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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26화 (26/110)

00026  짐승, 몸을 일으키다  =========================================================================

내일로 예정되어 있는 금혼령과 간택령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현재 류 가(家)의 장원은 잔치가 한창 이었다.

장원 안팎으로 쳐진 임시천막 아래 잔칫상이 줄을 이어 길게 펴져있고 그 위에 기름기 좔좔 흐르는 맛깔나 보이는 음식들과 구수한 향기를 풍기는 탁주가 상다리 부러져라 가득 차려져 있었다.

추위를 막기 위한 큼지막한 간이화로가 잔칫상 사이사이에 놓여있었고 풍악을 울리는 놀이패가 곳곳을 돌면서 흥을 돋우었다.

마을사람들은 아침부터 류 가(家)로 모여들어 아기씨의 완쾌를 축하하기 위해 각자가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하나둘씩 내려놓고 잔칫상 앞에 앉아 음식과 술을 즐겼다.

장원 앞을 지키는 문지기는 선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손사래를 쳤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도 손을 흔들면서 소리를 지르느라 손목도 뻐근하고 목도 아팠다. 첫날부터 이러니 내일은 손목에 붕대라도 감고 와야지 원...문지기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거 가져오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네.”

감자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진 남자가 그 말을 듣고 화를 버럭 냈다.

“아, 왜! 이런 건 받기도 싫다는 거요, 뭐요? 아니, 내가 그쪽 먹으라고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아기씨 드시라고 가져 온 건데 왜 자기가 난리람?”

“그게 아니고, 저기 좀 보시오. 사람들이 가져 온 게 쌓여 저렇게 됐소. 가주께서도 아무것도 받지 말라고 하셨단 말이오.”

그의 말대로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 앞에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두고 간 선물들이 쌓여있었는데 그 수도 엄청났지만 종류도 너무나 다양했다.

곡식이 가장 많았고, 옷감부터, 이 겨울에 구하기도 힘든 말린 과일, 달걀, 생선, 장작, 장신구, 각종 나물들이 작은 언덕을 이루며 쌓여있었다. 심지어 개, 오리, 닭, 토끼, 염소 등 가축까지 있어 그것들이 홰를 치며 여기저기 날아다니느라 깃털까지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자신이 봐도 보통 번잡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 몰라! 저기다 놓으면 되지?”

“잠깐!! 그냥 가져가래도! 받은 셈 친다니까 그러오. 겨울이라 양식도 부족 할 텐데 이렇게 죄다 받았다고 내가 가주께 혼나서 그런다니까”

감자보따리를 가져온 남자는 문지기의 사정을 못들은 척 하고 정신없는 그곳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흠, 이보게들, 저기다 놓으면 될 것 같네. 놓고 어서 술이나 한잔하세나”

닭의 다리를 묶어 들고 온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닭도 그냥 저기다 같이 두면 되어? 야가 성질이 보통이 아닌데...같이 놔두면 죄다 쪼아서 난리 날 터인데, 괜찮겠소?”

“그러니까 그냥 가져가라고! 좀, 제발!”

문지기는 사정사정해도 안 통하니 이제 울먹거리기 까지 했다.

“아저씨. 그냥 두세요.”

실랑이를 하던 문지기와 남정네 무리들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장원 입구 계단 위에 처녀와 소녀의 중간쯤 되 보이는 웬 아가씨가 서 있었다.

아가씨는 여러 가닥으로 땋은 검푸른 색의 윤기 도는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올려 옥비녀를 이용해 고정하고 있었다. 붉은 색의 새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옥비녀 끝에는 진주가 달랑거리며 달려있다.

붉은색 치마저고리는 햇빛이 비추는 방향대로 옷감자체에서 은색의 빛이 은은하게 흘러 내렸다. 치마 밑단과 소매 끝에 은색실로 꽃과 나비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고 어깨에는 하얀 털로 된 비견을 걸치고 있었다.

그 차림새만으로도 다른 나라 공주님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는데 그들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가씨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얀 얼굴은 작고 투명했다. 마늘종 같은 코와 도톰한 붉은 입술이 그 작은 얼굴의 완벽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특히 끝이 살짝 올라간 커다란 눈은 눈동자는 검푸른 색이었는데 금별이 여기저기서 반짝거리며 빛을 반사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위에 별이 떠 있는 것 같아 아름다웠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 아가씨를 모든 사람이 넋을 놓고 입까지 벌리면서 쳐다보고 있는데 아가씨가 말을 이었다.

“저 주시려고 일부러 가져오셨는데 거절하면 섭섭하시잖아요. 고마운 마음으로 다 받을게요. 대신, 이분은 방문자를 확인하는 일을 하셔야 하니까 이쪽으로 다른 사람을 보낼 테니 그분에게 주세요.”

문지기가 난처한 얼굴로 화연을 말리려 했다.

“아기씨, 가주 어르신께서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아버지께는 제가 말씀 드릴 테니 그건 걱정 마세요. 아저씨”

저 주시려고?? 아기씨?? 아버지?? 그럼 이 분은...

