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나는 누구인가? =========================================================================
류가(家)의 장원 앞.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류가의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봇짐을 지고 그 앞을 지나던 남자 둘이 속닥거렸다. 그중 갈색 머리를 틀어 올린 남자가 열린 문으로 보이는 류가의 앞마당을 기웃거리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뭔 일이래? 몇 년간 봉문(蓬門)하고 두문분출 하던 류가가?”
옆에 있던 파란색 머리의 남자가 어두운 기색으로 대꾸를 했다.
“글쎄… 헉! 혹시… 류가의 아기씨가 드디어… 끽.”
그러면서 자신의 목을 손날로 긋는 시늉을 했다. 갈색 머리가 그런 파란 머리의 뒤통수를 호되게 갈기면서 소리 죽여 윽박질렀다.
“에끼! 이 사람아! 재수 없는 소리 하지도 말어! 이 사람이 미쳤나. 류가 바로 앞마당에서 무슨 그런 망발이야? 망발은? 이 동내 사람들한테 맞아 죽고 싶어서 그래? 죽으려면 혼자 죽던가!”
옆에서 웅성거리면서 모여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파란 머리의 말을 듣더니 한마음 한뜻으로 죄다 그를 노려보았다. 그 잡아먹을 것 같은 분위기에 파란 머리가 얼얼한 뒤통수를 만지며 얼버무렸다.
“아니… 내 말은… 꼭 그렇다는 게 아니고… 혹시나 해서…….”
옆에서 듣고 있던 건장한 남자가 파란 머리에게 삿대질을 했다.
“거,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이 사람이 지금 우리 아기씨가 어떻게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거야, 뭐야?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류가 쌀 한 번 안 얻어먹어 본 사람 하나 없는데, 사람이 되서 은혜를 그딴 식으로 갚아? 당신, 여기 사람 아니지? 어디서 온 놈이야? 혹시, 미류(家)가 쪽에서 온 놈들이냐?”
파란 머리의 뒤에 있던 머리를 곱게 땋은 아가씨도 파란 머리를 노려보면서 건장한 남자를 도왔다.
“맞아요! 이 아저씨, 아주 웃긴 아저씨야! 아저씨 입방정으로 우리 아기씨 잘못되면 아저씨가 책임질 거예요? 말이면 단 줄 알아?”
성난 사람들 사이에서 파란 머리 남자는 식은땀을 흘렸다. 말 한마디 했다가 잘못하면 맞아 죽을 분위기였다.
“아니… 그게…….”
그때, 류가에서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나오더니 큰 종이를 담벼락에 붙이고 돌아갔다. 그 앞에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오랜 기간 동안 몸이 불편하여 보전하던 넷째 자녀 류화연이 드디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쾌차를 했음을 널리 알리는 바이오. 이에 잔치를 열어 기쁨을 나누고자 하니, 그동안 함께 걱정해주던 나의 친우들이여, 빠지지 말고 참석해 주길 바라오.
— 류충 배상(拜上)
글을 읽느라 잠깐 동안 조용했던 사람들이 단번에 시끌벅적해졌다.
“우리 아기씨가 드디어 눈을 떴다는 게 사실이란 말이야?”
“아! 그렇다니까. 내가 저번에 말해줬을 때에는 들은 척도 않더니! 재상(宰相, 환국 행정부의 총 수장이자, 신료 중 가장 높은 직책) 댁에서 일하는 장 씨가 해준 얘기라고,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거짓부렁 하지 말라면서? 이제 믿겠냐?”
“아! 맞다! 저번에 네가 그랬지?”
“그래! 내가 그랬지 않아! 하하하하하, 내 말이 맞지? 내가 곧 큰 경사 생길 거라고 말했었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처음 듣는데?”
“내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어. 12년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기만 하시던 우리 아기씨께서 하루아침에 말짱해져서는 눈을 번쩍 떴다고 말이야.”
“그 동안 류가에서 우리들에게 베푼 것이 얼마야. 복 받을 만하지. 하늘님도 그 정성을 봤으면 모른 척할 수는 없었을 거라고. 암, 그렇고말고.”
“옴마야! 그럼 12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던 아기씨가 진짜 일어나셨다고? 이게 무슨 경사야! 진짜 큰 경사잖아?”
“경사지! 그러니까 이렇게 잔치도 벌인다는 거 아니겠냐고.”
