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짐승, 몸을 일으키다 =========================================================================
그 날 저녁 류 강연은 가뿐해진 마음으로 퇴궁을 서둘렀다. 의궁으로 실려 가셨다가 그것을 핑계 삼아 그대로 퇴궁하신 아버지에게 이 기쁜 소식을 어서 빨리 알려드리고 싶었다.
장원 앞에 도착하니 내일 있을 잔치준비로 한창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잡혀 술독도 좀 옮겨주고 식기도 옮겨주다 본채로 들어갔다.
침상에는 아버지께서 구하다가 결국엔 못 구했는지 하얀 띠 대신 얼룩덜룩 요란스러운 띠를 이마에 두르고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면서 누워 계셨고, 그 옆을 화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앉아 있다가 본채로 들어오는 류 강연을 보더니 반갑게 맞이했다.
“오라버니, 잘 다녀오셨어요?”
“그래, 우리 연이 밥은 먹었니?”
“아뇨. 오라버니 오시면 같이 하려고 아직 이에요.”
“이 시간 까지 오라비를 기다린 거야? 아이고, 배고프겠구나. 그럼 우리 식사하러 갈까?”
그때 류 충의 앓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 소리에 화연이 고개를 돌려 걱정스럽게 쳐다보다 류 충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아버지께서 많이 편찮으셔요.”
“그래? 그래도 식사는 해야지. 오라비랑 같이 먹고 오자꾸나. 간호도 기운이 있어야 하지.”
“오라버니...”
화연이 류 강연에게 그만하라는 눈짓을 하면서 류 충의 얼굴을 살폈다.
“흠, 아버지는 좀 어떠시냐.”
“의원에서 다녀갔는데 울화병이시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금방 쾌차 하실 테니. 그러니 우리는 식사하고 오자. 오라비 배고프다. 연이야”
류 강연이 난처한 표정의 화연의 손을 끌어당겨 일으키려는데 류 충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을 쳤다.
“쾌차는 무슨 얼어 죽을 놈에 쾌차! 너는 지금 이런 시국에서 밥이 넘어 간단 말이냐? 하나밖에 없는 귀하디귀한 내 보물을 사람도 아닌 짐승에게 뺏기기 일보 직전인데 너는 오라비가 돼서 걱정도 안 된단 말이야? 어쩌면 그럴 수 있단 말이냐! 짐승이랑 같이 다니더니 몹쓸 물이라도 든 게야!!”
소리를 지르는 류 충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면서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 모습을 보고 화연이 류 충의 손을 잡아 진정시켰다.
“아버지! 혈압! 고정하세요. 아까 의원께서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잖아요. 무슨 일 때문에 이러시는 건데요. 무슨 보물을 빼앗긴다고 아까부터 그러세요.”
류 충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화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휴, 내 새끼. 이 보기에도 아까운 금쪽같은 내 새끼를 어떻게 한단 말이냐. 내가 이걸 어떻게 키웠는데...”
화연이 류 충에게 얼굴을 잡힌 채, 류 강연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모두 해결됐습니다.”
류 충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흥! 죽여도 죽지 않을 그 놈이 뒈지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버지도, 참... 아쉽지만 그런 건 아니고요.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됐으니 이제 일어나시죠. 연이 배고파요. 딸한테 간호 받는 것이 소원이셨더라도 밥은 먹여 가면서 하셔야지요.”
류 강연의 말처럼 딸한테 간호 받는 것이 좋아서 더 아픈 척을 했던 류 충은 뜨끔해서 화연을 슬쩍 쳐다봤다. 아버지께서 크게 편찮으신 건 아닌 것 같아 안도한 화연은 눈을 살짝 흘기다가 결국에는 웃어 주었다.
“어이구, 내 새끼. 예쁘기도 하지. 맘씨가 아주 비단결이 따로 없구나......강이 너, 그게 무슨 소린지 빨리 말해 보거라. 허튼소리기만 해봐, 아주”
“일어나세요. 그 요란한 머리띠도 좀 풀어버리시고요. 자세한 내용은 식사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류 충은 식탁에 앉자마자 류 강연을 닦달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냐? 믿기지는 않지만 평화적인 방법이란 것이 있다니 그게 뭔지 한번 들어나 보자. 허! 참...평화라니, 그 놈한테 평화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나 하냐?”
