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는 몸을 일으키고 겨우 진정된 톤으로 말했다.
“당신이 진행하기 어려우면 우리 변호사를 시켜 서류 준비하라고 할게.”
수의 차림의 그가 돌아서는 순간,
“잠깐만요!”
아내의 주름진 손이 플라스틱 칸막이를 잡았다.
이 회장은 아직 물기가 남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해요.”
“다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대화가 오갈 줄도 몰랐다.
접견신청서에 적혀 있는 아내의 이름을 보는 순간, 오늘이 아내 얼굴을 보는 마지막 날일 거라 생각했는데.
“건강하게 지내요. 또 올게요.”
아내는 천천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제 환갑이 넘은 그녀의 모습 위로, 그저 사랑의 이름으로 숭배했던 젊은 시절 한 여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대체 내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남은 생애 무얼 해야 이 죗값을 치를 수 있을까?
*
공교롭다.
뜻하거나 예상치 못한 일에 우연히 맞닥뜨리는 경우를 뜻하는 말.
퇴근해서 간단하게 저녁을 차려먹고 결혼날짜를 정하려고 했는데, 한해가 별생각 없이 짚은 날짜가 공교롭게도 그날이었다.
꼭 1년 전 수진과 강이 결혼했던 날.
수진은 황당해하면서 되물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흡! 나 진짜 몰랐어.”
“농담이었다면 너무 독해. 선 넘었어.”
“아니라니깐. 정말 몰랐다니까.”
처음에는 첫 번째 결혼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지만 이제 수진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인간적으로 일주일 정도는 떨어뜨려놓자.”
한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날짜를 잡고 식장을 방문해 상담하고 청첩장도 만드느라 시간이 바쁘게 지나갔다.
한해는 회사에서도 새로운 사모펀드를 만드는 일에 투입되어 출근과 퇴근 사이의 시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도 하루 종일 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퇴근하려는데 팀장이 불러 세웠다.
“급해?”
입사 초기에는 딱딱하게 대하던 팀장이 이제는 제법 친해져서 거리감이 확 줄었다.
“괜찮습니다.”
“내 자리에서 잠깐 얘기 좀 하지.”
그는 사토시와 한해의 관계를 알면서도 여느 팀원들과 다르지 않게 그를 대했고 한해는 그런 태도가 고마웠다. 괜히 회장님이 아끼는 사람이라고 특별대우를 받긴 싫었으니까.
“보고서 보니까 LJ화학을 상당히 고평가해놨더라고. 매입 비율도 그렇고.”
팀장은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들고 한해를 쓱 쳐다보았다.
“이유가 궁금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난 지금 배터리 부문이 분리된 LJ화학 전망이 썩 좋아보이지 않거든.”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기업 분석을 좀 더 해보니 배터리 소재 부문은 여전히 LJ화학에서 전담하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안전하게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될 거라고 봤습니다. 그 외 석유화학 관련 제품들 매출도 꾸준히 상승세이고요. 지배구조도 아주 견고합니다.”
“그래? 음…….”
한해의 설명을 듣고 보고서의 지표들을 확인해 본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일리 있네. 오케이. 이렇게 진행하자.”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해가 꾸벅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팀장이 물었다.
“결혼 준비는 잘되냐?”
“네. 곧 청첩장 드리겠습니다.”
한해는 기분 좋게 자리로 돌아왔다. 이미 오늘 업무는 다 마쳤고 컴퓨터까지 끄고 나가려는데 책상 위에 놓인 편지봉투가 눈에 띄었다.
회사로 오는 우편물은 대부분 업무 관련된 것들이어서 하얀색 일반 편지봉투는 생경하게 느껴졌다. 내일 출근해서 뜯어볼까 하다가 보낸 이를 확인했다.
교도소 주소와 함께 ‘이태화’라는 이름이 손 글씨로 적혀 있었다.
이럴 수가. 도저히 내일까지 미룰 수 없는 편지였다.
한해는 봉투를 뜯고 정말 오랜만에 보는 손 글씨 편지를 읽었다.
한해 군에게.
불쑥 회사로 편지를 해서 놀랐겠지. 면회를 온 강이 녀석에게 주소를 물어봤더니 알려주더군.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첫 사과로 받아들여도 좋네. 그전에 내가 했던 사과는 진심으로 하는 사과가 아니었으니.
내 욕심과 야망을 채우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어. 자네와 수진이 아버님을 포함해서 말이지.
겨우 몇 년 교도소에 갇혀 있는 것으로 그 죗값을 치를 수는 없겠지. 일단은 거듭 사과부터 할 수밖에.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네. 나를 섣불리 용서하지 않은 자네의 현명함 덕분에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어.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랐던 기차를 멈추는 방법도 알게 되었어.
자네가 끝까지 나를 용서해주지 않아도 나는 할 말이 없어. 자네에게 너무나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니. 다만 우리 강이에겐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어주게. 자네를 무척 좋아하고 따르고 있으니.