“잠깐, 이럴 때가 아니지. 자, 주점으로 가세. 오늘 같은 날에는 탁주 한 사발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내가 살 테니 요 앞 목련 주점으로 다들 가세.”
하하하. 환제국 최고의 자린고비가 기분이 좋긴 좋은 모양이구만. 그래, 가세나. 오늘 아기씨 덕분에 내가 탁주도 한 사발 얻어먹겠구나.”
“맞아! 오늘 같은 날에는 한 사발 해야지. 가자고.”
* * *
밖의 소란스러움이 전염된 듯, 장원 안의 분위기도 한껏 들떠 있었다. 그들의 아기씨께서 드디어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음전하던 시비들까지도 모이기만 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아기씨 얘기를 나누다 각각의 상선한테 귀를 잡혀 끌려가기 일쑤였다.
시비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던 뒷마당을 지나 구름다리를 건너면 작은 별채가 보였다. 그 별채에는 열여섯,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창을 열어놓고 앞에 자리한 작은 연못을 보고 있었다.
소녀의 머리카락은 어찌나 긴지, 앉아 있던 의자 아래 까지 흘러내려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최고급 비단실을 풀어놓은 것처럼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은 검푸른 색으로 빛났다.
큰 눈동자도 머리카락과 같은 검푸른 색을 띠었는데, 가끔 햇빛이 닿으면 금색 별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것처럼 빛을 뿌렸다.
뽀얀 얼굴과 마늘종 같은 코, 도톰한 붉은 입술은 화가가 심혈을 기울려 완성한 작품처럼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완벽했고, 어려 보이지만 고고한 아름다움까지 풍겼다.
연못을 바라보는 소녀, 화연은 지금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자신은 지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니,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자신은 이연우라는 이름의 31살 여자였다. 주변에는 친구도 연인도 아무도 없이 30년간을 외로움을 친구처럼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쯤, 운명처럼 그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다니던 회계사무소에 세금 처리를 맡기던 작은 건축사 사무소의 소장이었다.
김태형.
이 사람을 처음 본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바로 내 영혼의 짝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고, 누구를 만나도 사라지지 않던 외로움은 이제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때마침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안 순간, 우리는 같이 눈물을 흘렸었다. 뛸 듯이 기뻐하며 나를 안아 올린 그는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라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 후, 그와 나는 그의 집안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은 집을 얻어 같이 살았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행복했고 또, 행복했다. 흐르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가끔 와서 행패를 부리는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들까지도 우리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가 죽어 버렸다. 우습게도 새벽에 떡볶이가 먹고 싶다는 나를 위해 사러 나갔다가 뺑소니차에 치여 죽어버렸다.
깊은 생각에 잠긴 화연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날은 밤부터 비가 내렸다. 날씨가 많이 풀렸는지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떡볶이가 너무나 먹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연우는 도면을 보던 태형의 어깨에 슬며시 기대었다.
“자기야, 큰일 났어요.”
태형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왜? 또 사랑이가 뭐 먹고 싶대?”
“응. 사랑이가 떡볶이 먹고 싶다고 하는데……. 아빠 힘들게 한다고 때찌해줬어요.”
연우를 바라보던 태형이 그녀의 통통한 볼에 살짝 입 맞췄다.
“그랬어? 그럼 이제는 안 먹겠대?”
“음… 아뇨……. 아직도 먹고 싶대요. 어떻게 하죠?”
“하하하, 그럼 사러 가야지. 사랑이가 먹고 싶다는데 뭐든 못 해주겠어?”
태형이 일어나 파카를 걸쳤다. 연우도 같이 일어섰다.
“저도 같이 갈래요.”
“안 돼. 빙판이 아직 다 안 녹았어. 미끄러워 넘어질지도 모르잖아. 사랑이랑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응, 알았어요. 길 건너 시장에 24시간 하는 할머니 분식집 있잖아요. 거기서 사면 되요. 어묵 많이.”
“알았어, 어묵 많이. 갔다 올게.”
웃으며 나간 그는 1시간이 지나도 2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수십 통 넘게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 서성거리다 찻길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50m 전방에 신호등이 서 있는 횡단보도가 보였는데, 그 앞이 구급차와 경찰차로 어수선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갑자기 마음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손이 벌벌 떨렸다. 삽시간에 눈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재촉해 더듬더듬 다가갔다.
뺑소니였는지 차는 안 보이는데 여기저기 차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잔해들이 보이고, 횡단보도 가운데 핏자국이 크게 나 있었다.
연우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다시 걸었다.
“제발…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