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결국 이 녀석인가?
이태화 회장은 아들의 집무실 앞에서 운명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는 운명론 따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의지박약인 인간들이나 운명을 운운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목에 칼날이 드리워진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닌 친아들이 칼자루를 잡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운명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릴 수밖에.
이미 다른 가능성은 다 확인해봤다. 아마도 아들 강일 것이다.
머리로는 결론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니기를 바랐다. 그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기를 바랐다.
불쑥 찾아간 탓에 비서가 당황한 사이 그는 강의 집무실 문을 직접 열었다. 그런데 치밀하고 처절한 복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장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과 레이나는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던 중이었다. 무릎 위에 앉아 뜨거운 키스를…….
세 사람은 말도 움직임도 없이 굳어 있었다. 그나마 레이나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강의 무릎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버님.”
그리고 꾸벅 인사했지만 이 회장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오늘따라 불쑥 찾아오는 분들이 많네요.”
강은 여유를 보이며 일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버지.”
“아버지? 네가 나를 아버지로 여기긴 하냐?”
이 회장은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해 거칠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요. 누가 뭐래도 아버지죠.”
“둘이서 얘기를 좀 해야겠는데.”
강은 레이나에게 눈짓했고 그녀는 순순히 물러났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버님.”
그녀는 공손히 인사하고 집무실에서 나갔다. 강에게 사랑스러운 손 키스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고.
무심한 행동 같이 보였지만 이 회장은 둘의 작은 몸짓과 표정까지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속이고 있다고 의심하면서.
그는 아들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마실 거 준비할까요?”
“됐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화라도 한 통 해주시지.”
“저 아이하고는 어쩔 셈이냐? 집무실에까지 불러서 애정 행각을 해?”
“집무실에 부른 건 아니고요. 근처를 지나가다가 그냥 들렀다고 합니다.”
“내 아들이 계집애 치마폭에 푹 빠질 줄이야. 수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고 있고?”
“얼마 전에 만났습니다.”
“뭐라고? 어디서?”
“한해 형 병원에 문병을 갔다가 만났습니다.”
“넌 자존심도 없냐? 네 아내를 뺏어간 놈한테 문병까지 가?”
“형이 제 아내를 뺏은 게 아니라 그 반대죠. 제가 뺏었다가 형이 되찾은 겁니다.”
“우정이 눈물 겹네.”
이 회장이 비꼬는 말에 강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이 회장이 왜 방문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예상하고 있던 방문이었고 마음의 준비도 했다.
아버지의 심리전에 휘말려서는 안 돼.
“이렇게 배알 없는 녀석으로 키우지는 않았는데.”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들과 대화를 나눈 지 10분도 되지 않았지만, 이 회장은 단단한 방패로 둘러싼 대열이 절로 연상되었다.
녀석은 나의 도발을 철저하게 막아내고 있어.
그는 방법을 달리하기로 결심했다.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넌지시 물었다.
“네 어머니하고는 가끔 연락하냐?”
강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어머니 이야기는 왜요?”
“연애질만 하지 말고 가끔 안부나 물어보라는 얘기다.”
“정말 뜻밖이네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챙기다니.”
맞닿은 둘의 시선에서 불꽃이 튈 것 같았다.
이 회장은 이런 식으로는 강의 방패를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어머니가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다. 며칠 전부터 안 보여.”
“가출이라도 하셨단 얘깁니까?”
“가출인지 납치인지 모르지.”
“매일 집에만 계시는 분이 납치를 당할 리 없잖습니까?”
“가끔 산책도 나간 모양이던데?”
“납치를 했다면 납치범이 연락하지 않았을까요?”
“음…….”
이 회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
“전혀 놀라지 않는구나? 어머니가 사라졌다는데.”
“놀라긴 했습니다. 이렇게 오래 어머니가 버틸 줄은 몰랐으니까요.”
“뭐라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한 짓을 생각해보면 도망쳐도 벌써 도망쳤어야 하지 않을까요?”
평소 같으면 아들 멱살이라도 잡아야 할 상황이었지만 이 회장은 화를 내는 대신 강의 표정을 살폈다.
점점 짙어지던 의심이 완전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네가 빼돌렸냐?”
“빼돌리다니, 물건 취급을 하시는 겁니까?”
“네가 숨겨놓고 있는 거야? 응?”
강은 가여운 시선으로 아버지를 응시했다.
“그러고 싶네요. 할 수만 있다면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싶습니다.”
이 회장은 꽈득 소리가 나게 이를 물었다.
너구리 사냥을 운운하면서 끔찍한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이 강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이 녀석이 자기 어머니를 데리고 간 건 확실해.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리 침착할 수 있어?
“네 엄마한테 집에 들어오라고 해라.”
“이제 어머니를 놔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자식이 되어서 부모보고 이혼을 하라는 거냐?”
“네. 그 편이 두 분 모두 훨씬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다음은?”
“저는 두 분께 각자 자식의 도리를 다할 겁니다. 아, 이 말은 너무 건방지네요.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식의 도리가 뭐냐?”
강은 이번만큼은 전략이 아닌 진심으로 대답했다.
