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4. 엮이는 물고기 세 마리 =========================================================================
“ 이게 뭐야.”
황당이 지나쳐 속마음이 입으로 나왔다.
“ 이게 뭐야?”
두 번 나왔다.
나는 망부석처럼 자리에 굳어 대상이 사라진 전방으로 여전히 시선을 고정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건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무슨 일이?
집게로 옷자락을 잡았더니 케니스가 푸딩이 됐어?
대체 무슨. 착각이겠거니 여기기엔 태도변화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표정도 표정이지만 그래? 믿어주지? 대사도 못지않게 충격적이다.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받아들여주겠다는 기색이었다. 그럴 수가. 이건 대단히 케니스답지 못한 태도였다. 탈케니스가 됐잖아.
얼떨떨한 기분으로 탈케니스가 떠나간 방향을 응시하다 난 내 오른손으로 눈길을 돌렸다. 1실버짜리 철 집게가 갑자기 용사의 성검마냥 위용을 내뿜고 있다. 나는 그 부담스러운 포스를 눈에 담으며 미간을 모았다. 손대신 이걸로 상대를 잡아챘지. 그 행동을 배려로 느낄 수가 있나?
케니스의 안색에서 씻겨나가던 혐오가 떠오른다. 장면을 되새기자 혼돈이 더해졌다. 실은 범인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 이성혐오증 환자는 다 이렇다던가? 비교군이 없으니 추측하기도 어렵다. 나는 ‘널 극혐벌레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내 마음을 알아줘!’가 왜 ‘널 따스하게 이해하고 배려하는 내 마음을 알아줘!’가 되고만 것인지 그 차원을 넘는 변화의 이유를 고민하다 이내 눈을 감았다.
그래. 시뮬레이션을 해보자.
역지사지라는 선인의 말씀에 입각해 충동적으로 떠올린 발상이었다. 최대한 이 상황을 내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상상으로 재구성한다면 뭔가 깨달음이 올지도 모른다. 솔직히 진짜 케니스가 푸딩이 된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궁금하게 해.
난 마음을 가다듬고 상상을 시작했다. 우선, 내가 있다. 내가 있고 혐오하는 대상…그래, 곱등이가 있다. 곱등…아 미친 단어가 너무 심하네. 곱선생으로 해야겠다. 곱선생이 있다.
나는 차근차근 그림을 그려나갔다. 내가 서 있고, 그 뒤에 곱선생이 있다. 곱선생은 폴짝폴짝 나를 향해 점프하며 다가오는 중이다. 나도 그걸 알고 있다. 폴짝…폴짝…곱선생의 힘찬 뜀박질이 선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종아리가 뭔가가 찰싹 달라붙는다! 내 종아리에! 찰싹! 기겁해 놀란 가슴으로 뒤를 돌아보니 다리에 붙어있는 것은 바람에 날린 나뭇잎이었다.
곱선생은 일부러 나를 피해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 !”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개안한 기분이었다. 이, 이건!
해일처럼 밀려오는 곱선생에 대한 고마움…! 난 집게를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곱선생이 날 왜 피했는지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핵심은 어쨌든 녀석이 날 피했다는 것이다. 배려 깊은 곱선생, 사려 깊은 곱선생. 곱선생 너어!
난 조금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집게를 내려다봤다. 감회가 새로웠다. 철 집게, 이 배려의 결정체인 도구 같으니. 케니스의 변화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이런 기분이었니? 말랑말랑해질 만하구나.
명쾌한 감흥으로 사건을 납득하고 나니 슬슬 이거 계 탄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들었다. 표정 및 눈빛의 변화로 추측하건데 케니스에게 내 위치는 어서 지워야하는 방 벽지의 곰팡이에서 그냥 놔둬도 상관없는 길가의 먼지정도로 격상한 듯했다. 이젠 이벨린이 없어도 내 목이 멀쩡하겠구나. 와 이거 개이득인데?
아윈에 이어 케니스까지 사망플래그가 사라졌다. 황태자는 애초에 본인에게 깝친다고 상대를 죽일 위인이 아니었기에-이벨린을 건드리면 또 모르지만-배제하고 안심해도 좋았다. 일단 남주인공에게 죽을 위험은 없어졌구나. 거 요즘 운수가 좋다. 설렁탕은 사지 말아야지.
