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69화 (69/92)

69화술잔이 무척이나 빨리 돌았고, 주량이 약한 사람들은 벌써 취했다.

한해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신나서 오가던 말들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한해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자리를 빌려서 고백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고백이라는 말에 술에 취했던 소월도 눈을 반짝 떴다.

“이 고백은 저와 레이나 씨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둘만 아는.”

그는 옆에 앉은 수진의 손을 부드럽게 끌어 잡았다. 약지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느끼면서.

“보름쯤 전이었나요? 레이나 씨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프러포즈를 하고 싶은데 제가 이런 이벤트 같은 것에 대해 모른다고. 레이나 씨가 제일 잘 알 것 같아서 물어본다고.”

수진이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레이나 씨는 정말 자기 일처럼 조언을 해줬습니다. 최고의 다이아몬드 반지들도 추천해줬고요.”

레이나가 이어서 말했다.

“제가 해드린 게 뭐 있나요. 프러포즈의 90퍼센트는 그 사람의 진심이죠. 게다가 반지를 고르는 안목도 얼마나 세심한지.”

수진은 왠지 뭉클해졌다.

그냥 대충 검색해서 고른 반지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신경 써서 준비한 프러포즈라니.

레이나가 한해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프러포즈는 성공했나요?”

“절반은요. 아직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레이나 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마워해줘서 고마워요.”

레이나가 묘한 말을 했다.

“사실 제가 아까 이 자리가 만들어졌을 때 한해 씨한테 부탁했어요. 한해 씨 프러포즈 뒷이야기를 공개해달라고.”

듣고만 있던 수진이 물었다.

“왜요?”

“그날 한해 씨의 반지를 사러 갔다가 저도 반지를 하나 샀어요.”

강은 눈을 번쩍 떴다.

“좀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계속 갖고 다녔어요.”

레이나는 핸드백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저는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기 모인 분들이 제 사랑의 일부고 저 역시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사랑의 일부라는 생각.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인연으로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그녀는 가죽 케이스에서 눈부신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

“와아…… 대박…….”

소월이 탄성을 흘렸다.

“그래서 여러분들 앞에서 프러포즈 이벤트를 하고 싶었어요.”

레이나는 반지를 잡고 강을 돌아보았다.

“이강 씨. 나하고 결혼할래요?”

수진은 얼마 전에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짜릿했다.

어쩌면 저렇게 당당하고 도발적일 수 있을까?

소월 역시 술이 다 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레오. 넌 세상에서 제일 쩌는 누나를 뒀구나.”

강은 얼이 빠진 지경이었다. 그는 남들 앞에서 하는 프러포즈 이벤트는 물론이고, 여자가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한다는 일 자체를 상상해보지 못했다.

눈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 그리고 최고의 보석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

거부할 수가 없네.

그는 특유의 저음으로 답했다.

“나도 절반만 예스.”

그는 레이나가 들고 있는 반지에 자기 손가락을 끼웠다.

“나머지 절반은 내가 프러포즈할 때 당신이 답해줘.”

레이나의 뺨을 가볍게 감싸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키스를 선사했다.

모두들 박수로 프러포즈 이벤트를 응원하고 축배를 들었다.

특히 수진은 진심으로 축복하고 응원했다.

서로 다른 연인의 품속에서 한때 부부였던 남편과 아내의 눈이 마주쳤다.

수진은 눈빛에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축하해요. 진정한 사랑을 찾은 당신을. 강의 시선에 담긴 말도 그녀는 알 것 같았다.

-너의 운명을 방해해서 미안해. 이제는 마음껏 응원할게. 온통 사랑이 가득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절대적으로 소중한 존재를 잃어본 사람은 다짐하게 된다. 다신 이런 상실감을 느끼지 않겠다고.

자신의 전부였던 딸을 잃은 이태화 회장도 그랬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세상을 떠난 딸 지은과 수진 사이에는 아무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외모가 몹시 닮았고, 만약 지은이가 그대로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은 분위기도 있었다.

그런 것들은 비과학적이고 감성적인 착각일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수진은 문신하듯 영혼에 새긴 다짐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신 이 아이를 잃을 수 없다는 다짐.

“좋으시겠어요, 허허.”

늦은 오후, 이 회장의 집무실에 안부 인사차 찾아온 협력업체 대표가 덕담을 건넸다.

“요즘 건설업계에 아주 아드님 칭찬이 자자해요.”

그는 가죽 소파 손잡이를 박수치듯 두드리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경영전략도 뛰어난 데다 현장도 마다하지 않고 누빈다고. 얼마 전에도 큰 수주 하나를 따냈다고 들었습니다.”

이 회장은 형식적으로 웃어 보였다.

“부족한 녀석을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다니요. 겸손이 지나치시네. 결혼식에서 봤는데 외모도 아주 출중하고. 아직 신혼이겠군요.”

이 회장이 이를 꽉 물었다.

“며느리님도 일을 하신다고 했던가요?”

“네. 요즘 아이들은 살림만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더군요. 굳이 자기 일을 한다고 해서. 저는 말렸는데.”