용서해달라고 쓰는 편지가 아닐세.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고, 또 많이 변했다고 나를 봐달라고 하는 편지도 아니고.
선고심 재판에서 자네가 말했던 것처럼, 내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편지로 읽어줬으면 해. 그 이상을 말할 자격조차 없으니.
이곳에서 자네와 수진이를 위해 기도하겠네.
마음껏 행복하시게나.
편지를 다 읽은 한해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진심이 느껴지고 마음이 촉촉해지는 편지였다. 그렇다고 답장을 쓸 생각은 없었다.
다만 텔레파시를 보내듯 생각할 뿐이었다.
편지에서 느껴지는 진솔함이 거짓된 꾸밈이 아니라면, 죗값을 치르고 나오신 뒤엔 악수로 재회할 수 있을 듯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당신을 용서할 수도 있을까요?
강이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마침 오늘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으니까요.
.
.
.
오랜만에 이루어진 세 커플의 트리플 데이트였다.
몇 달 전 레오와 소월의 공연 뒤풀이 겸 술자리를 가진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생사를 오가고 재판이 열릴 정도로 충격적인 일들이었지만, 그간의 일들에 대해서는 서로 이야기하지 말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다만 다들 모이기 전에 한해는 강을 술집 밖으로 잠깐 불러냈다.
“아까 퇴근하는데 이 회장님에게 편지가 왔더라.”
“편지 쓰겠다고 하더니 결국 쓰셨구나.”
“많이 힘드실 텐데 잘 견디고 계신 것 같아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어.”
“응. 걱정 마. 가끔 가서 뵙는데, 요즘 어느 때보다 더 편안해 보이셔.”
“우리 사이를 걱정하시던데.”
한해는 강의 눈빛을 살피며 물었다.
“걱정할 필요 없는 거지?”
“뭐야. 남자끼리 그런 걸 물어보고.”
강이 피식 웃었고, 그의 시선에 어린 온기를 확인한 한해는 안심했다.
더 이상 물어볼 필요는 없겠네.
“그래! 들어가자.”
그는 강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술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 커플이 모두 모이자 수진이 청첩장을 나눠주었다. 둘이 결혼한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기에 놀랄 일은 아니었고 날짜와 장소를 확인했다.
“축하드려요, 언니. 과속으로 인한 결혼, 뭐 이런 건 아니죠?”
소월이 별 뜻 없이 말했고 수진도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맞아. 그래서 오늘 술은 못 마셔.”
“어머! 정말요? 대박!”
소월과 레오도 놀랐지만 강과 레이나 커플만큼은 아니었다.
“수진 씨. 정말이에요?”
“네. 요즘 트렌드 아닌가요?”
농담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레이나가 덥석 손을 잡았다.
“우린 정말 엄청난 운명의 공동체인가 봐요.”
“왜요?”
감정이 북받친 레이나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강이 나섰다.
“우리도 아기가 생겼어.”
이번에는 한해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뭐라고?”
“대체 축하할 일이 몇 개나 있는 거예요? 정신을 못 차리겠네. 적어가면서 들어야겠다!”
레오도 자기 일처럼 신이 났다.
“레이나 씨는 얼마나 되었어요?”
“이제 6주차예요.”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6주차인 것까지 똑같아?”
강은 혼자 술을 마시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러다가 같은 날에 태어나는 건 아니겠지?”
한해도 앞에 놓인 잔을 비웠다.
“왠지 그럴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든다.”
수진이 지니고 다니던 아기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녀석이에요.”
아기집 속에 보석처럼 간직되어 있는 존재를 보며 레이나는 탄성을 질렀다.
“정말 신기하네요.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녀석이 한꺼번에…….”
그녀 역시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던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녀석이 레이나 씨의 베이비군요!”
사실 아직 아기의 형체가 두드러지지 않아서, 같은 아기를 찍은 사진이라고 해도 구별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럼 두 분도…….”
소월이 별 생각 없이 물어보려다가 이 회장 이야기를 떠올리고 얼른 입을 닫았다.
레이나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희는 당분간 결혼할 상황이 아니어서 아기 낳고 좀 더 살다가 결혼할 생각이에요. 아기 안고 웨딩촬영 하려고요.”
그녀의 유쾌한 태도에 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레오가 잔을 번쩍 들었다.
“오늘은 정말 멋진 밤이네요. 저희도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웃음이 터졌지만 소월은 어이없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뭘 분발해. 하. 진짜 어이 상실이네.”
수진과 레이나는 잔에 물을 채우고, 나머지 사람들은 술을 채우고 함께 건배했다.
한해가 잔을 높이 들고 건배사를 읊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덟 명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기를!”
왜 여섯이 아니라 여덟인지 금방 못 알아차린 사람들도 뒤늦게 이해하고 잔을 비웠다.
“건배!”
맛있는 술과 음식, 다정한 눈빛과 웃음이 찰랑이는 밤이었다.
