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9 외전5. 몇 년 후의 이야기 =========================================================================
한 뼘 정도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흰색에 가까운 옅은 금발을 한번 훑은 미풍이 종이 몇 장을 팔락이곤 사라진다. 깔끔한 서체로 사인을 휘갈기던 남자가 하던 것을 멈추고 눈을 들었다. 해수를 닮은 파란색 눈동자가 창문을 응시하자마자 시종이 바삐 다가가 열린 틈새를 닫는다.
이내 펜을 놓은 황태자가 기지개를 켰다.
“ 지겹군.”
“ 방금 막 오찬이 완성되었다합니다, 전하.”
“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해방감을 담아 중얼거린 황태자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를 움직여 집무실을 벗어나는 황태자의 얼굴은 전과 다름없이 조각처럼 미끈했다.
“ 이벨린은?”
“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기별을 받았습니다.”
“ 일찍 도착했군.”
적당한 높낮이의 목소리는 연인을 떠올리는 것치고는 꽤나 무감한 느낌이었다. 사랑스러워야 마땅할 연인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쩐지 건조하다. 무표정한 낯으로 론드미오가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와 이벨린이 연인이 된지도 어느덧 삼년이 흘렀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황태자는 생각보다 매우 손쉽게 연인을 손에 넣었던 순간을 상기했다. 초기에는 분명 경쟁자가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종내에는 그 혼자만 남았다. 어리둥절하면서도 나쁠 것 없는 일이라 론드미오는 갈 곳이 사라진 정인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것이 벌써 삼년이나 되었다니.
“ 시간이 참 빨라.”
“ 세월은 유수와도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 하하, 그렇지. 이후 일정은 어떻게 되나?”
“ 마나주어 백작님의 알현이 오찬 후로 예정되어있습니다. 그 다음은 세시에 회의가…….”
짜인 스케줄을 순서대로 늘어놓던 보좌관이 이내 말을 멈췄다. 황태자의 주의가 다른 곳을 향했다는 걸 눈치 챘기 때문이다. 상사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긴 보좌관이 이내 화들짝 놀랐다.
“ 아, 아니, 궁내에 웬 토끼가…….”
앙증맞은 몸체에 길게 돋아난 귀가 연신 쫑긋거렸다. 흰색 토끼가 저 홀로 덩그러니 복도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생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유로운 궁 출입이 허가되는 건 아니다. 자칫하면 책임자에게 엄벌이 따를 일이었다.
“ 정원에서 흘러들어왔나 보군.”
“ 관리자를 불러다 경을 치겠습니다.”
“ 그럴 필요 없다.”
황태자가 관대하게 정원사의 실수를 눈감았다. 제게로 쏠린 시선을 느낀 듯 토끼가 코를 벌름거렸다.
“ 맹수도 아닌데 무어 그리 큰일이라고…….”
론드미오는 말을 잇다 말고 멈칫했다. 토끼, 맹수. 대상과 단어가 합쳐지니 불시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큭, 그는 터지는 웃음을 막았다.
“ 아니, 맹수인가? 그것도 흉포한.”
“ 예?”
말을 이해하지 못한 보좌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는 수행원의 의문은 무시하고 혼자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슴푸레 어느 소녀의 얼굴이 그려진다. 조금 흐릿한 인상이었던 것 같은데.
‘ 꺄악! 흉포한 맹수 토끼가 왜 이런 곳에!’
유달리 잘 까불거렸었다. 그래, 그랬지. 특정한 인물의 말과 행동들을 기억해낸 론드미오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황성에서도 만났었는데. 참 재밌었다.
노란색 머리카락이 갈기마냥 풍성하던 것이 눈에 선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눈동자는 아마 갈색이었던 것 같다. 너구리를 닮지 않았었나? 그러나 황태자의 머릿속 묘사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 이상 기억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군.’
외형은 어찌어찌 떠올렸으나 그게 다였다. 잠시 골몰하던 황태자는 곧 생각하던 것들을 털어버렸다. 시간을 투자해 곰곰이 되짚는다면 이름이 기억날지도 모른다. 허나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는 판단되지 않았다.
“ 기다리겠군. 어서 움직이지.”
그는 대상에 대해 더 상기하는 대신 본래의 목적지로 마저 이동하는 것을 택했다. 멈췄던 황태자의 발이 다시 움직였다. 말마따나 이벨린이 응접실에서 황태자를 기다린 시간은 벌써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규칙적인 걸음걸이로 론드미오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남자의 얼굴에 웃음은 없었다. 그 자리를 비집어 차지한 것은 권태였다.