“아버지. 우선, 내일 입궁하셔서 연제께서 고집하시는 데로 하시라고 말씀드리십시오.”
류 충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류 강연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 서슬에 의자가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뭬야?! 이 정신 나간 놈이......이, 이놈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연제가 뭘 고집하는지 알지 않느냐. 진정 그 놈의 아가리에 연이를 기어코 갖다 바치자는 거야? 너 뭐라도 잘못 먹은 거냐?”
“아버지. 제 말을 좀 끝까지 들어보세요. 제가 진짜 실성 한 것도 아닌데 그러겠습니까?”
류 강연의 침착한 말과 화연의 눈초리를 느끼고 류 충이 뒹굴고 있던 의자를 조용히 세우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계면쩍은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흠흠, 그래서 어쩌라는 말이냐”
“19세부터면 바랄나위 없겠지만, 계속 18세를 고집하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한명이라도 나이 어린 후보자를 늘리기 위해 선대에서도 여러 번 사용했던 방법이니까요. 선례가 없던 것도 아니라서 반대할 명분이 없습니다. 나이 차이는 법제화 된 것도 아니고 관례일 뿐이니까요. 연제께서도 그걸 아시기 때문에 느긋하셨던 거구요. 게다가 나이제한이 어려지면 관료들은 더 좋아 할 텐데 아버지도 결국에는 동의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류 충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허공을 쳐다보았다.
“휴......애비가 그걸 모르겠느냐.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했던 게지”
“그러니 내일 등청(登廳)하시면 연제께서 원하시는 데로 하시라고 주청(奏請)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리고 조건을 거십시오. 태자비 간택문제는 후보 발탁부터 최종간택까지 무조건 태자의 선택에 따르시라는 조건을 거시는 겁니다.”
“왜?”
“후후후...놀라지 마십시오.”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비책이 아니라 심드렁한 류 충은 국을 성의없이 뒤적거리며 말했다.
“아, 뭔데”
“그, 태자에게 연모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
“정말입니다.”
“......”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
류 충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식탁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의자를 조용히 뒤로 뺀 뒤, 조용히 일어서서, 조용히 손을 들어 류 강연의 머리를 냅다 후려쳤다.
퍽-
박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악!!”
“어머! 아버지!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뜨거운 국에다 코까지 박을 뻔 했던 류 강연이 고개를 획 들어 올리며 원망가득한 얼굴로 류 충을 노려보았다.
“아버지! 왜 때리세요!”
“이게 어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듣고 와서 말야...그게 니가 말한 평화적인 해결방법이라는 게야? 나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이 놈 말 믿고 있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잖아? 다 필요 없고 이대로 시간 끌다가 여차하면 연이 데리고 테국(娧國)으로 망명가면 그만이야. 이미 그쪽에다 장원까지 알아보고 있으니까 연이 너는 걱정 말고 애비만 믿고 있거라.”
자신과 관련된 얘기인 것 같은데 도통 말씀을 안 해주시니 화연은 마음이 갑갑해 졌다.
“아버지. 망명이라니...무슨 일 이신데요. 저와 관련된 일 같은데 저한테도 말씀을 좀 해주셔야지요.”
양손으로 뒤통수를 부여잡고 빠르게 문지르던 류 강연도 억울한 심정에 질세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버지! 끝까지 좀 들어보시라니까요! 그러고 나서 망명을 하든지 말든지 하시라고요! 씁- 아으...아파”
“야. 넌 참, 애가 그렇게 어리숙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래? 그 짐승 같은 놈이 연심을 가졌다고? 그래, 니 말대로 연심을 가졌다고 치자. 사실, 연심이 뭔지는 알기라도 하는지 그것도 의심스럽다만 일단 그렇다고 치자고. 근데, 태자가 귀궁하고 한번이라도 황궁 밖으로 나간 적이 있느냐? 아니, 청룡궁 밖으로라도 나간 적은 있냐? 궁 안에서 귀신처럼 처박혀 나오지도 않는데 어디서 여자를 만나서 무슨 연심을 가졌다는 거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걔가 귀신하고 정이라도 통했다는 말이냐?”
아직도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던 류 강연이 심통 맞은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어디서 만나긴요. 궁 안에서 만났지.”