“요즘 애들이 어디 말을 듣나요? 저도 딸애가 조그만 병원을 하는데 일 그만두고 살림이나 하라고 해도 고집을 부리더라고요.”

손님의 말이 이 회장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수진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 위로 어린 딸의 얼굴이 겹쳐졌다.

널 다시 찾을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수백, 어쩌면 수천 번 되새겼던 다짐이었다.

그때 문이 살짝 열리고 비서가 얼굴을 내밀었다.

“회장님. 아드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만나자는 연락을 계속 피했더니 불시에 찾아왔구나.

이 회장은 난처한 상황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우리 이 회장님 아드님이 오셨네!”

거래처 대표는 이런 식으로 이태화 회장과 더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쩔 수 없지.

이 회장은 어금니를 꾹 물고 비서에게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집무실로 들어온 사람은 강 혼자가 아니었다. 세련된 투피스 정장 차림의 레이나가 함께 들어왔다.

“어…….”

거래처 대표가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그의 표정은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결혼식장에서 본 신부가 아닌데?

“손님이 계셨군요.”

강은 대표를 보고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들 이강이라고 합니다.”

“아……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요즘 업계에서 평판이 아주…….”

둘의 대화가 더 길어지기 전에 이태화 회장이 끼어들었다.

“대표님은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계속 버틸 거래처 대표는 어색하게 물러섰다. 그는 이 회장과 강에게 차례로 인사하고,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레이나를 힐긋거린 뒤 집무실을 나갔다.

“뭐하는 짓이냐.”

이 회장이 강을 꾸짖었다.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무례는 어디서 배웠냐?”

“죄송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뵐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강은 물러서지 않고 레이나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한테 인사시켜드릴 사람이 있어서요.”

레이나는 이태화 회장 앞에 깊이 고개 숙였다.

“안녕하세요? 레이나라고 합니다. 이강 씨의 여자 친구입니다.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이태화 회장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저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쏘아볼 뿐.

레이나는 온갖 종류의 시선을 다 받아보았다. 유혹, 호기심, 두려움, 경외, 무시, 경계, 질시…… 그러나 이토록 노골적인 경멸은 처음이었다.

“네가 미쳤구나.”

이 회장은 레이나가 아닌 강에게 말했다.

“아내가 있는 놈이 다른 여자를 아버지한테 데리고 와?”

레이나에 대한 철저한 무시였다. 그녀는 이미 강에게 수차례 경고를 받았다.

-우리 아버지는 모욕적인 혹은 비이성적인 언행을 할 수도 있어. 그래도 만나고 싶어?-결혼을 결심했으니까. 그리고 어머니한테는 이미 합격점을 받았잖아. 아버님한테도 허락을 받을 거야. 나는 목표지상주의자라고. 내키지 않아 하는 강과 달리 적극적으로 찾아뵙겠다고 한 쪽은 레이나였다.

-계속 회피할 수만은 없잖아.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이라면 지금 넘겠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 회장이 뿜어내는 기운은 그녀를 질리게 만들었다.

강이 불쌍했다. 이토록 엄청난 기운에 짓눌렸을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탄식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버지. 저 이혼했잖아요. 전 아내가 없어요.”

그녀를 위해 나서주는 강을 보며 레이나는 고마움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다.

고마워, 당신. 이거면 됐어.

“그것도 네 맘대로 한 이혼이지. 수진이는 언제든 다시 올 수 있고.”

레이나는 이 회장이 왜 수진에 대해 집착하는지 설명을 들었다.

“수진이 안 돌아와요, 다른 남자하고 결혼할 겁니다.”

강의 단언에 이 회장의 회색 눈썹이 꿈틀했다.

“그리고 저도 레이나와 결혼할 생각이고요.”

그제야 이 회장은 레이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이나는 용기 내어 이 회장을 마주 보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옅은 미소를 유지하면서.

“학원 선생이라고?”

“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실이 헤프다던데. 강이 너도 알고 있냐?”

무엇을 예측해도 그 이상을 보여준다는 말이 딱 맞았다. 레이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버님. 혹시 제 뒷조사를 하신 건가요?”

“따로 뒷조사를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의 비밀은 여기로 다 흘러들어오지.”

이 회장은 하얗게 센 털이 안에서부터 삐져나온 자기 귀를 가리켰다.

“헤프다는 말이 연애를 여러 번 했다는 뜻이라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몸을 함부로 굴렸다는 뜻이라면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레이나의 당찬 대답에 이 회장은 피식 웃었다.

“그게 그거 아니냐?”

레이나는 대거리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공식적으로 우리의 관계를 선언하는 날이다. 싸우는 날이 아니다.

그녀는 한발 물러섰다.

“아버님이 처음부터 흔쾌히 받아주시리라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자식 된 도리로 인사를 드리러 온 겁니다.”

강은 정중히 인사했고 레이나도 따라 인사했다.

“또 뵙겠습니다.”

이 회장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들이 집무실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동도 없이.

혼자가 된 뒤에야 그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호영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준비는 다 되었다고 했지?”

