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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88화 (88/92)

88화

선택의 기로에 선 이 회장의 입술이 꾹 다문 채로 달싹였다.

“아버지…….”

강이 애원하고 나서야 마침내 그 입술이 열렸다.

“어림없는 소리.”

단호한 한 마디에 두 청년의 가슴은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나도 그때를 기억하지. 자기들이 자기 발로 도박장을 들락거렸는데 왜 내가 사과를 해야 하나?”

이 회장은 마을에 도서관이라도 지어준 사람처럼 당당했다.

“불법 도박장을 개설한 건 회장님 아닙니까?”

“무슨 소리.”

“전혀 관계가 없다고요? 증인이라도 부를까요?”

“아는 사람이 도박장을 열었지. 나는 합법적인 금융 회사를 만들어 소액 대출을 해줬을 뿐이야.”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그런 도박판이 생기지도 않았겠지요.”

“한해 군. 내 말 잘 듣게.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남 탓을 하는 거야.”

사과를 구하던 이 회장의 태도는 훈계하는 말투로 바뀌었다.

“자네 말대로 내가 아니었다면 자네 고향에 도박장을 열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렇다고 자네 아버지와 수진이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게 내 탓이라고 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야.”

“마약이나 도박을 그저 퍼뜨리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후유증을 불러온다는 거, 모르십니까?”

“나는 사업가야. 사업가가 사업을 했다는 이유로 사과를 해야 하나?”

“전혀 미안하지 않으십니까?”

이 회장은 한참 한해와 마주 보았다.

“그래. 사과하지. 그 일에 대해서도. 자네가 그렇게 내 사과를 원한다면.”

“이런 식의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한해 군. 패배자의 길을 가지 말게. 성공하는 사람의 길을 가야지. 나를 적으로 두지 말고 친구로 두는 건 어떤가? 자네도 전업투자자로 꽤나 재능이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도와주면 사업을 훨씬 더 크게 키울 수 있을 테고.”

수많은 적들과 싸우고 협상하고 굴복시키고 때론 배신하며 사업을 키워온 이 회장은 은근슬쩍 한해에게 화해를 넘어선 동업을 제안하고 있었다.

한해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그는 장광설을 계속 이어갔다.

“과거와 감정은 기업가가 가장 경계해야 할 두 가지야. 결정적인 기회가 왔을 때, 과거와 감정 그 두 가지가 발목을 잡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한해는 잠시 이 회장의 시선을 피하고 차로 입을 적셨다.

“저 같은 풋내기를 친구 운운하며 인정해주신 점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안은 거절합니다.”

“이유는?”

“회장님의 철학에 동의할 수 없으니까요.”

이 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회장님만큼 성공한 분을 알고 있는데요. 그분은 과거와 감정을 인정하면서도 사업은 사업대로 잘 키우셨어요.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한해는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섰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회장님이 끝까지 변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나가려는 그의 앞을 강이 막아섰다.

“형, 조금만 더 있다가 가.”

강을 마주한 한해의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미안하다, 강아.”

그는 스치듯 강을 지나쳐 방에서 나갔다.

강은 한참 그 자리에 서서 부르르 주먹을 떨었다.

“왜 그러고 섰어?”

등 뒤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음성에 그는 돌아섰다.

“꼭 이렇게 하셔야 했어요?”

“사과도 했고 제안도 했고……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냐?”

“아들인 저조차도 사과도 느껴지지 않았는데요?”

“이런 머저리 같은 자식.”

이 회장은 참고 있던 분노를 터뜨렸다.

“내가 아니라 네놈이 저 녀석을 혼내줬어야지! 네 마누라를 훔쳐간 놈이야! 그런 놈을 형이라고 부르며 위해줘? 배알이라는 게 있긴 하냐?”

강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는 일은 제겐 불가능하군요. 아버지가, 제가, 수진이와 한해 형한테 얼마나 잘못을 했는지 아무리 말씀드려도…….”

“이 녀석이 감히!”

강은 멀리서 다가오는 운명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저 끝까지 자식의 도리를 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던 이 회장의 표정에도 변화가 있었다.

녀석…… 이런 표정은 처음이군. 내가 죽을병에 걸린 아버지를 보는 아들 같잖아.