“점점 늙고 약해지는 부모님이 건강하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거겠죠.”
“나한테도 해당되는 얘기냐?”
강은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가 지금이라도 남을 짓밟으며 이기는 삶이 아니라 함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요.”
“건방진 놈이 제 아비를 가르치려 들어?”
이 회장은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냐? 이상한 메시지를 보내는 녀석이?”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강한해를 살해하려고 청부살인을 사주했다면서, 나보고 자수를 강요하는 놈이 있어. 만약 그게 너라면…… 너는 지옥에 떨어질 거다. 천륜을 어기고 부모를 팔아먹는 자식이 받을 벌은 천벌밖에 없으니까.”
강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네 엄마가 그러더냐? 내가 한 짓이라고?”
“그렇습니까? 아버지가 한 짓입니까?”
그의 집무실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숨 막히는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강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질문이었다.
“14년 전의 그 일도 아버지가 한 짓입니까?”
“!”
“한해 형의 아버지, 그리고 수진이의 아버지가 함께 타고 나갔던 배 말이에요. 태풍이 경로를 바꾸었다는 무전을 받고도 노련한 뱃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석연치 않았잖아요.”
이 회장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의 눈썹은 따로 살아있는 곤충처럼 꿈틀거렸다.
“혹시 무전 장치에 무슨 짓이라도 하셨나요? 아니면 아예 무전을 보내지 않게 하셨나요?”
“그런 일을 내가 무슨 수로 하느냐.”
“아버지 왜 이러세요? 그즈음에는 아버지 사업이 다시 일어났잖아요. 작은 항구 마을에서 아버지는 제일 부자였고, 습관처럼 건물도 사고 배도 사고 하셨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뭔든 못하셨겠어요?”
“그만해라.”
“게다가 이런 말을 먼저 꺼내신 것도 아버지예요.”
“내가?”
“수진이와 이혼하려고 했을 때 그러셨잖아요. 수진이가 우리 집에 함께 살게 된 일이 그저 우연 같으냐고.”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네. 그 옛날 일을 갑자기 왜 다시 꺼내는 거냐?”
“너무 궁금해서요.”
“뭐가?”
강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제가 아버지를 과연 용서할 수 있을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이 회장은 끝내 실토하지 않았지만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졌다. 이 녀석에게 졌어.
*
“젊은 나이에 워낙 체력이 좋아서인지 무척 회복이 빠른 편입니다. 퇴원도 예정보다 더 빨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담당 의사가 흡족해했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한해는 공손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병실을 떠나려던 의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간호사들이 몹시 부러워하더라고요.”
“네?”
“여자친구분하고 두 분이 너무 좋아 보인다고.”
“아…… 예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상처도 더 빨리 아무나 봅니다.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겠지만 우리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답니다.”
의사는 기분 좋은 말을 남기고 병실을 떠났다.
한해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구경했다.
겨울 햇살은 맑고 심지어 따뜻해 보였다. 수진이가 함께 있다면 같이 산책을 나가자고 했을 텐데.
휴가가 끝나고 직장으로 돌아간 그녀는 오늘도 퇴근하고 온다고 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혼자라도 나가볼까?”
지난주까지만 해도 휠체어 신세였지만 이번 주부터는 보조기구를 밀면서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몸을 완전히 곧게 펴지는 못했고 속도를 올리면 배가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나아지는 느낌이 좋았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혈압을 체크하러 온 간호사인가 싶었는데 강이 들어왔다.
오후 네 시의 병문안이라니!
한해는 반가움을 슬쩍 숨기고 놀리듯 물었다.
“뭐냐. 이 시간에. 일 안 해?”
“근처 지나다가 들렀어.”
“마침 잘됐다. 산책하려던 참인데.”
“그래. 나가자.”
강은 한해가 일어나 보조기를 잡을 수 있게 부축해주었다.
그들은 천천히 병원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니 나른해져 있던 세포들이 정신 차리고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느리긴 해도 내 발로 걷다 보니까 다시 사람 된 것 같아.”
“형은 금방 뛸 수도 있을 거야.”
“몸이 흐물흐물해져서 큰일이야. 빨리 운동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다.”
한해의 걷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강은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 만났어. 찾아오셨더라고.”
“드디어 오셨구나. 뭐라고 하셔?”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아. 협박을 하는 사람이 나인지 아닌지 캐보려고 했고. 아마 확신을 못 하고 가셨을 거야.”
한해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난 그대로 받아들일 거야. 내 마음도 반반이니까.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마음이 반. 그래도 아버지니까…… 견디기 힘든 벌을 받게 되실까 봐 두려운 마음.”
“이해해. 당연히 그렇겠지.”
“아버지가 자수를 하든 그렇지 않고 수사 끝에 기소가 되든 간에…… 아버지는 막강한 변호인단을 동원할 거야.”
“예상하는 바야.”
“지금부터 형한테 하려는 이야기는…… 자식으로서는 해선 안 될 말일 수도 있어.”
강은 벤치에 한해를 앉히고 옆에 앉았다.
“아까 아버지가 그러더라. 부모를 팔아먹는 자식이 받을 벌은 지옥에 떨어지는 천벌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천벌 받을 각오를 하고 이 얘기를 하는 거야.”
