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3. 상석과 물고기 세 마리 =========================================================================
언제 귀택하려 했냐는 듯 냉큼 자리에 되앉아 실실거리는 내게 이벨린이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도서관을 좋아하나 봐요?” 던지는 질문에는 숨길 수 없는 의외라는 기색이 묻어있어 나는 제어되지 않는 내 표정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나 진짜 날아갈 것처럼 쪼개고 있나보네. 하지만 당장이라도 내 숨통을 끊고 싶어 안달났을 케니스가, 이벨린의 눈치를 보느라 나를 어쩌지 못하고 애타하는 몰골이 생각만 해도 통쾌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큭, 이런. 또 입이 제멋대로 찢어지는군.
난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철면피를 깐 채 “제가 책을 참 좋아해서요.” 라고 문학소녀마냥 대답했다. 사실 책을 좋아하는 건 맞다. 장르가 비모르 한정-좋아하는 걸 넘어 사랑한다-이라 그렇지. 이벨린은 내 답에 “저도 독서를 좋아해요.”하며 단아한 미소와 함께 맞장구쳤다. 그녀와 내가 좋아하는 책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학문용 고서와 에로스한 비모르-이 존재했지만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공통점이 있어 기쁘다는 말이나 날렸다. 괜히 업 된 기분이라 느끼한 윙크도 함께. 이벨린은 내 근본 없는 갑작스런 추파에도 당황하지 않고 잔잔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감동…역시 여주인공. 착해. 천사표야.
이벨린의 채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뭇 소설의 여주인공들이 그렇듯 그녀 또한 꾸미는 것에 딱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야말로 간단한 단장만을 마치고 시비에게 마차를 부탁했다. 나도 별로 치장에 신경 쓰는 성미는 아니어서-잘 보일 대상이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지만-인간적으로 너무한 내 곱슬머리가 단정히 땋여있는 것만 대충 확인한 채 그녀를 따랐다. 백작저의 마차는 나와 이벨린이 정문까지 향하는 그새 준비되어있었다. 이벨린의 친부에게 신세를 졌었다는 설정의 백작은 그녀한테 상당히 극진했는데, 그래서인지 준비된 마차는 희고 커다란데다 어찌 관리를 한 건지 윤기마저 반짝 흘렀다.
여기 마차담당에게 세차방법이나 좀 물어볼까-자작저 소유의 마차는 얘에 비하면 살짝 꼬질했다-고민하고 있는데, 이벨린이 난감한 기색으로 시비에게 뭐라뭐라 이야기를 건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 그렇지. 수수한 걸 선호하는 그녀의 성정 상 간단한 외출에 이런 마차를 타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일 터다. 나는 이벨린의 조금 고지식할 수도 있는 면모를 잠자코 지켜보다 이내 바뀐 자그마한 마차에 올라탔다.
다각다각 이동하는 동안은 딱히 할 게 없었다. 나는 앉은자리에서 발이나 까딱이며 창밖을 구경하다 돌연 ‘쿡쿡쿡…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이동수단인 마차라는 것인가? 드래곤의 딱딱한 비늘 위보다는 조금 푹신하군그래…큭큭큭.’ 따위의 정신 나간 상황극이나 지껄였다. 이벨린은 벌써 면역이 된 듯 내 헛소리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살풋 웃었을 뿐이다. 이런 저질 상황극에 웃어주다니, 거듭 생각하는 거지만 참 착해. 응. 마음이 하늘처럼 넓고 자애롭다.
내심으로 이벨린의 너른 이해심이나 칭송하고 있자니 도착이 금세였다. 애초 백작저에서 국립도서관까지는 그리 멀지않았다. 따지자면 걷기엔 멀고, 마차를 타기엔 가까운 애매한 거리랄까. 친절하게 입구까지 태워다준 덕에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크고 웅장한 도서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건물이 되게 높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이벨린과 함께 들어선 내부는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한층 광활했다. 복층으로 구성된 실내는 나선형의 계단으로 죽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어진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무미건조하게 책만 가득할거라 여겼던 상상과 달리 이곳저곳에 조형물이 장식되어 있었다. 뭐, 뭐야. 여기 왜 이렇게 예뻐. 나는 책을 좋아한다 어필했던 주제에 도서관을 처음 방문하는 모순적인 티를 팍팍 내며 이벨린을 졸졸 뒤따랐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향한 행선지는 아니나 다를까,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고서 코너였다. 현란한 상형문자들의 향연에 없던 편두통이 생기는 기분이다. 으윽, 저 괴상한 획들의 모임이 정녕 글자란 말이렷다. 나는 서재로부터 멀찍이-그래봤자 한 네댓 발자국-떨어져 이벨린이 책을 고르는 걸 멀거니 지켜봤다.
고서도 당연히 시대별로 나뉘었는데 시기가 이르면 이를수록 해당 문자의 기괴함이 높은 편이었다. 이벨린은 그중에서도 진정 그 시대에 살았던 게 인간이 맞는가싶은 수준의 고대어를 좋아했다. 그 설명도 어려운 문자를 보고 있노라면, 단순히 이벨린의 관심을 얻고자 저런 걸 공부한 황태자가 존경스러워질 따름이었다. 생선씨, 당신의 집념을 인정할게요.