잠깐만. 한해 녀석에게는 과거와 감정에 발목 잡히지 말라놓고, 내가 정작 고집을 부르고 있는 건가?

경직되어 있던 그의 어깨가 힘이 빠지며 축 내려앉았다.

*

첫 번째 공판이 열리는 날 아침.

너른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수진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금방 샤워를 마친 그녀는 옷장 앞에 서서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했다.

특별한 자리를 위한 옷을 골라야 한다.

그녀는 잠시 후 검사 측 증인으로 채택되어 증언을 할 예정이었다.

대부분 출근할 때 입는 옷들 중에서 이것저것 들어보다가 결국 검은색 투피스 정장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한해의 옷이 문제였다. 거실로 나온 그를 보고 수진은 입을 딱 벌렸다.

“오빠…… 옷이 그게 뭐야?”

크림색 티셔츠에는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 있고 주위로 핏빛 얼룩이 선명했다.

“그날 입었던 옷.”

“아니 그걸 왜 안 버리고 있었어?!”

“오늘 입으려고.”

한해는 씩 웃으면서 덧붙였다.

“한 번 빨긴 했어.”

당장 갈아입으라고 말하려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극적인 효과는 있겠네.”

“그래도 법원이니까 재킷은 걸치고 가야지. 가자.”

한해가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법원으로 향했다.

봄기운이 거리마다 흩날리고 있었다. 두꺼운 겨울옷을 벗은 사람들은 표정도 한결 가벼워 보였다.

곧 재판이 시작될 예정인데도 수진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 계속 고민했다.

하필 재판 전날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어서 아직 얘기를 못 꺼내고 있었다.

아기가 생겼다. 우리 사랑의 결실이 생겼어.

그녀는 차마 고개 돌려 한해를 보지는 못하고, 창에 비친 한해의 옅은 실루엣을 손끝으로 만졌다.

‘당신도 좋아할까? 우리를 반반씩 담은 생명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면?’아무래도 오늘 첫 공판을 끝내고 말해주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무슨 생각해?”

한해의 목소리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

“아냐. 아무것도. 봄이 오니 좋아서.”

“오늘 재판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 꼬인 운명의 마지막 매듭. 그리고 우리에게도 완연한 봄이 왔으면 좋겠어.”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멈추자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어루만져주었다.

절로 미소를 부르는 좋은 느낌. 그녀도 그의 뺨에 손을 갖다 대었다.

어젯밤에도 셀 수 없이 여러 번 키스를 나누고 꿈같은 밤을 보냈다. 다만 그녀의 마음은 보통 때와는 조금 달랐다.

이제 둘이 아니라 곧 셋이 될 테니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반만큼이라도 우리 아이를 사랑해준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가 될 거야. 분명히 그 이상일 테지만.

전날 밤의 기억까지 소환해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힐긋 그녀를 훔쳐본 한해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수진. 너 오늘 좀 이상해.”

역시 알아차렸네. 당신은 세상에서 나에게 관심이 제일 많으니까.

이제 그 관심을 다른 존재에게도 좀 나눠줘야 할 테지만 서운하지 않을 거야.

“재판 때문에 그렇겠지.”

그녀가 둘러대었고 다시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한해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10분쯤 더 달리다 보니 멀리 법원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기어에 슬쩍 걸쳐 있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잘될 거야.

.

.

.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평범한 형사 재판의 모습이겠지만 그들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기구한 인연이라고 한탄할 법했다.

한때 부부였던 사람, 시아버지와 며느리였던 사람, 그리고 바닷가 마을의 꼬마와 이방인이었던 사람, 죽이려고 했던 자와 죽을 뻔했던 자가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직선이 아니라 비선형적으로 얽혀 있었다.

피고인 석에 이태화 회장과 주호영이 앉고 그 곁은 변호사들이 지켰다.

검사는 상당히 젊은 나이로 보였는데 금속 재질의 안경을 써서 그런지 인상이 날카로웠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수진은 이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목례를 했지만 이 회장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슬쩍 눈을 피했는데도 여전히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 시아버지가 약혼할 남자를 살인청부한 사건이라니.

