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외전2. 케니스와 함께 춤을 (IF외전) =========================================================================
데미지를 입은 내 낯빛이 창백해졌다. 으윽……혀의 감각이 상실되어간다…….
“ 유언을 남길게요. 빨간 열매를 조심해라…….”
“ 헛소리 말고 열매는 버려라.”
“ 네.”
난 들고 있던 것을 멀리 날려 보냈다. 떫은맛에 대한 충격이 컸으므로 내던지는 내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후, 으, 텁텁해.
“ 오늘 새로운 걸 배웠어요.”
“ 뭘?”
“ 우정의 맛은 떫다.”
그리고 겉모습에 속지 말자. 생긴 건 사과처럼 생겨서 맛은 덜 익은 감일 줄이야! 사기 당했어, 사기. 허마그 산맥이라 열매 맛도 험악한가.
“ 다음엔 맛있는 열매로 따주세요.”
“ 꿈도 야무지군.”
“ 아니지, 제가 따다드릴게요. 기달!”
비록 맛은 흉악했지만-더구나 그 흉악함이 아직도 입 안에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케니스가 마음을 써줬다는 것은 감동적인 부분이었다. 본인도 미처 열매 맛이 그럴 줄은 몰랐는지 아닌 척 하면서도 당황하던 표정은 나름 귀엽기까지 했다. 좋아, 내 친구 김첨지의 마음씨에 답례를 해준다!
“ 또 어딜 가나.”
“ 있어 봐요, 탐색중이니까.”
예전에 어느 도감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깊은 산 속에는 이런 잎사귀 모양의 요런 열매가 있는데, 크기는 이러이러하고 맛은 저러저러하다고. 이얍, 시력 풀 가동!
“ 찾았다!”
실(實)봤다! 나는 발견 세리머니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운이 좋게도 금방 기억 속의 식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난 후다닥 발견물의 앞으로 다가가 치맛자락을 그러모으곤 폴싹 주저앉았다. 자그마한 잎사귀엔 매달린 열매도 자그마했다.
동글동글한 열매들은 블루베리를 꼭 닮은 파란색 빛깔을 띄고 있었다. 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군. 새콤달콤한 맛이 난다던 도감의 설명을 한번 믿어보겠소이다. 나는 잎사귀 하나를 우선 손바닥 위에 올리고, 그걸 접시삼아 열매를 여러 알 따서 가지런히 담았다. 이열, 비주얼 괜찮은데?
“ 각하, 짠!”
“ 뭐지?”
“ 먹을 수 있는 열매예요. 마치 저처럼 깜찍하게 생겼죠?”
케니스는 내 비유에 나를 잠시 정신병자 보듯 쳐다보았지만, 내민 열매는 순순히 받아들었다. 한 알을 손가락으로 집어 관찰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안으로 넣어 씹는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다 일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케니스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시달려온 환경을 안다. 보통은 이성이 건네는 것을 저리 식음하지 않을 것이다.
신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뜬금없이 약간 부끄러워졌다.
“ 맛있죠?”
“ ……나쁘지 않군.”
“ 아주 맛있네.”
다 드세요. 다. 상대에게로 열매를 죄다 밀어주다가 난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과거의 장면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땐 열매가 아니라 팝콘을 콧구멍에 쑤셔줬었지? 와, 당시에만 해도 케니스 진짜 재수 없었는데. 지금처럼 허물없이 지내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 왜 그렇게 웃지?”
“ 그게, 각하와 저의 첫 만…….”
남이 생각나서요. 하고 곧이곧대로 불 뻔한 나는 뒤늦게 입을 딱 다물었다. 안 되지! 생각해보니 그건 나한테나 우스운 추억이지 케니스의 입장에선 살인의 추억이었다. 향숙이 예뻤다……가 아니라, 아무튼 끄집어내서 좋을 게 하나 없는 과거다. 누가 본인의 콧구멍에 주전부리가 들어갔던 경험을 상기하고 싶겠어! 난 얼른 말을 바꿨다.
“ ……두. 첫 만두를 함께 빚던 추억이 생각나서요.”
“ 너와 그딴 걸 빚은 기억은 없다만.”
농담이 통하지 않는 케니스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겠지.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둘러댄다는 게 그만.
“ 생각해보니 꿈에서 빚었네요. 제가 가끔 꿈과 현실을 혼동하곤 하거든요.”
“ 감히 날 그따위 꿈에 불러냈었단 얘긴가?”
“ 꿈인데요, 뭘! 그러지 말고 오늘 밤엔 꿈속에서 함께 쑥이나 캡시다.”
“ 끔찍한 소릴.”
“ 쑥이 별로면 약초나 버섯도 괜찮아요.”
“ 장난하나?”
“ 별 수 없네, 고구마 콜?”
“ 말을 말아야겠군.”