“헉! 아기씨?!”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마세요. 음식 맛있게 드시고요. 모자라면 더 말씀하세요.”

아가씨, 화연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장원 안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 뒤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지키고 서있던 기해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자, 자, 아저씨들! 고만 고개 드세요. 아기씨 벌-써 들어가셨어요. 그러게 왜 갑자기 안하시던 인사를 해서 우리 아기씨 놀라게 하고 그러세요? 아기씨 말씀은 잘 들으셨죠? 사람 보낼 테니 그 사람한테 가져오신 것들 주시고 맘에 드는 자리로 가셔서 음식 드시면 됩니다. 아셨죠? 그렇다고 모두들 가져오시면 그거 둘 곳도 없어요. 아기씨 쾌차 축하한다며 여기저기서 선물을 너무 보내주셔서 지금도 창고가 미어터질 지경이거든요. 그러니까 웬만하면 가져오지 마시고요, 차라리 주실 거면 먹을 수 있는 걸로 주세요. 놔뒀다가 못 먹으면 요번 춘궁기 곡식 나눔 행사 때 나눠드리면 되니까요”

화연이 들어간 곳을 멍하니 쳐다보던 남자들 중 한명이 한참을 떠드는 기해의 말을 끊고 물었다.

“저, 저 분이 우리 아기씨야?”

“참, 내, 아저씨는 류 현(縣)에 살면서 아기씨 얼굴도 모르신단 말예요? 딱 보면 모르시겠어요? 저런 신비로운 검 푸른색 머리카락과 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아리따운 아가씨가 우리나라에서 우리 아기씨밖에 더 있겠어요?”

“옴마, 난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님인 줄 알았네. 아유, 심장이야”

“그죠? 우리 아기씨 정말 예쁘죠? 오호호호호호 그럴 줄 알았어요.”

“아, 놀래라. 아니, 아기씨 생김새가 박색이라서 꽁꽁 숨겨 놓는 거라고 말한 그 놈은 도대체 누구야? 기류 현(縣)놈들 아니야?”

“어머! 어떤 벼락 맞을 놈들이 그런 말을 해요? 그걸 가만히 두셨어요?”

“가만히 뒀겠어? 당연히 곤죽을 내줬지...저렇게 고우신 것을!”

“아주 잘하셨어요. 어머, 근데 그 닭 아주 크네요? 저 벼슬 좀 봐, 아저씨가 직접 기르신 거예요?”

“응. 이거 내가 약초 먹여가면서 키운 약 닭이야. 아기씨 드리려고 가져왔어”

“약 닭이에요? 어쩐지...걔는 저 주세요. 이따, 저녁에 아기씨 백숙 해드리게”

“그럴래? 그럼 나야 고맙지. 야가 보통 사나운 게 아니니까 잡을 때 조심하고.”

“그건 걱정 마세요. 그럼 편히들 노시다 가세요. 참! 우리 아기씨 고우신거 소문 많이 내셔도 되요”

“그럼, 그럼, 당연하지. 우리가 가만히 있겠어? 밤새 자랑해도 모자랄 판 이고만.”

자기들끼리 아기씨에 대해서 정신없이 떠드는 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다 뒤돌아 장원으로 들어가는데 문지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보시오. 미안한데, 잔치음식을 먹으러 온 것이면 저기, 저-기 에 있는 자리로 가서 드시는 것이 어떻소?”

기해가 고개를 돌려보니 장원 앞에 웬 6척 장신의 남자가 서있었다.

큰 망태기를 등에 맨 남자는 멀찍이서 보기만 해도 엄청난 악취가 풀풀 날릴 것이 분명한 거적 때기를 두르고 있었는데, 옷감의 원래 색은 이미 알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때가 잔뜩 타 더럽기 그지없었고, 여기 저기 기우다 만 크고 작은 구멍을 무늬처럼 달고 있었다. 안 감은지 몇 달은 족히 되어 보이는 머리카락은 허옇게 회색으로 떡이 져서 빗도 안 들어 갈 정도로 봉두난발을 해가지고 얼굴을 뒤덮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살짝 보이는 얼굴은 땟꾸정물이 잔뜩 껴 이목구비조차 구분이 잘 안 갈 정도였다.

문지기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서있는 곳까지 악취가 흘러와 뒤로 물러서며 코를 틀어잡았다. 그리고 코맹맹이 소리로 다시 한 번 크게 말했다.

“거, 거기서 다가오지 말고 다른 곳에서 음식을...아니지, 싸줄 테니 그거 가지고 가시오. 내 넉넉하게 싸달라고 하겠소. 윽! 어허, 왜 자꾸 다가오시는 거요. 거기서서 말해도 충분히 다 들리니, 할 말 있으면 거기서 말해보시오”

“어......들어가면... 안 돼?”

거지... 아니, 남자는 예상 외로 묵직하면서 힘 있는 목소리를 가졌었는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말을 너-무 느리게 했다.

“당연히 안 되지! 그 몰골...흠, 아니, 장원 내에는 가주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소.. 특히 남자는 먼저 허락받지 않은 이상 절대로 들어갈 수 없소.”