“네. 물건은 다 실었고, 출발만 하면 됩니다.”

의심 많은 이 회장을 위해 그들 사이에 통하는 은어였다.

“그럼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이 회장은 전화를 끊었다.

-수진이 안 돌아와요, 다른 남자하고 결혼할 겁니다. 강의 말이 귓가에 울리고 동시에 사진으로 봤던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도 장소도 다양했지만 한해와 수진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늘 꼭 붙어 다녔다.

이 회장은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인생의 다짐을 되새겼다.

다시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널 데려올 거야. 빼앗아서라도.

*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이 달콤해졌어. 어쩌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수진은 한해의 품 안에서 아침을 맞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어젯밤에 잘 때도 온몸이 녹는 사랑을 했잖아.

그 열기와 떨림이 눈 뜨자마자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

그녀는 가끔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동거 생활에 너무 만족하다 보니 굳이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고민이랄까.

너무 배부른 고민을 하면 신이 시샘할 것 같아 얼른 지워버리곤 했다.

그녀는 한해의 단단한 가슴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누구세요.”

한해는 겨우 잠에서 깬 목소리로 장난을 받아주었다.

“강한해 씨 계신가요?”

“전데요?”

“저 옆집에 사는 사람인데요. 문제가 생겨서요.”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씻고 출근해야 하는데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싫으네요.”

“앗. 저도 마침 그 문제로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흠.”

한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좋은 수가 있어요. 같이 샤워할래요?”

“헐. 변태인가요?”

“아니요. 사랑꾼이요.”

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입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를 번쩍 안고 샤워실로 향했다.

“야! 강한해! 내려놔!”

웃음이 터진 수진이 소리쳤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오빠 왜 아침부터 급발진하고 그래?”

“너야말로 왜 아침부터 예쁘고 난리야.”

수진은 그에게 안긴 채 발버둥치며 샤워실로 실려 갔다. 그리고 잠시 후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출근하기 전에 그들은 늘 동네 작은 카페에 들렀다.

수진은 카페라떼, 한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매일 같은 주문을 하다 보니 주인이 먼저 물어볼 지경이었다.

“같은 걸로 드릴까요?”

그러면 수진은 한해의 팔짱을 깊이 끼며 ‘네!’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곤 했다.

한해는 며칠 전에 소월과 레오의 공연에서 들은 사랑의 정의를 떠올렸다.

-사랑은 당신 없이도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정말 그랬다. 그녀를 볼 때마다 아득해졌다.

그 긴 세월, 너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이런 행복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가능했겠지.

이제는 그렇게 불행하게 살 수 없어.

여느 때처럼 커피를 들고 카페를 나오는데, 눈발이 스치기 시작했다.

“오빠. 눈 온다.”

조건반사처럼 수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또 쓸데없는 걱정 한다. 지난번에 공연 보러 갔을 때도 눈 왔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때 한 번 괜찮았다고 앞으로 계속 괜찮은 건 아니잖아.”

“그저께도 눈 왔어.”

“그땐 한밤중이어서 자느라고 눈 온 줄도 몰랐잖아.”

카페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얼굴로 생글거리다가 눈 오는 날씨를 보고는 오만상 다 찌푸리는 수진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진수진. 너 웃기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무슨 운명이 자고 있다고 비껴 가주냐?”

“휴우…… 알겠어. 그런데 오빠 나 진짜 느낌 이상하다.”

“그래. 오늘 저녁 약속 없으니까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올게.”

“위험한 상황은 없겠지?”

“차 운전해서 회사까지 갔다가 다시 차 몰고 집으로 들어오잖아. 차 안에 누가 숨어 있지 않는 이상 무슨 일이 있겠어.”

“차 안! 차 안이 위험하다! 차 탈 때마다 조심해.”

너무나도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한해는 정수리 키스를 하고 말았다.

“딱 기다려. 진짜 위험한 게 뭔지 오늘 밤에 보여줄 테니까.”

결국 수진은 한해의 차 안을 직접 뒤져본 다음에야 자기 차를 타고 출근했다.

회사로 가는 내내 한해는 웃음이 나왔다.

출근길에 즐겨듣는 라디오 ‘음악특공대’를 진행하는 DJ의 목소리도 경쾌했다.

“눈 오는 아침에 다들 출근길은 안녕하신가요? 조심조심 안전 운행하라는 의미에서, 오늘 음악특공대 첫 곡은 마이클 잭슨의 노래로 준비했습니다. Dangerous!”

한해는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출근했다.

길에 쌓일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예쁘게만 내리는 눈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아침에 얹는 특별한 토핑 같은.

회사에 도착한 그는 주차를 하고, 아직 많이 남은 커피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몇 발자국 옮기지 못하고 한해의 무릎이 툭 꺾였다.

“크윽…….”

고통스러운 단말마가 입에서 기어 나오는 동시에 그의 손에서 커피가 떨어졌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 느낌은…… 뭐지?

옆구리가 뜨거운 동시에 시리다.

바닥에 쏟긴 커피와 붉은 피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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