세상은 넓고 수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재판이 열리겠지만, 이런 재판이 또 있을까 싶었다.

“수진 씨.”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야화 작가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소설에 꼭 쓰고 싶다면서 굳이 방청을 오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왔다.

“아, 오셨어요?”

야화 작가는 한해와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수진은 방청석 뒤편에 앉아 있는 강과 레이나 커플과도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잔뜩 긴장한 분위기였다.

차마 인사할 기분이 나지 않아 그냥 고개를 돌렸다.

흰머리가 반 이상 덮여 지긋한 나이로 보이는 판사가 법정 안으로 들어오자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동 기립!”

장내를 정돈한 판사는 검사 측과 피고 측으로 시선을 한 번씩 준 뒤 입을 뗐다.

“지금부터 서울중앙지방법원 209호 강한해 씨 살인미수 사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합니다. 피고인 출석했나요?”

“네.”

이 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정 신문이 이어진 뒤 검사가 기소 요지를 읊었다.

“본 사건 기소 요지는 공소장에 기재된 죄명, 적용 법조 공소사실 기재와 같습니다. 공소사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피고인은 공범인 주호영을 교사하여 강한해 씨를 살해하려 했습니다. 명백한 계획 후에 저질러진 범죄로 인해 피해자 강한해 씨는 중상을 입었고 오랜 기간 입원치료를 한 뒤에야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검사는 범죄에 적용된 법 조항을 알려준 뒤 이 회장을 응시했다.

“피교사자이자 공범인 주호영이 피해자와 합의하고 탄원서를 받은 것과 달리 피고인 이태화는 끝내 피해자와 합의에 이르지 못했으며, 피해자는 여전히 피고인을 엄벌에 처하고자 함을 밝힙니다.”

복잡한 재판이 아닌 만큼 진행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검사 측의 첫 번째 증인은 수진이었다. 그녀는 선서를 하고 증인석에 앉아 검사의 질문을 받았다.

“증인은 피고인과 관계가 어떻게 되죠?”

“저는 피고인의 며느리였습니다.”

“증인과 피해자 강한해 씨와의 관계는요?”

“약혼한 사이입니다.”

“피고인이 증인과 강한해 씨 사이를 이혼 전부터 의심했습니까?”

“네. 저에게 말한 적도 있고 미행이 의심되는 정황도 있습니다.”

그때 피고인 측 변호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 있습니다! 증인은 증거가 없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판사는 변호인의 이의를 인정했다.

“미행에 관련된 증언은 무시하겠습니다. 증인은 본 법정에 제출할 수 있는 증거가 없는 사실에 대해서는 단정지어 진술하지 마세요. 계속하세요.”

그녀는 이 회장이 확실한 의도를 갖고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려고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피고인 측 변호사도 그녀를 심문했는데, 의외로 외도와 관련한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그 점을 부각시키면 오히려 범죄의 고의성이 짙어질 것을 염려한 것 같았다.

무난하게 증언을 마친 그녀가 내려오고 재판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 회장의 변호인은 부인할 수 없는 것들은 포기하고 최대한 형량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어 변론을 진행했다.

“행위가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점은 정말 유감이지만 저희 피고인은 홧김에 피해자를 혼내줄 생각을 했던 거지 살인을 저리를 의도까지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지호영 측에서는 반박했다. ‘없애버려라’는 정확한 표현까지 말했으며 둘 사이에 오갔던 이야기를 녹음한 파일도 증거로 제출되었다.

이 회장의 변호인은 의뢰인과 지호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괜히 지호영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더 큰 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는 것도.

그런 상황에서 이 회장을 변호해야 했기에 변론의 여지가 상당히 적었다.

“청부를 받은 지호영 씨 입장에서는 그렇게 오해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그러나 저희 의뢰인은 분에 이기지 못하고 청부를 한 것이지 정말로 반드시 피해자를 살해해야겠다는 의도는 명확치 않았다는 점을 재판관님께서는 꼭 헤아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판사는 가볍게 한숨 쉬었다.

“피고인의 살해의도가 명확치 않았다는 점을 헤아려달라 했는데…… 지금 제출된 증거만 보면 살해 의도가 명확해 보입니다. 변호인의 주장을 추가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럼요. 아직 증인이 남아 있습니다.”

