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우뚝 솟은 키에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돈된 헤어스타일, 그리고 완벽한 비즈니스 슈트까지.
그의 모습은 식당에서 가장 우월해 보였다.
레이나가 손을 들어 강을 불렀다.
미소 띤 얼굴로 다가온 강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강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분이…….
소월과 레오 모두 멍하니 강을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말해줘서 그들도 알고 있었다.
한해가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 수진의 전남편이자, 레이나가 지금까지 유일하게 집착했던 남자이면서, 태화 건설의 후계자인 이강. 그 물고 물리는 연결고리.
레오는 전설 속의 존재를 대하듯 신기한 눈으로 강을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강이 먼저 인사했다.
“레이나 씨의 동생분이군요. 반갑습니다.”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악수를 나누고, 소월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쪽은…….”
“안녕하세요? 저는 레오 여자 친구 윤소월이라고 합니다.”
소월도 꾸벅 인사했다.
“아, 윤소월 씨.”
오늘 식사 자리에 초대받으면서 강은 레이나로부터 동생 커플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월과 한해와 관계에 대해서도.
강은 어딘가 슬픈 표정을 머금고 그녀를 응시했다.
“저하고 비슷한 처지라고…… 아니, 처지였다고 들었습니다.”
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네. 그랬죠. 이런 걸 동병상련이라고 하나요.”
둘 사이에 레오가 끼어들었다.
“이젠 아니잖아.”
그는 당돌하게 소월의 팔짱을 꼈다.
강은 무척 신기한 광경을 목격한 듯 눈이 커졌다.
레이나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당신도 이젠 아니잖아.”
강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외로움이라는 병은 정점을 찍고 나아가는 것 같아.
아까 소월과 레이나가 대화를 나눌 때는 가만히 있던 레오가 적극적으로 변했다.
“저희 누나가 그쪽 무척 좋아하는 거 아시죠?”
“좋아했죠. 제가 그 마음을 못 받아들였고.”
“무슨 소리야. 지금도 좋아하지. 알면서.”
강은 레이나의 말이 참 듣기 좋았다. 뭐라고 대답할지는 애매했지만.
“자자, 우리 맛있는 고기를 앞에 두고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소월이 분위기를 풀어준 덕분에 다들 편하게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강은 자신이 일부분으로 속해 있는 광경을 제3자의 눈으로 관조했다.
묘한 광경이군.
손님들로 북적이는 식당에서 일타강사, 아이돌 연습생 출신의 무명 가수, 항해사 출신의 무명 가수, 그리고 나.
그가 어울렸던 사람들은 비슷한 재벌가의 일원이거나 일 때문에 만나는 상하관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업무 연관성도 없고, 나이도 제각각이고, 심지어 사회활동조차 안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즐겁고 마음은 편안하고, 무엇보다 고기는 맛있다.
강은 지나가버린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갇혀 있었을까? 처음부터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벽에 갇혀 있었어. 그 벽 너머에 핀 꽃을 꺾으려는 생각만 했지, 용기 내어 벽 밖으로 나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거야.
“우리 리버 오빠 잘 먹네.”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네는 레이나가 꽃처럼 예뻐 보였다.
“고마워.”
강은 레이나에게만 들리게 감사를 표했다.
“나보고 계산하라는 얘기지?”
“이런 자리에 불러줘서 고맙다고.”
레이나는 강의 반응이 믿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눈을 껌벅였다.
그는 편안한 미소와 함께 고기 한 점을 더 들어 올렸다.
“계산은 오빠가 할게.”
*
주요 기업들의 실적이 공개되는 날이었다.
이른바 ‘어닝 서프라이즈’라고 하는, 예상을 뛰어넘는 실적을 거둔 곳들이 유독 많았다.
주가는 평소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요동쳤고 SH 인베스트먼트 직원들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해도 그랬다. 점심시간까지 반납하고 일에 매달렸다. 개인 핸드폰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을 때는 국내 시장이 마감된 뒤였다.
수진이 보낸 메시지들이 여러 개 쌓여 있었다.
-나 오늘 감독님하고 저녁미팅 취소! 혹시 오빠 저녁 약속 안 잡았으면 나 만나줄래? 17분 뒤.
-나랑 밥 먹기 싫구나.
-우웽. 32분 뒤.
-우리 오빠 밥은 먹고 다니냐? 그리고 바쁜데 힘내라는 이모티콘이 잔뜩.
-울진에서 찍은 사진들 몇 장 보낼게. 그대로 엽서로 인쇄해도 될 것 같은 사진들이 여러 장 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제일 오래 한해의 시선을 붙든 사진은 멋진 배경이 아니라 그냥 호텔 소파에서 쿠션을 하나씩 안고 찍은 커플 셀카였다.
흐트러진 담요와 테이블 위에 널린 과자봉지들, 그리고 둘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그때의 편안한 기분을 되새겨주었다.
마지막으로 와 있는 메시지는 일종의 편지였다.
세모이면서 네모인 도형은 없잖아.
그런데 오빠는 그래.