“또 뭔데 그래?”
“형의 아버지, 그리고 수진이의 아버지 말이야. 태풍 때문에 배가 난파되어 돌아가셨지?”
한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 사고에도 아버지가 개입되어 있을지 몰라.”
한해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천천히 불어오던 바람마저 숨죽인 듯 뚝 멈춰버렸다.
“이번에는 증거 따윈 없어. 다만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마치 말실수처럼 아버지가 내뱉은 말이야.”
“뭐라고…… 뭐라고 하셨는데?”
“세상 모든 일이 다 우연인 것 같으냐고 나한테 물었어. 수진이가 서울로 올라와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된 일이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어.”
땅이 꺼져버리는 현기증 때문에 한해는 아직 다 낫지 않은 복부의 통증마저 잊었다.
지금까지 그가 견뎌온 세월을 통째로 부정하는 충격이었다.
“이강……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 알아?”
“알아. 잘 알지. 그러나 이번에는 증거는 없어. 다만 이미 내 마음에 들어와 굳어버린 의심뿐이야.”
한해는 언어를 도둑맞은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형에게 숨기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저 자식으로서 용서를 구할 뿐이야.”
한해의 흐린 시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다들 이렇게 사나? 이렇게 삶과 죽음을 오가고, 케케묵은 비밀에 발목을 잡히고, 분노의 불씨를 끝내 잡지 못하며 살아가나?
“미안해, 형. 원수의 아들이어서 미안해.”
강은 한해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뿌리칠 힘도 강에게는 없었다.
그는 오래전에 하늘로 거처를 옮긴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다.
아버지. 저한테 이 죄를 용서해줄 권한이 있기나 할까요?
당신의 아들로서 저는 어떡해야 하나요?
*
이태화 회장은 일주일째 혜영의 집에서 머물렀다.
아무도 그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칼날에 둘러싸인 긴장과 공포에 짓눌린 채로 지냈다.
그를 협박하는 사람이 아들이라고 해도, 아내라고 해도, 한해라고 해도, 며느리였던 수진이라고 해도…… 그 누구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 의문의 메시지가 날아든 건, 불면에 시달리던 육체가 견디다 못해 잠에 빠져들던 순간이었다.
-아직 자수 안 했네? 협박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그는 자동적으로 공손한 말투가 나왔다.
-기다렸습니다.-오홋! 그것참 놀라운 일이네. 나보고 협박을 한다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제가 자수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경찰에 신고해야지. 강한해 피습 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다고.-결국 그럴 생각이었군요.-이봐요, 회장 아저씨. 간단한 계산이잖아요. 자수하면 광명은 못 찾아도 감형은 찾아요. 하지만 신고로 잡히면? 자수하면 찾아먹을 수 있는 감형이 날아가고 형량이 늘어난다고요. 이 회장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살면서 최선의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상대는 종잡을 수 없게 또 존댓말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차선책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경우도 별로 없어요. 우리가 강요받는 선택의 대부분은 최악과 차악 사이의 고민이에요. 지금 회장님이 들고 있는 두 개의 카드처럼 말이죠. 사람들은 차악을 택하는 일이 두려워 머뭇거리다가 엉겁결에 최악의 카드를 내곤 하죠. 그게 인생을 꼬이게 만들고요. 이 회장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생의 냉혹한 진리였다.
-알겠습니다. 자수하겠습니다.-역쉬! 잘 생각하셨어요. 언제?-내일?-굿굿!-딱 하나 아주 작은 조건이 있습니다.-말해봐요.-당신이 누군지 꼭 알고 싶습니다.-그게 뭐가 중요해요? 당신이 자수하면 난 다신 당신한테 연락할 일도 없단 말이야.-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 때 심정을 알겠어요. 당신이 누군지 확인해야…… 감옥에 갇히더라도 그건 확인해야겠어요.-후회할 텐데.-후회하지 않습니다. 상대는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이 회장의 손이 후들거렸다.
“무슨 일 있어요?”
옆에 누워 있던 혜영이 물었지만 이 회장은 대답할 정신도 없이 액정만 쏘아보았다.
마침내 답이 왔다.
-오케바리. 꾹 참고 있던 한숨이 으흐흑 기침처럼 터져 나왔다.
*
악취미라고 말할 수밖에.
놈이 잡은 약속장소는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성동경찰서 맞은편 카페라니.
해코지를 할 수 없게 하려는 의도라면 한참 잘못 짚었어. 난 이미 내려놨으니까.
이 회장은 최악이 아닌 차악의 선택을 결심하고 이미 변호사도 준비시켜놓은 상황이었다.
부장판사 출신의 전관 변호사는 실형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방어논리를 잘 세우고 인맥을 동원해 집행유예를 끌어내보겠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해자인 한해와의 합의도 반드시 필요했다.
이태화 회장은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고 출입구만 쏘아보고 있었다.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이 곧 들어올 것이다.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그는 움찔했다. 팔짱을 끼고 힘을 너무 오래 주고 있어서 어깨가 뻐근해질 때쯤, 누군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래 기다리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