“그러니까 어떻게! 청룡궁 주변은 혹시라도 있을 짐승의 습격 때문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 놈 무서워서 그쪽으로 배정 받는 궁녀란 궁녀는 모조리 그만둔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청룡궁에는 남자만 득실거리는 저주받은 금녀의 궁이라는 소문이 황궁 안에 자자한데 어디서 여자가 나서, 어떻게 만났다는 거야!?”
“아버지, 제가 그 생각을 안 해봤겠습니까? 당연히 대원들한테 물어봤죠. 그랬더니 진짜 여자가 드나든다고 하던걸요. 뭐.”
소리를 지르던 류 충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 그게 정말이라고? 진짜 여자? 귀신같은 거 아니고? 살아있는 여자?”
“네! 그렇다니까요. 나비를 쓰고 있어서 생김새는 못 봤는데 분명히 살아있는 여자라고 했다구요. 제가 몇 번을 확인 했는데요.”
“근데, 너는 이 중요한 사실을 이제까지 몰랐어?”
“마음에 둔 아가씨 얘기는 며칠 전 꺼내기는 했는데 그때는 별 생각 없었거든요. 몸도 안 좋기도 하고, 군총부 문제로 바쁘기도 했고요. 그냥 어디서 괜찮은 궁녀라도 한명 봤나보다 했는데...그리고 진짜 연심이 뭔지도 모르더라구요. 그냥 저러다 말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설마 진짜로 연심을 품을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헉! 도대체 그 정신 나간 처녀는 누구란 말이냐”
“저도 잘 모르겠지만 관료의 여식이라던데요? 그것도 행정부의...뭐 짐작가시는 분 없으세요?”
“행궁 관료의 여식이라고? 가만, 그 정도 나이의 여식을 가진 관료라면 많지는 않은데...혹시 형부상서 딸인가? 아니지, 걔는 너무 멀리 있는데...아님, 공부상서? 아! 병부 부상서 딸내미도 그 나이라고 한 것 같은데, 누구지?”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만 적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아서 누군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저번에 들어보니 우리 연이보다는 못하지만 호부 이형(호부상서 밑의 직책)의 여식이 참하고 예쁘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나이도 딱 맞고...아무래도 그 여식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음, 그렇지. 걔가 딸 자랑을 엄청 해대서 짜증났었는데 그럼 걔 딸인가? 아니, 근데 어떻게 만난거야? 태자가 전처럼 담 넘어 밤나들이라도 다니다 만난건가? 그것 참 알 수가 없구나. 누군지 확실해지면 나중에 탁주라도 한 사발 사줘야 겠구만. 불쌍한 놈. 딸내미가 그러고 다니는 줄도 모르고. 쯧쯧쯧”
이들의 머릿속에는 근시일 내에 날벼락을 맞을 예정인 그 불쌍한 후보들 사이에 자신들은 완전히 빠져있었다.
“그러니까요. 내각이라면 모를까 행정부에서는 딸을 태자비로 보내고 싶어 하시는 분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 짐승 놈한테 당한 게 얼만데! 그런 거 보면 내각 놈들도 참 정상은 아니야. 그 수많은 일을 당하고도 서로 처녀단자 집어넣겠다고 난리라는 소리 너도 들었지. 미친놈들. 제 자식을 사지로 밀어 넣어도 유분수지...암튼 확실하다는 거지? 정말? 틀리면 우리 다 망하는 거 알지?”
“걱정 마십시오. 저도 연이가 걸려있는데 대충했겠습니까. 이미 확인까지 다 해봤습니다.”
“어떻게 했는데?”
“처음에는 그 아가씨와 잘 안되는 건지 어떻게 하면 잘 될 수 있는지 방법을 물어보더라고요”
“허...”
“처음에는 그 아가씨가 태자의 외모만 보고 그러는 철없는 아가씨 인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성격도 착하고 얌전한 편이랍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아가씨 때문에 청룡궁이 참 평화로워진다는 것이죠. 이것이 가장 관건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게 가장 중요하지. 태자를 잠재울 수 만 있으면 철없는 아가씨도, 80의 할망구도, 심지어 남자라 해도 난 상관없다.”
“그럼요! 아버지,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아가씨에다 마음씨도 착하다니 이건 횡재한 거나 다름없는 거죠. 이것저것 물어봤더니 빠져도 단단히 빠진 모양이더라고요.”