케니스 놀리기는 재미있었다. 집요하게 장난을 걸다, 나는 문득 시선을 잡아채는 웬 형상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뭐지? 방금 뭔가 날쌔게 내 옆을 지나갔는데. 크기가 좀 작은…….
“ 끄아아아!”
대상의 정체를 알아낸 내가 냅다 비명부터 질렀다. 옆에서 케니스가 흠칫 놀라는 것이 곁눈으로도 보인다. 난 제자리에서 막 팔을 허둥거렸다.
“ 봤어요? 봤어요?”
“ 잘은 모르겠지만 진정해라.”
“ 날다람쥐!”
“ 뭐?”
“ 귀여워!!”
날다람쥐님이 날 지나가셨어!
지구에서는 날다람쥐를 직접 본 경험이 없었다. 산을 멀리하며 살았던 탓도 있었지만 동물 자체가 멸종위기종이라는 이유도 한몫했다. 가끔 인터넷을 통해 사진으로만 감상하곤 했었는데, 스크린 너머로도 매번 내 심장을 뒤흔들곤 했던 그 날다람쥐가 바로 지금, 내 앞에, 짜잔! 나타난 것이다!
나를 지나쳐간 날다람쥐는 근처의 나무에 사뿐히 안착했다. 쪼르르 타고 올라가더니 얇은 가지 하나에 자리를 잡는다. 아, 현기증……. 저것은 이 세상의 귀여움이 아니다.
“ 헉! 날다람쥐님이 날 보셨어!”
날 다람쥐국으로 인도해주실 거야!
“ 맛이 갔군.”
온 쌩쇼를 펼치는 나를 보며 케니스가 혀를 찼다. 한심하다는 감상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으나 나는 굴하지 않았다. 흥, 날다람쥐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
“ 마법을 배워둘 걸 그랬어요.”
“ ?”
“ 그럼 존재감을 지우는 마법을 내게 건 다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날다람쥐야……하아하아.”
“ …….”
어쩐지 케니스가 내게서 거리를 조금 띄운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난 결국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날다람쥐에게 접근하기 위해 슬며시 발을 내디뎠다. 간격이 조금씩 좁혀지는데도 웬일로 대상이 꼼짝하지 않는다. 발가락을 움직이는 순간 도망갈 줄 알았는데 의외다. 이거 잘하면 지척에서 관찰하는 것 뿐 아니라 만져볼 수도 있겠는데? 후후후, 큭큭큭큭! 마음 속 검은 욕망이 눈을 뜬다.
“ 착하지, 날다람쥐야. 이 언니 나쁜 사람 아니야.”
욕망은 넘치지만 해가 되지 않아요. 이리오렴, 쬐깐한 베이비. 마치 변태 밀렵꾼 같은 표정-훗날 케니스가 말해줬다-으로 내가 슬금슬금 몸을 이동시킬 때였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은 채로 나는 잠깐 멈칫했다. 발에 닿는 느낌이 뭔가…….
“ 묘하게 이상한데. 기분 탓인가?”
그리고 기분 탓이 아니었다.
“ 엄마야!”
와르르!
지반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되어먹은 땅인지 발을 댄 곳이 순식간에 주저앉는다. 갑작스런 붕괴에 내 몸이 미끄러져 옆으로 확 기울었다. 어? 어라? 워낙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뭔가를 해볼 새도 없었다. 무력하게 몸이 넘어가는 와중 눈만 휘둥그레 뜬다. 잠깐, 잠깐만, 사람 살……!
덥석.
“ 괜찮나?”
“ ……!”
살았다!
팔이 붙잡혀 있었다. 나는 아직 다 돌아오지 않은 정신으로 날 붙잡아준 상대를 응시했다. 케니스! 구세주 케니스였다. 언제 달려온 건지 넘어지기 직전 그가 내 팔을 낚아채었던 것이다. 덕분에 난 경사면으로 몸을 내던지는 대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내가 고꾸라지던 지점은 하필이면 깎아지른 듯 가파른 비탈길이라, 넘어졌다면 분명 속절없이 데굴데굴 굴렀을 일이었다.
케니스에게 몸을 의지한 채로 내가 다시 안전지대로 발을 디뎠다. 경사면에서 멀어지고 나니 그제야 심신에 안정이 찾아온다. 푸하! 물에 잠겼다나온 사람처럼 내가 크게 숨을 토했다. 어지간히 놀라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 우와……끝장날 뻔했네.”
하마터면 구르기로 완주할 뻔한 비탈길을 바라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가파른 경사는 떨어진 곳에서 구경해도 아찔할 정도였다. 저, 저길 드럼통마냥 굴러 내려갈 뻔했다 이 말이지. 절로 소름이 쫙 올라온다. 다치는 수준이 아니라 죽었을지도 몰랐다.
‘ 생명의 은인!’
나는 요단강 뱃놀이에서 나를 구해준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은인 케니스는 아직도 내 팔을 단단한 손마디로 붙들고 있었다. 놓아 달라 할까 하다가 고맙다는 인사가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절을 해도 모자라지.