“어......그래도......들어가고...... 싶은데”

남자가 다시 느릿느릿하게 대답을 했다.

문지기는 설사, 허락을 받았어도 그 몰골로는 절대 못 들어간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까지는 못하고 있는데, 대답까지도 너무 느려 답답한 나머지 자신의 가슴을 두들길 수밖에 없었다.

“아, 안된다니까 그러네. 성혼은 하셨소?”

문지기의 뜬금없는 질문에 남자가 머뭇거리다가 특유의 말투로 느리게 대답을 했다.

“어......아니......”

“거, 말 좀 빨리 하실 수 없소? 아니라는 말 한마디 하는데 뭐 그렇게 오래 걸리오! 내가 다 복장이 터지는 고만. 암튼, 그럼 총각이라는 말 아니오! 총각은 절대 입장 불가하오. 내시라고 할지라도 총각이라면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는 어르신의 엄명이 계셨소. 당신의 차림새 때문에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싸가는 것이 싫으면 저-기에 있는 잔칫상에서 음식을 드시오. 저기, 보이시오?”

남자가 문지기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장원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홀로 놓여 있는 상이 보였다.

특별한 누군가를 위한 전용 잔칫상인건지 그곳에는 벌써 남자와 동일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걸신들린 것처럼 서로 많이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중 이었다. 하나같이 식기도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양손으로 움켜쥐어 마구잡이로 입안으로 쑤셔 넣고 있어 상 위는 이미 난장판으로 변해있었다.

남자는 그 아비규환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느리게 고개를 돌려 느리게 말했다.

“나는......들어가고......시ㅍ”

남자의 느린 말투에 문지기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다 듣지도 않고 말을 막았다.

“아! 거, 안 된다니까 그러네. 몇 번을 말해! 안 된다고, 안 돼! 절대 안 돼! 때려 죽여도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돼! 설마 왕이라고 해도 안 돼! 천신(天神)이라고 해도 안 돼! 안 돼! 안 돼! 안된다고!...헉헉헉헉헉...후- 이제 좀 알아들으시겠소?”

“어?......아니......”

컥!...이쯤이면 벌레라도 알아듣겠다. 문지기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처음에는 인상을 잔뜩 쓰면서 문지기와 거지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기해는 남자가 말을 꺼내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들었지? 이 동네에 저렇게 덩치 큰 거지가 살았나? 다른 동네에서 소문 듣고 원정 온 건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목소리뿐 아니라 말투까지 귀에 익은 것이 아닌가!

저, 저 말투는...멀쩡한 사람도 듣다보면 숨넘어가도록 복장 터지게 만드는 저 말투는...저 말투는...

“...상이 도련님?”

“.....어?...기해야......나...”

“상이도련님!!”

기해가 남자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환한 얼굴로 남자에게 빠르게 뛰어가 안기...려다 코를 틀어쥐고 다시 빠르게 멀어졌다.

“어휴, 냄새!! 무슨 똥수깐에라도 빠지셨어요? 그게 뭐예요? 이러니까 거지로 오해를 받죠. 류 가(家)의 도련님께서 뭐가 모자라서 그러고 다니세요!”

“어......저......”

“아, 됐고, 얼른 들어오세요. 어휴...물을 받아도 수십 동이는 필요 하겠네. 뭐하세요, 도련님. 빨리 들어오시라고요!”

“...들어가도...”

“나, 참... 도련님 집인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아, 빨리요!”

“어......총각은...”

기해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가슴을 퍽퍽 두들겼다.

이 남자, 류 가(家)의 셋째 아들 류 상연과 대화를 조금이라도 나눴던 상대는 모두 일관성 있게 이런 행동을 하곤 했었다. 특히 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급한 성격을 지닌 류 충은 셋째 아들과 대화를 나누려다 뒤로 넘어갈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셋째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건강을 위해 애저녁에 포기했다.

대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다다다다 쏟은 뒤에 류 상연이 하고 싶은 말을 요약 정리해서 서면으로 받는 방식을 택했다. 어떻게 보면 쌀쌀맞아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서로의 무병장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아! 진짜! 그게 도련님한테까지 적용되는 거겠어요? 아고, 답답해...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이네요......속이 터져 뒈질 것 같은 이 기분...잔말 마시고 빨리 들어오기나 하세요! 하시고 싶은 말 있으시면 저 한테도 서면으로 보내주시던가요!”

“......어......”

류 상연은 기해가 저렇게 가슴을 치면서 눈에 쌍심지를 켜면 군말 없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 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연이를 먼저 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그 내용을 말하기에는 기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조용히 기해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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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참치님,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서평을 똿! 하고 남겨 주시니 깜짝 선물을 받은 것 같네요. 그래서 오늘 선작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요. 어깨춤이 절로 납니다.

보답으로 바로 내일! 축<첫 서평기념> 연참 하겠습니다. 내일쯤에는 무영과 화연이 만날 수 있을까요? ^^*

항상 선추코 해주시는 모든 분들 애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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