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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1화 (1/110)

00001  나는 누구인가?  =========================================================================

달이 어스름한 새벽, 거칠게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온 산에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빠르게 달리던 두 마리의 말은 이내 속도를 늦추더니 천천히 걷다 멈췄다.

앞서 달리던 검은 말에서 남자가 훌쩍 뛰어내렸다. 추운 날씨에 허연 콧김을 뿜으며 흥분한 말을 진정시키면서, 뒤따르던 말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아버지, 여기서부터는 걸으셔야 합니다. 연이는 제가 안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중년의 남자가 앞에 안고 있던 이불 보따리를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넘겨주고 말에서 내렸다.

“후유, 다 온 것 같구나. 말을 오랜만에 탔더니 그거 조금 몰았다고 삭신이 쑤시는구나.”

“아버지, 그러니까 평소에 운동 좀 하시라니까요.”

“그러니까 말이다. 휴… 연이는 어떠하냐.”

남자가 감싸 안은 보따리를 조심스럽게 들추자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소녀였다.

자고 있는 듯 눈을 감고 있는 소녀의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도 이마엔 식은땀이 맺혀있고, 작은 입술은 혈색도 없이 허옇게 터 말라 있는 것이 소녀는 어딘가 매우 아픈 듯 보였다.

남자는 미동도 없는 소녀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열이 심합니다.”

중년 남자가 다가와서 애잔한 눈빛으로 소녀를 들여다보다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연아… 많이 아프지? 애비가 곧 낫게 해주마. 조금만 참거라.”

아픈 소녀를 보는 중년 남자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남자가 소녀를 추슬러 안아 들었다.

“아버님 가시죠. 이쪽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중년 남자는 남자가 추슬러 안은 보따리를 한동안 바라보다 곧 결심이 선 듯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들어와 있는 이 산은 1년 내내 나무가 푸르게 우거져 있고, 한겨울에도 산 중앙에 있는 호수가 얼지 않는 영산(靈山)이었다. 그들은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를 헤치고 길도 없는 곳을 묵묵히 걸었다.

얼마 후 그들 눈앞에 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산으로 둘러싸여 중앙에 큰 보름달을 담고 있는 호수는 그 안에 하나의 성을 담가놓아도 넉넉할 정도로 크고 깊었다.

한겨울에도 전혀 얼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인 듯,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이 달빛에 빛났다. 간간히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소리도 들렸다.

호수의 풍경에 압도되어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는 곧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버지… 정말 이대로 해도 괜찮을까요? 전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의원을 찾아 맡겨보는 것이 어떨까요.”

중년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창아. 연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 벌써 12년이나 지났다. 이미 나라 안에서는 내로라하는 의원 중에 우리 집 문턱을 안 넘어본 의원이 없을 정도라는 것은 너도 알지 않느냐. 보다 못한 연제(演帝, 환제국의 27대 황제)께서 애비를 불쌍히 여겨 어의까지 내려주셨지만, 그들 모두 하나같이 고개를 흔들면서 이제 1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였잖느냐. 애비도 이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지만 지푸라기 잡아 봐야 하지 않겠니. 우리 연이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아버지… 하지만 이러다 연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허어! 방정맞은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연이가 계속 차도가 없다면 이 방법을 써보라고 네 어미가 죽기 전에 알려준 것이니 한번 믿어 보자.”

“…네, 아버지.”

그들은 호수 가까이 다가가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언가 변화가 느껴졌다. 호수를 수놓던 물결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어느새 표면이 거울처럼 변해버렸다.

물소리도,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밤새가 우는 소리, 바람이 불면서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풀이 몸을 부대끼는 소리까지 모두 일제히 숨을 죽였다. 완전한 적막이 흘렀다.

갑자기 닥친 적막에 짓눌려 미동도 없던 중년 남자가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거라.”

“아버지…….”

중년 남자는 머뭇거리는 남자의 품에서 보따리를 뺏어 안아 들고 호수로 다가갔다. 그는 호수 바로 앞에서 소녀를 감싸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연아…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아비가 곧 뒤따라가마. 내 딸… 아비가 정말 사랑한단다.”

중년 남자는 소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얼음처럼 차가운 호수에 소녀를 밀어 넣었다.

정신을 잃은 소녀는 조금 가라앉더니 곧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상태로 미동 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이 추운 날씨에 금방이라도 얼음장 같은 호수 밑으로 가라앉을 것 같아,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다 소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안 되겠어요. 이러다 연이 죽어요!”

“안 된다! 잠깐만 더 기다려보자… 창아!”

중년 남자가 남자를 붙잡았지만, 남자는 소녀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빨리 호수에서 아이를 꺼내고 싶었다. 남자가 소녀를 붙잡으려는 그 순간…….