보기만 해도 설레고 살이 닿으면 찌릿하고
키스를 할 때면 온몸이 떨리는 사람인데
같이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거나 티브이를 볼 때면 너무 편해.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남자 버전의 나와 함께 있는 느낌이랄까.
오빠는 늘 새로우면서 익숙한, 마치 세모이면서 네모인 도형 같은 사람이야.
이번 여행에서 어머님한테 예언을 듣고 결심했어.
오빠와 더 많이 사랑할 거야.
어머님이 말씀하신 일은 우리가 충분히 막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빨리 더 많이 더 뜨겁게 오빠를 사랑할 거야.
그러니까 오늘 만나주라. 응?
뭉클했다가 웃음이 나왔다.
음성지원이 되는 편지를 읽으며 한해의 얼굴에는 대여섯 가지의 표정이 교차했다.
그는 찬찬히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
태어날 때부터 악당이었던 사람보다 일그러진 영웅이 더 악당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태화 회장을 아는 사람은 다들 그렇게 평했다. 누구보다 선량했던 사람이 사업을 키우면서 괴물이 되었다고.
그의 영혼을 망가뜨린 사건은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동업자들의 배신과 부도, 경쟁업체의 도전과 공격, 외환 위기나 세계금융위기 같은 불가항력적 악재들까지.
그는 수도 없이 피 흘리고 쓰러졌고 그럴 때마다 더 독해졌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영혼을 부숴버린 사건은 딸 지은의 죽음이었다.
그 아이는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순수함이었다.
열 살짜리 딸이 무너진 백화점의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세상을 떠나던 날, 그의 영혼은 악의 세계로 휩쓸려갔다.
그는 딸을 지켜주지 못한 아내를 증오하고, 아들을 증오하고, 신을 증오했다.
그는 오직 세속적인 성공과 힘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세상에 있는 돈과 힘을 다 긁어모을 것처럼.
다른 것에는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찾을 필요도 없었다.
선하고 싶지도 않았고 선할 필요도 없었다.
막강한 힘을 가진 뒤에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든 혼을 내주었다.
가족도 직원도, 심지어 내연녀들에게도 늘 같은 식이었다.
내 말이 법이다. 법을 어기는 자들은 엄벌에 처한다.
지금까지는 아무도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 강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어릴 때는 흠씬 두들겨 패주는 것으로 아예 반항할 생각조차 못하게 키웠는데, 이제 녀석은 너무 커버렸다.
다른 방식으로 다뤄야 한다. 아예 선택권을 주지 않는 식으로.
오늘도 녀석은 같이 점심을 먹겠다며 마주 앉아 있다.
이태화 회장은 영 내키지 않는 자리였다. 그는 설득도 협상도 원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줄 때까지는 말이다.
식사를 하는 내내 강은 이런저런 대화 주제를 이어갔다. 회사 일부터 최근 시사 이슈들까지.
이태화 회장은 대충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얼른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수진이와 이혼하는 과정에서 상담도 받고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생각도 많이 했고요.”
“그런 게 도움이 된다니 놀랍구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그는 이태화 회장이 가장 원치 않는 주제를 꺼냈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저희가 평범한 부자지간은 아니었잖습니까.”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왜 하는 거냐. 결혼도 이혼도 네 멋대로 하면서?”
그는 손목을 휙휙 돌리며 인상을 썼다.
“아버지 손목을 꺾는 배은망덕한 자식이기도 하고.”
강은 지그시 이를 물고 뭔가를 참는 표정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들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아버지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방법은 화해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고, 승리일 수도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눈빛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아버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는 아들도 있겠죠.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이제 그 벽을 넘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도와주셔야 해요.”
이태화 회장은 속으로 물었다.
벽을 넘고 싶다니. 어디로 도망가려고?
“아버지와 싸우거나 서로 외면하는 방식이 아니라 화해를 통해 벽을 넘고 싶습니다.”
이태화 회장은 공감 없이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와 싸우고 싶진 않다.”
“아버지.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 회장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강은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학대와 폭행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에게는 사과하셨으면 좋겠어요.”
이 회장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아버지의 폭력과 냉대로 어머니는 영혼을 완전히 잃어버리셨어요. 지금이라도 어머니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사과가 있어야 합니다.”
“네가 알기나 해? 너희 엄마 때문에 지은이가 죽었다.”
“차라리 제 탓이라고 하세요. 제가 떼를 써서 그렇게 된 거니까요.”
“난 용서 못 한다.”
“이미 오래전 일이에요.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머니 잘못이 아니고요.”
“너야말로 이미 오래전 일인데 왜 이제 와서 사과 운운하는 거냐?”
“어머니도 살아야 하니까요.”
이태화 회장은 미간이 잔뜩 구겨진 채로 아들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아들하고 말싸움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저 보여줄 것이다.
초격차.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그리고 너는 절대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겠지.
“그래. 오늘 들어가서 사과하마.”
어려운 이야기를 하느라 잔뜩 긴장해 있던 강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입니까?”
“나중에 네 엄마한테 직접 물어봐라.”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그는 이태화 회장의 손을 잡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 잡아보는,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먼저 잡아보는 아버지의 손이었다.