변호인은 애써 여유 있는 척하려 했지만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피해자이기도 한 한해는 검사 측의 마지막 증인으로 증언대에 섰다.

그는 검사의 질문에 따라 사건 당일의 정황을 설명하고 이 회장과의 뿌리 깊은 악연에 대해 진술했다.

“저와 피고인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 15년 전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검사의 리드에 따라 침착하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찬찬히 듣고 있던 판사가 물었다.

“오늘 재판을 시작하기 전부터 제가 갖고 있던 궁금증이 있습니다. 증인은 공범인 주호영에 대해서는 합의를 해주었는데 피고인에 대해서는 끝까지 합의를 하지 않았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한해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막상 저에게 칼을 들이댄 사람에게도 합의를 해주고 탄원서를 써줬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죠.”

그는 몸을 곧추세우고 판사를 마주보았다.

“저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세 단계를 차례로 거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사과하고, 진정으로 반성해야 한다고요.”

그는 손가락을 꼽으며 설명했다.

“주호영 씨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도 했고 반성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단계를 건너뛰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사과하려 했습니다.”

그는 이 회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변호인이 말한 것과 달리, 피고인이 사과를 하겠다고 찾아왔을 때도 저는 조금도 진정한 마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고 티셔츠에 난 구멍을 판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날 아침에 저를 찌른 사람은 주호영이 아니라 이태화 회장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한해의 의상을 보고 판사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검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심문을 마쳤다.

“이상입니다.”

증인석에서 내려오면서 한해는 잠시 멈추어 이 회장을 마주했다.

보입니까?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변했어요.

어제가 오늘을 이길 수 없듯이, 악이 선을 이길 수 없듯이, 당신은 나를 이길 수 없어요.

당신은 이제 그 무엇도 나에게 뺏을 수 없어요.

.

.

.

피고 측에서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증인도 몇 되지 않는 터라 재판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관건은 이 회장의 살해의도가 끝까지 유지되었는지, 그리고 반성의 기미가 얼마나 보이는지, 판사가 판단할 일이었다. 변호인들의 변론도 최대한 그 두 가지 방향에 맞춰 진행되었다.

검사는 주호영에 대해서는 징역 5년, 이태화 회장에 대해서는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일주일 뒤 선고가 있을 예정이었지만, 집행유예가 나오지 않으면 이 회장 측에서는 항소할 것이 뻔했다.

법정을 빠져나오기 전, 한해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강과 마주쳤다.

강은 소금기둥처럼 굳어버렸고, 한해 역시 몸을 죄어오는 불편하게 기운을 느꼈다.

“지켜보느라 힘들었지?”

강은 입술을 꽉 물고 가만히 있었다.

“너랑은 정말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는데. 과거의 뒤엉킨 악연은 이번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난 너를…….”

“그만해, 형.”

강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만. 오늘은 무슨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아.”

“그래. 그렇겠지.”

“먼저 갈게.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셔서.”

강은 한해를 놔두고 화장실을 나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한해는 자문했다.

강한해. 다른 방법이 있었나? 어쩔 수 없었던 거 맞지?

그는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진이 다가왔다.

“금방 강이 오빠랑 만났어.”

“응. 나도 화장실에서 잠깐 인사했어.”

잔뜩 굳은 그의 얼굴을 보고 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또 신경 쓴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그래. 이젠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는 애써 웃고는 수진의 손을 잡았다.

“재판도 끝났는데, 술 한잔할까?”

.

.

.

한해와 수진은 법원에서 멀지 않은 식당에 들어왔다.

밥 때가 아닌 늦은 오후 시간이라 손님은 둘밖에 없었다.

“이제 끝났다! 오늘은 취하도록 마셔야겠어.”

한해가 호기롭게 소주병을 땄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수진에게 따라주려는데,

“오빠. 나 오늘 술 못 마셔.”

그녀가 잔을 치웠다.

“왜? 몸이 안 좋아?”

재판이 끝나고 후련해 보이던 한해의 얼굴에 금방 걱정이 스며들었다.

수진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속으로 물었다.

당신의 반응이 너무나도 궁금해.

기뻐했으면 좋겠어. 나만큼 행복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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