*
헤일론 제국의 황제가 바뀐 지도 1년이 흘렀다. 론드미오가 황위를 물려받은 후, 해가 바뀌고 처음 맞이하는 봄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스푼을 내려놓았다.
“ 입에 맞으시나요?”
“ 아주 맛있소.”
황비가 된 이벨린이 수줍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황후의 자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지만, 이벨린은 이 정도에도 만족했다.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 또한 많이 변했다. 반쪽짜리 애정에도 수긍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지위만 놓고 본다면 그저 그런 가문의 정실이 되는 것보다 황제의 여러 아내들 중 한명으로 살아가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름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가치판단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
“ 몸은 괜찮소? 아픈 곳은 없고?”
“ 걱정해주신 덕택에 무탈합니다.”
“ 다행이군. 내 황비전으로 이번에 새로 들여온 찻잎을 보냈으니 꼭 우려내 마시도록 하시오.
이벨린은 얼마 전 꺼져가나 했던 남편의 애정을 도로 되찾았다. 그녀가 회임을 한 덕분이었다. 태몽도, 배가 나온 모양을 살핀 궁의도 아들일 거라 이야기했다. 황자를 임신한 비는 그렇게 황제의 총애를 얻어낼 수 있었다.
“ 저번에 보내주신 차도 향이 몹시 좋았답니다. 남은 것이 조금 있는데, 시녀를 시켜 내오도록 할게요.”
이벨린의 부름을 받은 시녀가 금방 차를 끓여 가져왔다. 다기를 내려놓은 뒤 공손히 읍하여 물러서는 시녀에게 론드미오가 잠깐 눈길을 주었다. 숱이 많고 다소 푸석해 보이는 금발머리는 곱슬끼가 있었다.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황제의 주의는 다시 맞은편의 아내에게로 되돌아갔다. 시녀의 외양은 그가 과거에 알던 누군가와 제법 닮아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미 기억 저편으로 묻힌 대상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주저 말고 이야기하시오.”
갓 우려낸 차의 향기를 음미하며 론드미오가 말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네, 폐하. 대답하며 이벨린이 화사하게 웃었다. 봄 햇살이 창을 넘어 두 사람 사이로 내려앉았다.
*
케니스의 무표정한 낯이 일그러졌다. 미간에 내천자로 주름이 잡힌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그가 손에 들고 있는 편지였다.
-각하를 우리 아기의 첫 생일파티에 초대합니다! 이동 스크롤을 첨부했으니 꼭 와주세요.
글씨를 큼지막하게도 썼다. 고작 두 문장으로 한 면을 가득 채운 편지는 뒷장이 더 있었다.
-친구사이에 가장 중요한 건 뭐다? 바로 의리! 너와 나의 우정 고리! 이건 우리 안의 의리!
무려 총 세장이었다. 종이낭비의 끝을 보여주는 초대장의 마지막은 추신을 담고 있었다.
-P.S. 의리의리한 축의금 기대하겠습니다.
“ 정신 나간.”
읽은 감상을 짧게 요약한 케니스가 손 안의 편지를 내팽개쳤다. 이런 황당한 서간을 받자마자 태우지 않고 읽어준 것만 해도 가상하다고, 그는 스스로의 자애로움을 칭찬했다.
뭐, 아기 생일? 축의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은 케니스가 몸을 돌렸다. 자신은 바쁜 몸이다. 저런 장난에 어울려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냉정하게 편지를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
“ 와주셨네요!”
라테가 밝게 웃으며 케니스를 맞이했다. ‘여기 내 친구가 도착했어요!’하고 일꾼들에게도 크게 알린다. 이어 하녀들이 척척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 꽤나 상석입니다, 각하. 제 의리죠.”
“ ……후, 대체 내가 어쩌다…….”
“ 그렇게 내일이 사라진 표정 짓지 마세요. 친구 돌잔치에 참석한다고 인생 안 망하니까요. 그나저나 그분은 같이 안 오셨나 봐요?”
“ 그분?”
라테의 언급에 케니스가 반문했다. 지칭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없었다. 그에 라테가 은근한 어조로 속닥였다.
“ 친구사이엔 비밀이 없는 거 아시죠?”
“ 무슨 소리냐.”
“ 요즘 만나는 분 계시다면서요? 다 압니다.”
“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눈동자로 묻다가 케니스는 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다. 표정이 와락 구겨진다.
“ 그럼 그게!”