*
신랑 강한해 군과 신부 진수진 양의 결혼식은 바닷가 호텔에서 열렸다.
사회는 레오가 맡았고 축가는 이번에도 소월과 함께 부를 예정이었다.
그리 많지 않은 하객들 중 제일 앞자리는 강과 레이나의 차지였다.
하객들은 신랑 신부 입장을 기다리며 음료로 목을 축였다.
와인 잔을 든 강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몹시 특별한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대략 1년쯤 전에 있었던 자신의 결혼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결혼식의 신부가 그날의 신부였지.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흩뿌려져 있던 별들이 모여 별자리를 만드는 것처럼, 엇갈렸던 사랑은 제자리를 찾았어.
그는 옆에 앉은 레이나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는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했다.
미안한 만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다짐도. 머지않은 어느 날 너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주겠다는 다짐도.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그녀는 스르륵 입가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랑 강한해 군과 신부 진수진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레오의 맑은 음성이 식장에 울려 퍼졌다.
“신랑 신부 입장!”
웨딩마치가 흐르고,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진과 늠름하게 턱시도를 빼 입은 한해가 등장했다.
몸을 돌려 신랑신부를 본 레이나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와…… 수진 씨 정말 예쁘다.”
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수진아. 너는 오늘 훨씬 더 아름답구나.
일 년 전에 봤던 슬픈 신부의 얼굴이 지금 더없이 환한 신부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미안해. 잠시나마 너를 빼앗아서.
이제 너와 너의 진짜 사랑을 위해 평생 기도하고 응원할게.
꽃길 위에 선 신랑과 신부는 굳게 팔짱 낀 채 잠시 서로를 돌아보았다.
신랑이 신부에게 물었다.
“떨려?”
“응. 빨리 끝나고 신혼여행이나 갔으면 좋겠어.”
수진은 그들의 신혼여행지인 그리스 산토리니 섬을 상상했다.
벽과 지붕은 온통 하얀색이고,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눈이 멀어버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새파란 색인 섬.
창마다 드리운 커튼이 산들바람에 산들산들 불 거야.
하얀 시트가 깔린 푹신한 침대에 누워 우린 서로를 어루만지겠지.
입을 맞추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빨리 그 섬으로 가고 싶었다.
“믿어지지 않아.”
한해가 수진에게 속삭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밤, 이 순간을 꿈꿨는데.”
그의 마음이 목소리의 떨림으로 전해졌다.
수진 역시 심장이 요동쳤다.
“이 꿈을 먼저 꾼 사람은 나잖아.”
기억조차 아득한 오래된 꿈, 그저 꿈으로만 끝날까 겁이 나 수도 없이 되풀이 했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너른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 그들의 꿈을 잉태했던 곳, 미치도록 서로를 그리워하던 이별의 공간, 눈물겨운 재회의 무대였던 바다.
이제 푸른 바다는 새로운 인생의 희망으로 파도치고 있었다.
“사랑해.”
서로의 귀에 고백을 속삭인 둘, 아니 셋은 행진의 첫 발을 내디뎠다.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그들을 하나로 휩쌌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수 없어.
새로운 부부의 탄생을 축하하는 박수가 쏟아졌다.
하객들 틈에는 두 부부의 개인적 역사가라고 할 수 있는 야화도 자리했다.
그녀는 아낌없이 박수를 치면서 다음 소설의 주인공이 될 커플을 관찰했다.
흠. 이 결혼식 장면이 소설의 엔딩이 되겠지. 그건 분명해 보여.
그렇다면 소설의 시작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 년 전, 잘못된 결혼식을 앞둔 신부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불안한 심리를 토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꼈을 거야. 인생의 일부를, 사랑의 전부를 도둑맞았다는 불안감을.
행진하는 신랑 신부가 옆으로 지나간 뒤, 여전히 이어지는 하객들의 박수 속에서, 야화는 슬쩍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막 떠오른 아이디어가 사라지기 전에 메모장에 소설의 앞부분을 얼른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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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하죠? 결혼을 하루 앞둔 여자가 정신과 상담을 요청하다니.
그냥 다 털어놓고 싶어서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요.
선생님은 의사로서 환자의 비밀유지 의무가 있잖아요. 그렇죠? 그럼 안심하고 말씀드릴게요.
긴 얘기는 아니니 10분만 들어주시면 돼요. 딱 10분.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전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동해안에 있는 울진이라는 곳, 들어보셨어요?
맞아요. 대게로 유명하죠. 원자력 발전소도 있고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전에 형성된 동굴 성류굴도 있죠.
하지만 제일 멋진 건 바다예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이 시리고 마음이 시려서,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바다죠.
저는 그토록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어요.
아빠는 고깃배를 탔고, 그 배의 선장님이 바로 옆집에 살았고요. 그 집에는 저보다 두 살 많은 오빠도 있었죠.
‘한해’라는 한자 이름이 있었지만 제가 늘 바다 오빠라고 불렀던 그 오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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