나는 몇 분 지나지 않아 따분한 기분이 되어 케니스의 등장을 가늠했다. 얘가 언제쯤 나오려나. 마음 같아선 다른 층을 구경하다 내려오고 싶었지만 그 사이 아윈 때처럼 케니스가 홀랑 나타났다 홀랑 사라지기라도하면 낭패였다. 나는, 너를, 꼭 만나고 싶단다! 케니스야! 어디 있니!
내 염원이 통한건지 때마침 기다리던 케니스가 등장했다. 그는 꽤 떨어진 곳에서 막 이벨린을 발견한 눈치였다. 첫 만남의 그 어두운 와중에도 느꼈었지만 역시 황태자에게 꿀리지 않는 대단한 외양이었다. 이 거리에서도 감출 수 없는 미모가 눈에 들어온다. 하하, 잘생겨서 재수 없어. 미남이 짜증나기는 또 처음이다. 생각하는 그 사이 이벨린의 머리위로 책 한권이 떨어져 내렸다.
턱!
놀랄 새도 없이 케니스가 낙하하는 것을 잡아챘다. 뭔 저리 움직임이 빠르담. 그는 말 그대로 순식간에 이벨린의 지척으로 이동해 그녀를 보호했다. 반쯤 품에 안긴 이벨린은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이 역력한 기색이었다.
그런 이벨린을 내려다보며 케니스가 나직이 말했다.
“ …하마터면, 다칠 뻔했군.”
ㅡ하고 내뱉는 케니스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 나는 진심으로 내 눈을 찌르고 싶어졌다. 저 놈이 저런 대사를 하는데 멋지다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난 애써 케니스가 콧구멍에 팝콘을 꽂고 있던 몰골을 떠올리며 그의 멋짐을 상쇄시키려 노력했다. 나를 사생팬 취급했던 인간을 멋진놈으로 인식할 순 없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난 케니스가 영원히 내 맘속에 콧구멍남으로 남아있어 주길 바라며 둘에게 다가갔다.
“ 이벨린! 괜찮아요?”
“ 아, 라테.”
일부러 약간의 호들갑을 담아 말을 꺼내자 이벨린이 곧장 내게로 몸을 틀었다. 제 품에서 벗어나는 이벨린이 못마땅한지 미약하게 표정을 굳힌 케니스는 이내 날 발견하고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표정 없는 냉미남 다 죽었네. 어쩜 낯을 저렇게까지 찌푸리지. 케니스는 극명히 부정적인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그러다 지척에 딱 붙어있는 나와 이벨린을 번갈아 돌아본다.
“ 도대체.”
케니스가 짧게 뱉었다. 마디에 담긴 것은 의문이었다. 왜 둘이 함께 있냐는 뜻이겠지. 론드미오때와 달리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 나들이삼아 도서관에 같이 왔습니다. 친구라서요, 이벨린과 제가.”
“ …친구?”
“ 네! 친구.”
그의 반문에 씩씩하게 재답한 난 과시하듯 이벨린의 곁에 더 가까이 몸을 디밀었다. 케니스는 살다가 친구라는 단어가 이렇게 기분 더럽긴 처음이라는 얼굴로 하, 한숨을 뱉었다. 아, 아니 이놈. 한숨마저 남주인공스럽군.
말이 끊기고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 이글거리는 시선이 내게 닿았다. 당장이라도 내게 요단강 편도티켓을 끊어주고 싶어하는 그의 의지를 읽고 난 속으로 춤을 췄다. 꿈 깨렴, 케니스야. 넌 이제 내 목 위를 공중부양 시키는 건 포기해야한단다. 껄껄.
표나지 않게 내심으로만 깨방정 댄스를 남발하는데 그의 눈길이 한층 매섭게 변했다. 아니, 왠지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그냥 시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왕년에 판타지소설깨나 읽은 내가 판단하기에 이건 살기였다. 아이고 이놈이. 물고기가 내게 살기를 뿌렸어!
“ 이벨린, 각하께서 저한테 살기 뿌려요.”
난 주저 없이 냅다 고자질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0' 초록창 도전만화란에서 구들 만화버전을 만나보실 수 있어요!
Jin님께서 그려주신답니다. 신기신기. (존잘이에요 소근소근)
검색 고곡! r'-'r !!
+지금 구들 표지=만화 타이틀. 작품설정에서 크게 보실 수 있어요^0^!
++
뜰에 오시면 라테가 이벨린과 황태자를 구경하는 귀여운 그림을 보실 수 있습니당. 타레이아 님께서 그려주셨어요. 하트뿅뿅!
+++
써니서윤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0^!!!핫핫핫핫핫 짱좋 핫핫하핫핫!
++++
다음편이 좀 늦을 수도 있습니당....텀이 길어지면 아, 얘가 지금 욕하면서 과제하고 있구나 생각해주세요 ㅠㅠㅠㅠㅠㅠㅠㅠ시봉탱ㅠㅠㅠㅠㅠ구들쓰고싶다!!!쓰고싶다!!!!
+++++
댓글 읽다 빵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구들 때문에 팝콘사신 분도 그렇고 대쳌ㅋㅋㅋ꿈에 라테는 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