“ 맞습니다. 접니다.”
얼마 전 공작저로 화환이 배달 된 적이 있었다.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꽃들의 향연이었다. 발신인을 밝히지 않은 선물은 그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여러 권의 책이 곱게 리본을 달고 전달 된 것이다. ‘연애의 모든 것’, ‘연애, 기본부터 응용까지’, ‘초보에게 알려주는 연애의 모든 것’ ‘첫 연애,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세요’……등등.
“ 후훗, 진심어린 축하와 기쁨을 담은 제 선물이었답니다. 응용 편은 요즘도 잘 쓰고 계시겠죠?”
“ 한권도 남김없이 다 태웠다.”
“ !”
“ 테러를 봐주는 건 한번 뿐이다. 명심해라.”
“ 선물이었다니까요!”
‘친구의 정성을 몰라주는 각하는 바보!’ ‘너무해!’ 무정함에 상처받았다며 항의하던 라테는 곧 저를 부르는 소리에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케니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된 게 만날 때마다 한 결 같이 정신이 없었다.
라테의 말마따나 케니스는 사실, 최근에 만남을 갖기 시작한 상대가 있었다. 목선이 예뻐 틀어 올린 머리가 잘 어울리는 차분한 사람이었다. 여성치고는 혼기를 놓친 20대에 홀로 제 가문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업수완이 좋은 그녀는, 그러나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또한 그녀는 케니스가 이끌었던 기사단원의 여동생이었다. 오빠는 지원을 나갔던 타국의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 제가 죽으면……제 여동생은 혼자입니다. 단장님, 부디 제 여동생을……부탁…….’
말도 다 잇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케니스는 바로 곁에서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지나간 일말의 가능성이 죄책감이 되어 케니스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래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유언대로 대상의 여동생을 몇 번 만났다. 전사소식을 전해주고 장례에 참석했다. 위로를 건네고, 가문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업을 도왔다. 완전히 자리 잡을 수 있을 때까지 지원을 해줄 요량이었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자주 만나다보니.
어느 순간 갑자기…….
‘ 아니, 갑자기는 아닌가.’
기억을 더듬으며 케니스는 표현을 정정했다. 가랑비에 옷소매가 젖듯, 그렇게 스며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닫는 시점이 갑작스러웠을 뿐이다. 그녀는 아주 조금씩 그의 안을 침범했다.
케니스의 이성혐오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완치되어 있었다. 로즈법이 빛을 발해 사생이 사라지자, 시달림에서 벗어난 케니스의 혐오증세 또한 천천히 바래져간 것이다. 그녀를 만났을 때도 대부분의 혐오증이 사라진 상태였다.
‘ 그건 확실히 고마운 일이지.’
로즈법의 발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이가 라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본인이 직접 생색을 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당시 라테는 ‘언젠가 각하의 이름으로 날아올 청첩장을 위하여!’라고 외치며 샴페인을 터뜨렸다.
장면을 회상한 케니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때만 해도 황당무계한 헛소리로 치부했었는데, 설마 이렇게 현실로 다가올 줄이야.
“ 청첩장 색깔은 핑크로 해주세요.”
“ 끔찍한 소리.”
언제 돌아왔는지 불쑥 나타난 라테가 말을 걸었다. 케니스가 반사적으로 받아쳤다. 핑크가 싫으면 핫핑크로 해달라며 요구하는 라테는 그새 바쁘게도 돌아다닌 듯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있었다. 본인도 느꼈는지 손을 뻗어 정리하며 말을 잇는다.
“ 축의금 기대할게요, 각하. 아, 준비를 못하셨으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건 아시죠? 간단하게 축하의 댄스를 춰주시면 되겠습니다.”
“ 차라리 공작성을 주겠다.”
“ 안주인님! 아기씨께서 방금…….”
“ 앗, 지금 갈게요!”
말장난을 치던 라테가 도로 부리나케 사라졌다.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케니스는 눈을 돌려 탁자에 놓인 음료 잔을 집었다. 레몬주스는 그가 요즘 만나는 ‘그녀’가 유독 좋아하는 음료였다.
……함께 왔어도 나쁘지 않았을 뻔했다.
잔에 든 것을 한 모금 넘기는 케니스의 표정이 편안했다.
훗날 에스반데 공작저로 ‘결혼의 모든 것’, ‘첫날밤의 모든 것’, ‘육아의 모든 것’이라는 책이 순서대로 배달되었다.
이후 라테는 해골이 그려진 검은색 청첩장을 전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