 류 충을 비롯한 행궁의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이번 중간택에서 자신들을 엿 먹이려고 작정을 한 건지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고위관료의 여식들만 통과가 되었다. 류 충의 경우 화연이 중간택을 통과할 거라고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실제로 일이 벌어지고 나니 기분이 땅 끝을 파고 들어가는데, 모르고 있다가 당한 신료들의 얼굴은 길가다 개똥을 밟은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행궁의 고위관료 중 운 좋게 탈락한 딸을 둔 몇몇과 딸이 없는 병부상서가 눈치를 보면서 다른 관료들을 위로 했다.
“저...재상 어르신. 너무 심려치 마시...”
“죽을래? 조용히 해라.”
“예......음...형부상서 자네도 마음을 좀 다스리고......어?... 자네 우는가?”
“......”
“내 미안하네...”
행궁신료들이 앉아있는 자리에는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었다.
“황제폐하 납시오.”
내관의 외침에 모든 신료들이 자리에 일어서 예를 갖추었다.
“만세만세 만만세”
황제, 연제는 의전 안으로 혼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태자전하 납시오.”
“......천세천세 천천세”
태자 무영이 연제 뒤를 이어 입장했다.
검은색 정복을 깔끔하게 갖춰 입고 허구한 날 짐승의 갈기 마냥 아무렇게나 풀어 헤치고 다니던 머리도 다듬은 건지 단정하게 뒤로 묶은 모습이었다. 신료들은 갑자기 불쑥 찾아드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떨렸다.
류 충 또한 무영을 보자마자 미간을 있는 데로 찌푸렸다. 어쩐지 옥좌 아래에 좌석이 하나 더 마련되어 있어 저게 무슨 자린가 싶었는데...오늘 회의는 순조롭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전에는 이 정도 까지는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보기만 하는데도 기분이 확 더러워지는 것이 저 놈이 근 시일 내에 어마어마한 횡액을 불러올 것 같다는 느낌이 확신처럼 들었다.
기분 좋은 얼굴로 의전에 입장한 연제는 옥좌에 앉은 뒤 좌중을 향해 말했다. 아들 앞이라서 그런지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다들 자리에 앉으시오. 태자도 자리에 앉거라.”
무영이 자리에 앉는 것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던 연제는 안건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