소녀의 신형이 움직였다. 정신을 차린 소녀가 물질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호수의 물결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는데 조금씩 움직였다. 미끄러지듯 천천히 이동하다가 호수의 중앙에 이르자 움직임이 멈췄다.

그들은 각자의 두 손을 맞잡고 숨죽여 이 모습을 바라보았다. 산이 침묵에 휩싸였다. 산속에 모든 짐승들과 나무와 풀 한 포기까지, 생명이란 생명은 모두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공기마저도 숨을 죽이는 듯 무거워졌다.

“아버지…….”

“쉿—.”

호수 중앙에 멈춘 소녀의 신형은 그대로 가만히 멈추어 있더니 적당한 자리를 잡는 것처럼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다 멈추었다.

동시에 어두운 새벽하늘에서 빛이 뿜어져 내려왔다. 호수 전체가 일제히 대낮처럼 밝아졌다. 빛은 달과 소녀 사이에 길을 잇는 것처럼 길게 내려오더니 소녀의 신형을 감싸 안았다.

남자는 눈이 부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손등으로 쏟아지는 빛을 막았지만, 중년 남자는 크게 뜬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호수 중앙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두 손을 관절이 부서져라 꽉 맞잡았다.

빛은 한동안 소녀를 비추더니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사방은 순식간에 다시 어둠에 감싸였다. 남자는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비볐다. 그때 옆에서 중년 남자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윽! 눈이… 아버지, 움직이지 마세요. 다치십니다.”

“창아! 저기…….”

“네……?!”

중년 남자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남자는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중년 남자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소녀의 신형이 조금씩 그들이 서있는 쪽으로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조바심에 안절부절못하던 중년 남자는 소녀의 신형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쯤,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호수에 뛰어들었다.

남자가 깜짝 놀라며 뒤늦게 말려보았지만, 중년 남자는 벌써 무릎까지 호수에 들어가 있었다.

“아버지! 안 됩니다. 큰일 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중년 남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소녀에게 다가가 소녀의 발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연아!”

중년 남자는 소녀가 품으로 들어오자마자 꼭 부둥켜안았다. 호수로 뒤따라 들어온 남자가 중년 남자를 부축해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들은 호수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신들이 얼음장 같은 물에 흠뻑 젖은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소녀를 이불로 돌돌 감싸며 얼굴을 살펴보았다.

소녀는 뼛속까지 시린 물속에서 장시간을 떠 있었는데도 혈색이 좋았다. 열 때문에 헐떡거리지도 않고, 추위에 차갑게 얼어 덜덜 떨지도 않았다.

양 볼이 건강하게 발그스름한 빛을 띠면서 미간도 펴져 있는 것이 편안한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녀를 자세하게 살펴보던 남자가 소녀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아버지… 열도 내린 것 같은데요?”

중년 남자가 소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조심스럽게 갔다 대었다. 특유의 따스함만 느껴질 뿐, 전처럼 타오를 것 같은 뜨거운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도 건강한 사람의 그것처럼 혈색이 돌면서 촉촉하니 부드러웠다.

중년 남자가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연아… 애비다. 눈 좀 떠 보거라. 이제 다 나은 게지? 연아… 내 새끼…….”

소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움직였다. 감고 있는 눈꺼풀 안으로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소녀의 눈이 천천히 열리면서 검푸른 눈동자가 나타났다.

“…아버지……”

중년 남자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소녀의 볼로 뚝뚝 떨어졌다.

“오냐! 내 새끼! 연아! 애비다, 애비야. 알아보겠느냐? 애비 알아보겠어? 이게 얼마 만이냐! 이게 얼마만이야! …애비가 그동안……. 아니다. 내 딸, 깨어나줘서 고맙다. 하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녀가 눈을 뜬 것을 지켜보던 남자도 눈물을 흘리며 소녀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쓰다듬고, 손을 만지고 수선을 떨었다.

“오라버니…….”

“연아! 그래, 오라비다. 나 알아보겠어? 이제 괜찮은 거지? 연아!”

그들은 소녀를 끌어안고 한참동안 울면서 여기저기 만지다가 소녀가 다시 잠들자 서둘러 일어났다. 날이 너무 추웠다. 이대로 있다가는 소녀가 고뿔에라도 걸릴 수 있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두 남자는 소녀를 감싸고 있는 이불을 바람 한 점 들어갈 세라 더욱 꼼꼼하게 여민 뒤 말에 올라탔다. 달리기 시작하는 그들 뒤로 아침 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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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필력 이지만 읽으시는 모든분들 기분 좋게 웃으실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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