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0 외전5. 몇 년 후의 이야기 =========================================================================
결 좋은 금발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오밀조밀 균형 잡힌 이목구비에 뽀얀 피부는 아이를 마치 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아이는 붉은색 보석 같은 큰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입을 가로로 늘리며 웃었다.
“ 멍청이 찾았다.”
아기천사 같은 외양으로, 아이는 제 또래로 보이는 또 다른 아이를 신랄하게도 호칭했다. 짧은 다리로 바닥을 보며 열심히 걸어가던 그 아이는 저를 부른 것인 줄은 어찌 알고 빼꼼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옅은 주황색이었는데, 환한 빛 아래에서는 금색으로도 비쳤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아이가 항변했다.
“ 나 멍청이 아니야.”
“ 아니야?”
“ 아니야. 내 이름은 다른 거야.”
“ 알아.”
“ 아는데 왜 멍청이라고 불러?”
“ 내가 그렇게 부르고 싶으니까.”
금발머리의 아이는 당당했다. 어깨까지 기른 긴 머리카락을 리본으로 묶고 있었으나 옷은 남아의 것을 입은 채였다. 반면 상대편 아이는 갈색 머리를 아주 짧게 깎았는데, 입고 있는 옷은 분홍색 원피스였다.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 싫어!”
“ 싫다고? 멍청이라고 부르는 게 싫어?”
“ 그래!”
“ 좋아, 그럼 청멍이라고 부를게.”
“ 청멍이?”
“ 응, 멍청이 말고 청멍이. 싫다고 해서 내가 봐주는 거야.”
“ …….”
“ 청멍이는 괜찮지?”
뭔가 아닌 것 같았지만,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갈색머리의 아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극적인 수긍에 금발머리의 아이가 활짝 웃었다. 겨울눈이 내려앉는 것처럼 깨끗한 미소였다.
“ 청멍아.”
“ …….”
“ 대답해야지.”
“ 응.”
“ 착하다.”
금발머리의 아이가 손을 뻗어 상대를 쓱쓱 쓰다듬었다. 갈색머리의 아이는 제 머리통을 쓰다듬는 손길을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 청멍이. 불릴수록 뭔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해졌지만 그래도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좋았다.
“ 청멍아, 가자.”
어루만지는 것을 멈춘 금발 아이가 이번에는 대상의 손을 붙잡았다. 고사리 같은 손이 상대의 것을 단단히도 틀어쥔다. 그러고는 씩씩하게 척척 걸어 나가는 것에 갈색머리의 아이는 그저 속수무책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가? 어딜?”
“ 예쁜 게 있는 곳.”
“ 예쁜 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두루뭉술했다. 예쁜 게 있는 곳이라니. 그야말로 추상적인 설명의 끝을 달린다.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는지 갈색머리의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린아이인지라 아직은 몸통에 비해 큰 머리가 옆으로 슬쩍 기운다. 그리 고개를 갸울인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예쁜 건 너잖아?”
장군처럼 발을 놀리던 금발의 아이가 멈칫했다. 오래는 아니고 잠깐이었다. 언제 멈췄냐는 듯 아이가 다시 세차게 걸음을 옮겼다. 갈색머리의 아이는 거의 딸려가듯 그와 함께 움직였다.
“ 난 많이 예쁜 거고, 지금 보러가는 건 조금 예쁜 거야.”
“ 아하.”
그렇구나. 갈색머리의 아이가 무구하게 납득했다. 아이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화사한 금발 옆으로 드러난 귀가 평소보다 조금 붉게 물들어있었다.
*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수정구를 응시했다. 다섯 살짜리-만으로 따지면 네 살-남자아이가 한 살 연상의 누나를 꼬시고 있었다.
“ 아윈.”
“ 왜?”
“ 디아나한테 작업을 걸고 있어.”
“ 누가?”
“ 네 주니어가.”
황금을 수놓은 것 같은 머리카락이 수정구 너머로도 반짝반짝 빛났다. 방년 5세를 맞이한 아이의 이름은 오드. 나와 아윈의 아들이었다.
오드는 아윈의 주니어라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생김새도 생김새지만 말과 하는 행동들이 더욱 그랬다. 한번은 제 아빠를 따라 나를 고객님이라고 불렀는데-아윈은 제 기분에 따라 나를 이름으로도 부르고 고객님이라고도 불렀다-, 순간 아윈이 마법을 써서 크기가 줄어든 건 아닌가 한참을 집어 들고 살폈을 정도였다. 아이는 놀라울 만큼 아빠와 판박이였다.
“ 볼수록 신기하다. 어쩜 저렇게 똑같지.”
“ 난 고객님을 더 닮은 것 같은데.”
“ 날? 오드가?”
어디를? 수정구에서 눈을 떼고 내가 아윈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외양이나 하는 행태로만 따지면 오드보다는 오히려 피도 안 섞인 디아나가 나를 더 닮아있었다. 나이에 비해 몸집이 자그마한 디아나는 올해 여섯 살로, 비숏와 에슐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의아함을 담은 내 눈동자를 마주보며 아윈이 웃음기도 없이 말했다.