“ 감사합니다, 각하. 덕분에 살았어요.”
나는 목소리에 최대한 진심을 담으려 노력했다. 도움 자체도 고마웠지만 그 도움을 준 이가 다름 아닌 케니스라는 점이 특히 감격스러웠다. 디딘 곳이 무너지면서 내 몸이 넘어간 것은 그야말로 찰나였고, 그 짧은 시간에 이동해 나를 구했다는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소리였다. 여혐이고 나발이고 반사적으로 손부터 뻗었다는 얘기. 크흡, 우정의 힘이란!
“ 각하?”
인사를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케니스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마치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상념 중인가? 의아함에 불러보자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내 팔을 놓는다. 놓는다기보다 거의 팽개치는 수준이어서 내가 미간에 옅게 주름을 잡았다. 이 양반이? 마음은 이해한다만 그렇게까지 소스라치는 건 좀? 이거 감격이 약간 옅어지려 하는데.
나는 당시 신경이 분산되어있었다. 허무한 실족사를 면한 것에 안도하느라, 우정의 확인에 감동하느라, 험한 걸 넘어 트랩이 설치되어있는 산세에 분노하느라, 또 나중에는 날다람쥐의 행방을 궁금해 하느라 심적으로 다망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케니스가 나를 붙잡았었던 제 손을 내려다보며 지었던 표정을, 내가 미처 목도하지 못한 것은.
*
토벌은 무사히 끝났다. 내가 날다람쥐만 영접하고 정작 트롤은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는 것만 빼면, 이를 데 없이 완벽한 정벌이었다. 정해진 시간까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기사들은 저마다 나름의 성장을 이루었는지 면면에서 빛이 나기도 했다.
토벌대가 귀환하자 영주는 서둘러 만찬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출타 중이라던 영주의 첫째 딸을 처음 대면했는데, 그녀는 파격적인-노출-드레스를 입을 채로 고혹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다 케니스의 부재를 눈치 채자마자 포크로 탁자를 찍었다.
식탁보 덕분에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똑똑히 봤다. 힘깨나 실린 날카로운 스윙이었다. 순간 포크가 휘어지는 것 같았던 건 기분 탓이었을까?
아무튼 피엉버므 영애는 내가 케니스를 따라 이곳까지 내려오게 된 당초의 목적이었다. 목표하던 이를 만났으니 자연히 순서는 다음으로 넘어간다. 과연 그녀가 의심대로 협박범이 맞는지, 나는 그걸 알아내야했다.
그래서 자리를 만들었다. 피엉버므 영애는 현재 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 각하께선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요?”
수심 가득한 목소리가 케니스의 안부를 묻는다. 나는 당연히 케니스의 안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상대를 부른 것이 아니었지만, 피엉버므 영애의 각하타령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난 반복되는 상대의 염려에 몇 번째일지 모를 동일한 대답을 내놓았다. “네.” 영혼은 빠진 채였다.
영애가 저러는 이유가 있기는 있었다. 성으로 귀환한 케니스가 그 즉시 제 거처에 틀어박히더니 만찬에도 불참하고 이 시간까지 칩거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피엉버므 영애는 토벌대원 중 그나마 말을 붙이기 쉬운 내게 각하께서 왜 저러시냐 물었지만, 나도 그 연유를 몰랐다. 실상 나또한 누군가를 붙잡고 쟤 왜 저러냐 질문해야 할 판이었다. 케니스는 산에서 날 구해준 이후로 갑자기 내외를 시작했다. 황당한 노릇이었다.
“ 각하……흐흑.”
“ 각하 사지 멀쩡하십니다. 몬스터한테 얻어터지지도 않았구요. 이제 그만 진정하세요.”
“ 그치만…….”
누가 보면 케니스 죽은 줄 알겠다. 피엉버므 영애는 벌써 두 개째 손수건을 적시고 있었다. 그만! 각하 흑흑 그만! 다른 건 몰라도 케니스의 육신이 멀쩡하다는 것은 내가 잘 알겠다. 나는 골을 짚었다.
“ 정말로 대단히 굉장히 안녕하십니다. 생채기 하나 안 나셨어요. 산 사람 걱정은 그만하시고 영애, 슬슬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건 어떨까요?”
“ 다른 주제라니요?”
“ 그러니까…….”
“ 한데 각하께선 진정 괜찮으신 걸까요?”
“ 영애 혹시 NPC예요?”
인내심이 깔끔하게 동났다. 더 이상 참고 어를 수가 없었다. 몰라, 때려 쳐! 기승전 버려! 이성을 잃은 내가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 작품 후기 ============================
날다람쥐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네ㅇ버에 검색해봤다가 넘나 귀여워서 이성을 잃을 뻔했습니다. 날다람쥐가 사는 방향으로 절을 할 뻔했다구요...! 그럼 동서남북 번갈아 가면서 하면 되는 건가!! 아무튼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