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4. 엮이는 물고기 세 마리 =========================================================================
네?
나 방금 뭐 잘못 들었나. 황녀언니 뭐라구요? 애달픈 짝사랑의 꽃을 피워야하는 사람이 갑자기 씨앗을 심다말고 모종삽으로 옆 사람 갈비뼈를 공격한 느낌이었다. 갈비뼈가 뎅강해버려! 진단서를 떼어버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내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사냥대회는 케니스를 향한 외사랑(feat. 황녀)의 시작이 맞았다. 이상한나라의 앨리스로 치자면 앨리스가 추락하는 굴, 혹은 쫓아야 하는 토끼와 같이 말이다. 근데 참석자체를 않다니? 누가 굴 위에 맨홀뚜껑을 덮어놨거나 토끼가 지각하지 않았단 소리였다. 이 무슨 ‘안전주의 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성실한 토끼’같은 얘기야.
혼란에 빠진 내게 심지어 황녀는 당시 읽었던 책의 내용까지 언급했다.
“ 증오라고만 여겼던 감정이 실은 애증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ㅡ그래요, 엇갈리기만 하던 두 사람이 결국 서로를 제대로 마주하는 부분에서 1권이 끝났어요. 상대의 목을 베려 들었던 단검을 결국 바닥에 떨어뜨리는 장면이었죠. 둘의 시선이 얽히며 침실에는 정적만이 내려앉았던 바로 그 장면. 애쉬의 호박색 눈동자가 스스로에 대한 경악으로 떨렸고, 창가의 달빛은 시리게 부서져 은빛가루처럼 그의 머리를 장식했죠. 평행선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사다리를 타고 있었던 둘이 오직 보름달만이 세상을 비추는 한밤중에 단애 같은 사다리의 끝에서….”
“ ……."
언니 혹시 책 외웠어요?
왜 이렇게 자세해. 뭔지 바로 알겠다. 제목은 ‘난 나를 믿었던 만큼 난 내 단검도 믿었기에’. 새삼스럽지만 굉장히 잘 팔렸던-지금도 팔리고 있는-글이었다.
맙소사. 이 언니가 정말로 내 책을 읽느라 사냥대회에 불참했단 말이야?
그럼 수백 댓글러들을 뒷목 잡게 했던 황녀의 호구사랑은?
“ 아무튼 그 이후로 로즈님의 작품은 전부 찾아 읽었어요. 무료하다고 여겼던 일과에 비모르 독서가 추가되었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는 시간도 갖게 되었죠. 매일 매일이 놀랍도록 즐거웠어요. 그리고 그때 깨달았죠.”
호구사랑의 행방은….
“ 전 단지 권태로운 상태였다는 걸. 똑같다 여겨지는 하루가 지겨워 무언가 자극이 되는 걸 찾고 있었을 뿐이었던 거예요. 관심이 있다 생각했던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어요. 만약 로즈님의 책과 만나지 못했다면 전 미련하게 착각하여 가망도 없는 사랑에 스스로를 가뒀을지 몰라요.”
행방은 소멸이었다.
호구사랑은 죽었다. 짝사랑은 이제 없어. 죽었어! 하지만 기억에, 내 가슴에 하나가 되어 살아가!
어쨌든 이 세계에는 더 이상 없었다. 세상에. 원작이 변했다. 내가 들어온 야수의 꽃이 처음으로 원작과 다른 노선을 걷고 있었다. 황녀가 케니스를 연모하지 않게 된 이상 그로인해 일어나는 여주인공 관련 에피소드는 죄다 삭제라고 봐야했다. 뒤집어진 정도는 아니지만, 틀리긴 틀렸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변화였다.
그 이유가 내 글이라니. 이거 충격적인데.
궁금하던 팬의 정체가 황녀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내 책이 황녀에게 끼친 영향은 그보다 두 배쯤은 놀라웠다. 나는 조금 전 싸인을 해줬던 로즈 저 비모르 책을 힐끗 내려다봤다. 얘가 그렇게 큰일을 해내다니? 갑자기 책이 성서인양 거들먹거리는 착시가 일었다. 거, 건방진….
“ 그래서 고마워요. 늘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황녀언니는 가면너머로 전해지는 청초한 웃음과 함께 내게 재차 고맙다 말을 건넸다. 그녀의 녹안에서 넘치는 호의가 읽혔다. 내가 한 거라곤 뇌내망상을 글로 써재껴 팔아먹은 것뿐인데, 돈을 원기옥마냥 끌어모은 것도 모자라 예쁜 언니의 애정까지 받으니 어째 과분해 몸이 꼬였다. 나는 외려 상대의 팬이 된 기분으로 쭈뼛거리다 성심을 다해 답을 뱉었다.
“ 무덤에 입주하기 전까지 글 쓸게요.”
쾅!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래에서 화답하듯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놀라 다른 사람의 비명소리와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니 웬 복면의 남자들이 우르르 안으로 난입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 안티 비모르? 나 때문에 빡쳐서?
는 물론 아니고. 그럴 리가 있나. 복면무리가 이층으로 뛰어올라오자 병풍처럼 서있던 기사 둘이 신속하게 몸을 날려 계단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챙’하는 간지나는 소리와 함께 검을 뽑는 기사들의 뒤태를 응시하다 황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차분함이 내 시선을 묶었다. 나는 그걸 보고도 ‘꺄악!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하고 물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예정된 습격이었단 소리다. 와, 이 언니가 진짜.