“ 귀엽잖아.”
“ …….”
나는 잠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까, 오드의 귀여움이 나를 닮았다고 얘기하고 있는 거지?
“ 어, 그래. 그건 나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지.”
인간은 특정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익숙해진다. 전에는 아윈이 저런 뉘앙스의 발언을 할 때마다 ‘쟤가 미쳐간다’며 공포에 떨곤 했었는데, 이제는 뻔뻔하게 받아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내가 세젤귀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라테.
“ 그래도 예쁜 건 널 닮았어.”
나는 도로 첨단 CCTV나 다름없는 수정구를 눈에 담았다. 어른 머리통만한 구슬 안쪽으로 오드와 디아나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디아나도 엄마아빠의 좋은 유전자만을 쏙쏙 빼닮아 꽤나 예쁘장한 편이었지만, 옆에서 자체발광을 하고 있는 오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오드는 그야말로 요정이 낳은 아이 같았다.
구슬 너머의 오드를 바라보며 난 아윈의 유년기를 그려보았다. 지금의 오드에서 머리색만 바꾼 것과 똑같았으려나? 성격은 현재랑 비슷하고?
내 허리께까지 오는 아윈이라니. 풉, 상상하니까 귀엽긴 했다.
-여기 앉아.
그새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앉으라며 이야기하는 오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착한 디아나가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바닥에 안착했다. 그런데 저기가 어디야?
“ 탑 바깥에 저런 곳이 있었나?”
“ 아아, 저거.”
“ 알아?”
두 팔로 내 어깨를 감싼 아윈이 올림머리를 하고 있던 내 머리카락을-마법으로-풀어헤쳤다. 그러더니 평평해진 정수리에 자기 턱을 얹는다. 그 상태로 아윈이 설명을 꺼냈다.
“ 정령석이 있는 곳인데.”
“ 정령석?”
“ 고객님한테 깝치다가 죽을 뻔했던 놈 기억나? 작고 옆으로 퍼진.”
기억난다. 타국의 양반이긴 했지만 무려 후작이었다. 관광을 왔으면 얌전히 관광이나 할 것이지 괜히 내게 시비를 걸었다가 아윈한테 죽기 전까지 맞았다. 목숨을 부지한 것은 순전히 오드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드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싶었던 나는 아이의 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바라지 않았었다.
“ 그 후작이랑 관계가 있어?”
“ 거기서 보내온 거야. 사죄의 의미라나? 고객님이 말렸으니 굳이 가문까지 박살낼 생각은 없었는데, 제 발 저렸나보지.”
아하. 알 것 같다. 흠씬 두들겨 맞은 후작 본인의 뜻은 아니었더라도, 아마 가솔들이 나서서 의견을 모았을 것이다. 아윈의 소문과 실제 전적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멸문의 공포에 떤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살려달라는 의미의 공물이라는 건데.
“ 그걸 왜 저기다 뒀어?”
오드와 디아나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있었다. 그늘이 어찌나 넓은지 둘이서 앙증맞은 몸으로 몇 바퀴를 굴러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령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몰락을 막기 위해 보냈다면 어지간히도 값진 보물일 텐데, 그런 것을 탑 내부는커녕 저런 야외에 방치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 장식한 거야.”
“ 장식?”
“ 나무 장식.”
“ 미친.”
자세히 살피니 거목의 몸통 사이로 뭔가가 박혀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파란색으로 빛나는 아기 주먹만 한 보석이 아무래도 정령석인 모양이었다. 야……나무한테 무슨 짓이냐…….
-예쁜 게 뭔데?
디아나가 주저앉은 채로 말을 걸었다. 꾀꼬리마냥 맑고 고운 목소리가 굉장히 듣기 좋았다. 들을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음색이 예쁜 걸까? 일단 비숏은 절대 아님.
-이제 보여줄게, 잘 봐.
오드가 호기롭게 말했다. 나는 오드가 보여주겠다는 ‘예쁜 거’의 정체가 틀림없이 정령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외엔 딱히 이렇다할게 없었으니까. 의아함을 느낀 건 다음 순간이었다. 오드가 앉은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것이다. 정령석을 가리키려면 일어나서 손을 뻗어야 할 텐데?
그때였다.
-‘부르셨나요? 나의 꼬마 계약자여.’
“ 헉! 저게 뭐야!”
난 깜짝 놀라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반투명한 무언가가 나타나 말을 하고 있었다. 크기는 어른 팔뚝만하고 형상은 사람과 비슷했다. 눈을 큼지막하게 뜬 내가 급히 아윈을 돌아보았다.
“ 설마……이거……정령?”
“ 맞아.”
“ 정령석이 있으면 아무나 소환할 수 있는 거야?”
“ 그럴 것 같아?”
“ 맙소사.”
소환된 정령이 마치 장난을 치듯 아이들의 주변을 돌았다. 이동하는 궤적마다 물방울이 조금씩 아롱거렸다. 색깔도 그렇고 아무래도 물의 정령인 것 같았다. 나는 시야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여러 차례 깜박였다.
오드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예쁘지?
-우와! 응!
-‘저는 운다인. 중급 물의 정령이랍니다.’