“세상에,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아랫도리를 휘두르고 다니더니 그 짐승에게 드디어 사라ㅇ... 연ㅅ... 아니, 발정기가 왔구나.”
“역시 아버지, 정확하십니다. 그러니 태자가 변덕을 부리기 전에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야만 합니다. 운 좋게 딱 맞춰 사ㄹ...아니 발정기가 찾아 왔긴 했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전에 고삐를 채워 놔야지요. 태자도 얌전하게 만들고 우리 연이도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 아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아버지, 기가 막히죠?”
“그럼 그냥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 아가씨랑 살라고 해! 괜히 엄한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아버지...잘 아시는 분이 왜, 또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미래의 황후가 될 자리를 평민들 성혼하듯이 막 치룰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자리를 노리는 대소신료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을 테고요. 분명히 자질을 걸고넘어질 텐데 그럼 더 시끄러워 질 겁니다. 예법대로 하되, 지금 황후마마나 황태후 마마 모두 서거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면 간택은 폐하께서 하실 텐데 그것을 태자가 하는 걸로 하자고 하면 크게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괜히 태자 맘에 안 드는 처녀가 태자비로 선택되었다가 첫날밤 죽어나가는 것보다는 좋지 않겠습니까?”
“음...그건 그렇지...”
류 충은 수염을 쓸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다 우리 연이 보고 마음이 변하면? 내가 보기에는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
“훗- 아버지 제가 누굽니까. 저, 류 강연이에요. 류 가(家)의 둘째아들이자, 전장에서 푸른 늑대로 불리던 그 류 강연이라고요. 제가 드리는 말씀 중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연심이야 내일되면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불확실한 감정만 믿고 우리 연이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지요...해서! 제가 태자에게 직접적으로 확인해 봤습니다.”
“그래. 류 가(家)의 푸른 늑대야. 짐승이 뭐라고 하더냐?”
“태자가 5년 전 쯤, 참전하기전에 집에 놀러온 적 있었지요?”
“있었지. 그때만 왔었냐? 시도 때도 없이 와서 술을 얼마나 쳐 먹었는지 아냐? 내가 연제께 니 아들이 처먹은 술, 도로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 술 창고는 진즉 거덜 났을 거다. 걔는 전생에 무슨 술거머리라도 됐던 게야?”
“그때 봤답니다.”
“누구를? 우리 연이를?”
“네”
“참, 재주도 좋다. 혹시라도 들어갈까 봐 이중삼중으로 잠가놓고 그 앞을 사람이 지키고 서있었는데...그래서?”
“별로...라던데요?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그 말을 들은 류 충은 류 강연이 태자라도 되는 듯 노려보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 짐승 같은 놈이 보는 눈까지 짐승수준이잖아? 뭐 그렇게 여자 보는 눈이 그지 같아? 우리 연이가 왜 별로야! 어디가 별로야?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착한데!”
“아버지! 태자의 보는 눈이 정상이 아닌 건 다행인 일이지요 왜 역정을 내십니까. 태자가 다른 사람의 반만 비슷했다면 저희는 지금 이런 대화를 하지 못했겠지요. 우리 연이는 벌써 다른 나라로 도피시켰을 거구요. 짐승이라서 뭔가 다르긴 다른가 봅니다.”
류 충은 눈을 감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후- 후- 그래,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태자의 여자 보는 눈이 죽어 나자빠질 때 까지 절대 변하지 않기를 기원하자구나.”
“네. 아버지”
화연은 장난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심각하게 기도까지 드리는 그들을 보면서 하도 어이가 없어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신다. 연우였을 때 고아로 자란던 것을 생각해보면 꿈에서만 그렸었던 기적과 같은 일이라 믿을 수 없이 행복하긴 하지만......
설마, 다른데 가서도 저러지는 않으시겠지. 화연은 조금 창피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이틀 뒤.
앞으로 석 달간 혼인을 금한다는 금혼령과 함께, 태자의 대례(大禮)를 위해 18세에서 27세의 사이의 처녀단자를 소집하겠다는 간택령이 떨어졌다.
전국 곳곳 마다 방(㮄)이 붙었고, 근 25년 만에 내려진 간택령으로 환제국 전체가 묘하게 술렁거렸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가문들의 처녀단자가 황궁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류 가(家)의 넷째 딸 류 화연의 처녀단자도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