튼튼해진 명줄에 기쁨을 느끼며 그럼 이제 목적이었던 맛집을 탐방해볼까 걸음을 떼는데, 멀리서 부크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다. 쟤 왜 뛰어와? 밥을 향한 뜀박질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날 찾으러 온 듯 코앞에서 정지한 부크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 역시, 헉, 허억, 여기계셨, 흐억, 군요, 후어억.”
“ 숨부터 쉬어….”
뭘 얼마나 뛰어온 건지 한참을 헐떡이던 부크가 간신히 호흡을 고르고 말을 꺼냈다. 전해온 용건은 팬미팅 참가자들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벌써? 꽤 늦을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생각보다 빠르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부크와 함께 약속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걷는 도중 부크가 가발을 내민다. 받아들고 나는 흠칫했다. 뭐가 이렇게 부드러워.
“ 이거 얼마짜리야?”
“ 10골드요.”
“ …돈 많이 벌었구나?”
“ 다 선생님 덕분이죠.”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엉키는 감도 없는 것이 마치 실크 같다. …크윽…가발 따위가! 나는 가발에게 패배감을 느끼며 그것을 땋은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답답하긴 하지만 모자보단 이게 안전하겠지. 뒤이어 내미는 가면까지 쓰고 나자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소유인지 빌린 건지 저택 한 채가 나를 맞이한다. 나는 부크를 달고 안으로 들어섰다.
2층으로 올라가자 사람을 고용한 모양인지 테이블이며 다과며 다 준비가 되어있었다. 특히 정중앙 유독 화려한 탁자가 마치 장미꽃에 파묻힌 모양을 하고 있는 것에 난 헉 숨을 삼켰다. 의자도 장미의자였다. 설마 저게 내 자리….
약간의 공포를 느끼고 있으려니 한쪽에서 공간이 일그러졌다. 아, 저거 텔레포트잖아. 생각하자마자 허공에 사람이 여럿 생겨난다. 중심으로 보이는 한 여성과 대여섯 명의 다른 여자들. 그리고 호위로 추정되는 기사 둘까지. 등장한 이들에 부크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출판사에 찾아왔던 기사에요, 저기 왼쪽.’ 아 그래?
열 명이 조금 안 되는 인원은 도착하고 나서 잠시 어지럼증을 삭히는 듯 말이 없었다. 저 느낌 알지. 이내 멀쩡해진 그들 중 가운데 여인이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가까이에 서니 좋은 향기가 풍겼다.
그녀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디 좋은 집 아가씨일까.
“ 로즈님?”
“ 아, 네.”
“ 만나서 반가워요.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가면너머 눈가가 곱게 휘어진다. 나는 그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꼭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벨린보다는 좀 더 옅은, 연두색에 가까운 빛깔. 그나저나 목소리 참 청초하시네. 옥구슬이 굴러가버렷!
“ 일단 다들 앉아서 이야기해요.”
여인의 권유에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에 착석했다. 기사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지키듯 반듯한 자세로 서있었다. 이거 진짜 귀한 집 영애인 듯싶은데. 정말 내 팬이란 말이야?
예상대로 장미의자는 내 자리였다. 부끄러움을 감추고 괜히 태연한 척 의자에 앉아 맞은편에 자리한 여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제 팬미팅 시작인가!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나노만큼도 모르겠다.
내 동공지진을 상대가 몰라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데 그녀가 말을 텄다.
“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좋네요. 작가님 작품은 전부 다 읽었어요. 참, 책 가지고 왔는데 싸인 해주실래요?”
그러면서 내 첫 작 ‘방랑기사 에드윈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를 내민다. 비모르 책을 내미는 자세에서도 기품이 흘렀다. 이 언니 대체 정체가 뭐지.
나는 여인을 비롯해 참석한 모두의 책에 싸인-한글로 ‘현금’이라고 썼다-을 해주며 할 말을 고심했다. 음…그래, 이 주제를 꺼내자.
“ 다들 재밌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혹시 특별히 속편이 보고 싶다거나 하는 작품이 있었나요?”
“ 저는 ‘호위기사면 호위나 해’ 이거요!”
“ 전 이번에 나온 신작이요! 황실기사단의 여러 가지 사정을 더 알고 싶어요!”
“ 다 보고 싶지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그놈의 뒷조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이 작품이요! 둘의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요.”
“ 전….”
분위기가 갑자기 뜨거워졌다.