-운……다인? 정령? 그게 뭐야?
-몰라도 돼. 그냥 예쁜 거.
-‘저를 관상용으로 치부하는 건 꼬마계약자뿐일 거예요.’
“ 세상에.”
내 지식이 완전할거라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간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정령을 소환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급정령까지는 어찌어찌 범인이 해낼 수 있을지 몰라도 중급부터는 어림없었다.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 타고나야 했다.
나는 넋이 빠졌다.
“ 아윈, 우리 오드가 천재인가 봐.”
차라리 마법을 사용했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아윈은 멍해진 내게 태연하게도 대꾸했다.
“ 그럼, 내 애인데 설마 아닐 줄 알았어?”
“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재수가 없을까.”
내 놀람이 유별나게 느껴질 정도로 아윈은 별 동요가 없었다. 오드가 중급정령이 아니라 정령왕을 차례로 소환해 모델워킹을 시킨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듯한 기색이었다. 왠지 나만 팔불출엄마가 된 기분이다.
“ ……하기야, 남편이 세기의 초천재 마법왕인데 아들이 어떻게 태어난들…….”
그래, 당연한 일이겠네. 심경이 차분해진 내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수정구 안에서는 그새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예쁘다.
-이건 너만 보여주는 거야.
-나만?
-응, 꼭 너만.
오드가 몹시 진지하게 말했다. 덕분에 나는 진한 마음의 가책을 느껴야했다. 미안하다……엄마도 봐버렸어…….
-앞으로도 너만 보여줄게.
“ 쟤네 크면 결혼시켜야하는 거 아냐?”
나는 어느 정도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왠지 디아나가 오드에게 코 꿰이는 장면을 목격중인 기분이었다. 순진한 디아나는 그저 좋다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어째 10년 뒤의 모습이 훤히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인걸까?
“ 고객님.”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불쑥 아윈의 손이 튀어나와 수정구를 가렸다. 엥? 뭐야? 눈을 드니 붉은색 눈동자가 나와 시선을 맞춘다. 이어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 볼만큼 봤지?”
“ 어?”
“ 이제 나한테 집중해.”
느끼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아윈이 방 안의 불을 없앴다.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워진다. 사물이 판별될 정도의 적당한 어둠 속에서 아윈이 부드럽게 내 허리를 감쌌다. 어어, 하는 사이에 등 뒤로 푹신한 감촉이 닿았다.
“ ……때와 장소를 가리랬지.”
“ 가렸잖아.”
아윈의 응수가 뻔뻔했다. 불도 껐고, 착실히 침대로도 이동했으니 됐다 이거냐? 나는 황당하게 그런 상대를 쳐다보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곱게 접히는 아윈의 눈웃음에 설레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심장이 기분 좋은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 오드는 동생이 없어도 괜찮다던데.”
“ 그건 걔 의견이고.”
체온을 담은 입술이 이마 위로 먼저 내려앉는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짧게 웃음을 터뜨린 내가 이내 눈을 감았다. 7년이나 지났는데도 키스를 받을 때면 변함없이 쑥스러운 기분이 되고 만다. 뺨에 닿는 손바닥의 감촉에 나도 팔을 뻗어 상대의 목을 감싸 안았다.
*
마당으로 나가니 오드가 보존마법이 걸린 눈따따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가만 지켜보다 다가가서 디아나는 어딜 갔냐고 물으니, 피곤해하기에 먼저 데려다줬다는 답이 돌아왔다. 쪼그마한 게 은근히 신사였다.
곁에 무릎을 굽혀 앉자마자 오드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걱정 마. 눈따따 안 부술게.”
“ 그런 당부하러 온 거 아냐…….”
“ 그럼?”
“ 오드.”
“ 응?”
“ 디아나가 왜 멍청이야?”
수정구로 보았던 것을 제외하더라도 오드가 디아나를 그렇게 칭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차마 항의는 못하고 비숏이 남몰래 슬퍼하던 것이 기억난다.
아이는 질문에 주저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 귀엽잖아.”
“ 귀여워서?”
“ 멍청이라는 단어는 귀여운데, 디아나도 귀여워. 그래서 멍청이야.”
‘아니지, 이젠 청멍이.’ 오드가 말을 정정했다. 그러니까 단순히 발음이 마음에 들어서 그리 부르고 있단 소리렷다. 허허, 거참.
“ 나름 애칭인걸까…….”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애정표현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부분마저도 제 아빠를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새빨간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다 내가 말했다.
“ 디아나가 좋아?”
“ 응.”
“ 왜?”
“ 디아나니까.”
“ 명답이네.”
나는 손을 들어 오드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내 아들이라곤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머릿결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진다. 한참을 내가 머리를 헝클도록 가만 놔둔 오드가 기다란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 엄마.”
“ 응?”
“ 청멍이는 내꺼야.”
“ ……그래.”
막상 당사자인 디아나의 의사는 빼놓고 결정되는 아주 바람직한 현장이었다. 나는 도전적인 오드의 눈빛을 보며, 어서 비숏과 에슐라에게 이 사태를 귀띔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말하자면 나는 일단 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