고맙다더니? 내 배신감으로 얼룩진 심경을 눈치 챘는지 황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한 어조였다.
“ 안심해요. 아무 일 없을 테니까.”
물론 이 판국이 걱정되거나 불안한 건 아니었다. 여차하면 조용히 튀면 그만이니까. 내 품에는 늘 위기의 상황에 무사도망을 보장해주는 스크롤 한 뭉치가 살고 있었다. 본디 내 한 몸 챙기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법이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부크가 있던 방향을 눈에 담았다. 도움 안 되는 부크가 비명을 꽥꽥 지르며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휴 저 짠내.
생존을 위한 그의 애잔한 몸놀림을 지켜보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크의 몸도 걱정이고 저걸 계속 봐야하는 내 눈도 걱정이었다. 여기로 데려와야지. 발을 옮기는데 수적으로 열세인 기사 둘이 점차 버거워하는 게 보였다. 오크무리 이후로 몹시 판타지스럽고 희귀한 구경거리라 관람하는 재미는 사실 있는데…저거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쟤네 밀리고 있는데?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반복된다. 혼비백산 난리인 소시민 부크의 목덜미를 낚아채려다 난 흠칫했다. 천장에 금이 가고 있었다.
“ 크크크, 황녀. 우릴 너무 우습게 본 것 아닌가.”
귀에 거슬리는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긁듯이 흘러나왔다. 뭐여, 이거 장르 갑자기 왜이래.
천장 일부가 무너져 생긴 구멍으로 새로운 복면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음, 말 그대로 쏟아졌다. 하늘에서 복면이 내려와. 검은 놈들 떼거지에 난 거부감을 느끼며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그 와중에 돌아본 황녀는 여전히 침착했다. 이정도면 위기라 할 법한데 그녀의 차분함엔 변화가 없었다. 어멋, 언니 담력 대박인데? 쇠 긁는 목소리를 낸 대장 비슷한 놈-얘는 복면의 재질이 실크인 것 같았다-도 그녀의 태연함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야심차게 등장했거늘 호응해주지 않는 상대에 기분이 상한 듯 복면대장이 낮아진 목소리를 냈다.
“ 믿는 구석이 뭔 진 모르겠지만….”
어, 그거 니 뒤에 서 있는데.
난 충동적으로 삿대질할 뻔한 팔을 내렸다. 언제 등장했는지 낯익은 흑발이 복면대장의 뒤로 미풍에 살랑이고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성검 철집게로 공격했더니 온순해진 푸딩 케니스아니야! 왜 남자주인공들이 등장하면 뜬금없이 실내고 실외고 미풍이 부는 걸까. 알아보기 진짜 쉽네.
“ 저, 전장의 검은 사신!”
경악에 찬 어조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리고 난 팔을 문질렀다. 으아아 소름. 내 손발. 까먹고 있었던 케니스의 별명을 육성으로 너무 크게 들었다. 그래, 맞다. 쟤 호칭 저거였지. 전장의! 검은! 사신! 크으으.
황녀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차분했던 이유가 이렇게 등장했다. 임무 때문에 왔다더니 이거였구만. 타이밍 쩐다.
케니스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검을 뽑았다. 느린 속도로 검이 검집에서 온전히 뽑힐 때까지 단 한명도 움직이지 못했다. 복면대장 또한 유일하게 드러난 눈을 부릅뜨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새삼 물고기2의 위용이 와 닿았다. 쟤도 공포의 대상이구나. 하긴 물고기 중에 안 그런 멤버가 누가 있으려만은.
정신을 차린 듯 복면대장이 이를 갈며 대사를 뱉었다. 부들거리는 칼칼한 쇳소리는 역시나 귀에 거슬렸다. 이 아저씨 하루에 담배 열 갑 피나?
============================ 작품 후기 ============================
전장의 검은 사신!
이번편은 쓰는 도중에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 (편의점 알바중)아 이것저것 다 먹고싶다
나: ㅋㅋㅋㅋㅋㅋ참아
친구: 킄...난 편의점의 검은 사신!
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난 행사장의 검은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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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이에요! 무더위에 16일짜리 쉬는 날 없는(!) 행사를 맡아 저는 지금 말라가고 있답니다...8ㅁ8 쥬글거같아요 헉헉 발바닥이 타들어간다! 팔다리는 이미 반박할 수 없는 동남아!
오늘은 장염ㅜㅜ에 걸려 하루쉬었답니다. 본 죽...너란 지갑 브레이커..(파들파들
행사가 어서 마무리되었으면! 설마 16일이면 하루이틀은 비가 올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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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에 놀러오시면 여신(!) 라테 팬아트도 보실 수 있고 팬픽(!)도 보실 수 있답니다. 힣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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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받았네요. 생각지도 못함 0_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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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아루나님 후원쿠폰 감사드려요 XD 꺄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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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개인지 수요조사 해보고싶당 ㅇㅅaㅇ (특전 신혼외전, 첫날밤외전 생각중 <-혼자 앞서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