주제는 베스트 작품에서 베스트 커플, 베스트 장면으로 차츰 옮겨갔다.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녀들 중 내 작품 독서를 하나라도 빠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언니들 진짜 애독자네-심지어 한명은 대사들을 줄줄 읊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 가장 대단한 건 이 와중에도 안색하나 변하지 않는 기사들이었다. 남자가 남자를 벽치기로 가두거나 넌 내 소유라며 침대기둥에 묶어놓는 얘기들을 목청 크게 늘어놓는데 저 눈 하나 깜짝 않는 의연함이라니! 과연 프로다웠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거침이 없었다. 현재 귀족들의 사이에서 비모르는 공공연한 비밀로 취급받고 있었다. 네가 읽고 내가 읽는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 시침 뚝 떼고 살다 판이 깔리니 이리 활발할 수가 없다. 손짓하나에도 교양이 묻어나는 영애들이 가면하나 착용하고선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토해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가라, 내 욕망들!
이 얘기 저 얘기들이 순화 없이 돌아다니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때였다. 미지근해진 차로 목을 축이는데 중심인 언니가 입을 열었다.
“ 로즈님을 만나면 꼭 감사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 저한테요?”
“ 네.”
좌중이 조용해진다. 그녀는 듣기만 해도 귀가 즐거운 청아한 목소리로 차분히 자기얘기를 시작했다. 재작년 가을이었어요. 사냥대회가 있던 날이었죠. 그리고 나는 그 서두에 기시감을 느꼈다. 꼭 전에 들어본 것 같은데.
“ 매년 있는 대회였지만 ‘그 사람’이 참가한다는 소식이 들린 건 처음이었어요. 참가만 한다면 우승은 따놓은 것이라는 얘기도 함께 돌았죠.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었거든요. 저는 그에게 관심이 있었어요.”
어?
난 이제야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나의 둔함에 머리를 때리고 싶어졌다. 저 낯익은 백금발을 봤을 때부터 알아챘어야하는데. 나는 이 스토리를 들은 게 아니라 읽은 적이 있었다.
“ 전 본디 사냥대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비위가 약해 짐승의 시체를 보는 게 꺼려졌거든요. 그래서 잘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 날은 반드시 초대에 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를 보고 싶었으니까요.”
야수의 꽃 외전 ‘로젤리아의 사정’. 그 편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황녀언니!
“ 사냥대회의 순서는 오찬 다음이었죠. 전 오전에 딱히 할 일이 없어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간단히 차를 마시고 있었어요.”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2년 전의 황실주최 사냥대회. 무슨 변덕이었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케니스가 처음으로 참석한 그해 사냥대회는, 황녀의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호구사랑의 시발점이었다. 원작에서 황녀는 케니스를 보기위해 대회에 참석하게 되고, 그곳에서 케니스는 당연하다는 듯 우승을 거머쥔다. 그리고….
“ 그때 상대가 책을 한권 선물로 건네주었어요. 몹시 재미있으니 꼭 읽어보라는 말과 함께요. 대회의 시작까지는 시간이 꽤 있었기에 저는 그동안 책을 읽기로 했죠.”
진행되는 얘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작에서 저런 언급이 있었나? 뭐, 있었겠지. 읽어도 한참 전에 읽었으니 내가 그 내용을 전부 기억한다는 확신이 없었다. 후, 아무튼 다 아는 스토리지만 실제 본인의 목소리로 들으니 느낌이 새롭다. 이렇게 사냥대회를 시작으로 황녀의 애달픈 짝사랑은,
“ 그리고 전 그날 사냥대회에 참석하지 못했어요.”
꽃을 피우고…어?
“ 책의 다음내용이 너무 궁금했거든요. 도저히 읽는 걸 멈출 수 없었죠.”
네?
============================ 작품 후기 ============================
곱선생 너어어어ㅓㅓ어~~~~!ㅎ
+
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설이 쓰고싶어서 구들을 구상했지!
동생: 빡쳐서 두근거리는 것도 포함?
나: ...!
동생: 여주 뒤질까바 긴장돼서 두근거리는 것도 포함?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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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합 '도담도담'의 카페가 수요일 정식오픈을 했답니다 XD !! 7월 31일까지 인원을 받는다고 하니 함께하실 분들은 가입신청 콕콕 넣어주셔요 > < ☆ 나이제한은 99년생(고1. 열일곱)으로 제한이 하향되었으며, 놀러오시면 저와 다른 작가님들의 이런저런 이야기, 외전, 습작 외에도 팬픽(!)등을 보실 수 있답니다. 많이 함께해주세요 :D !
카페주소: http://cafe.naver.com/dodamwri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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