“고맙습니다.”
이태화 회장은 일어설 타이밍만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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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이혼하겠다고 통보했을 때보다, 또 정말로 이혼을 해버렸을 때보다 오늘이 더 불쾌했다.
식당에서 나온 이태화 회장은 기사가 기다리고 있는 차에 앉자마자 시트를 주먹으로 팡팡 때렸다.
“감히! 네놈이! 아비한테 사과를 하라 마라 명령해?!”
기사는 눈도 없고 귀도 없는 사람처럼 가만히 핸들만 잡고 있었다.
“버릇없는 자식! 본때를 보여주마!”
분을 삭이지 못한 이 회장은 몇 번이나 소리를 더 지른 뒤에 다시 차에서 내렸다.
그는 ‘지호영’이라는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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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릴 때부터 악행을 저질러서 태어날 때부터 악마로 태어난 게 아닌가 의심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지호영이 바로 그런 자였다.
월남전에서 마약에 찌든 상태로 귀국한 참전용사와 호적도 제대로 없어 나이도 정확하지 않은 술집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매일같이 범죄가 일어나는 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처음 사람을 죽였다. 당시 법으로 처벌할 근거가 없어 전과조차 남지 않았지만, 몇 년 안 있어서 다른 범죄로 소년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감정은 점점 차가워지고 범죄 수법은 점점 치밀해졌고, 그는 완벽한 청부업자로 거듭났다.
그는 빠르고 정확하고 무엇보다 입이 무거웠다. 자신에게 돈을 준 사람의 이름은 수사 과정에서 절대 꺼내는 법이 없었다.
젊었을 때는 맡은 일을 직접 하느라 교도소를 자주 들락거렸지만 단골이 많아지고 점점 돈을 많이 벌면서 여러 명의 청부업자를 밑에 두었다.
이제는 아예 흥신소를 차렸고 사사로운 원한이나 채권 추심 같은 일은 아예 맡지 않았다. 정치권이나 재계의 큰손들만 상대해도 일거리가 넘쳤다.
올해로 나이 50살이 된 그는 직원들에게 ‘회장님’으로 불렸다.
진짜 회장 이태화의 전화가 왔을 때, 호영은 사무실에서 책을 읽던 중이었다.
교도소에서 보낸 길고 긴 세월. 그는 독서에 취미를 붙였고 특히 역사서를 좋아했다.
오늘 그가 고른 책은 사마천의 ‘사기’였다.
“네, 회장님.”
그는 책을 덮고 오랜 단골 이태화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는가?”
“저야 회장님 덕분에 늘 잘 지냅니다. 회장님은 건강하시지요?”
“몸은 건강한데 마음이 건강하지 못해. 그래서 자네한테 전화를 걸었지.”
“회장님을 신경 쓰이게 하는 놈이라도 있습니까?”
호영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일단 좀 탈탈 털어봐야 할 녀석이 있어.”
이태화 회장은 한해의 신상정보를 전해주었다.
책상 위 종이에 메모를 해놓은 호영은 모나미 볼펜으로 ‘강한해’라는 이름에 겹겹이 동그라미 쳤다.
“이름이 특이해서 찾긴 쉽겠네요.”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알아봐.”
“알겠습니다. 오늘 점심때 반찬으로는 뭘 먹었는지까지, 탈탈 털어서 보고해드리겠습니다.”
“따라다니다 보면 여자애가 하나 나올 거야. 그 아이도 좀 알아봐봐.”
“여자는 누군데요?”
“내 며느리.”
“네?”
엔간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호영이 인상을 팍 썼다.
“아들놈하고 사이가 안 좋아져서 이혼을 했는데 내가 다시 데려올 생각이야.”
“아, 알겠습니다. 아까 회장님이 말씀해주신 강한해라는 사람하고 며느리님하고 관계가 있는 겁니까? 내연관계?”
“뭐 지금은 둘이 붙어 다니는 것 같은데. 상관없어. 데리고 와야지.”
다른 청부업자들이라면 정확히 물어볼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강한해라는 사람을 손보라는 말씀인가요? 어디까지?
그러나 지호영은 그런 섣부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태화 회장을 비롯해서 그에게 일을 맡기는 큰손들은 흔적이 남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문자는 기록에 남고 전화 통화도 녹음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지호영은 문자나 전화 통화를 통해서 직접적인 청부 의사를 확인하지 않았고, 이런 태도에 고객들은 무척 안심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보고 연락드리지요.”
“우리 며늘아기 이름은 수진이야. 진수진. 어떤 경우에도 그 아이는 다쳐선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지호영은 메모지에 적힌 두 개의 이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강한해. 진수진.
없어져야 할 이름과 지켜야 할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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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화 회장은 집에 일찍 들어왔다. 해가 막 떨어진 초저녁이었다.
오늘은 모임도 유흥도 내키지 않았다.
확실한 목표가 생기면 모든 신경이 그쪽에 집중되는 성격 탓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아내가 현관문 앞에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평소처럼 그냥 지나쳐 지나가려던 이 회장은 강의 말을 떠올리며 멈춰 섰다.
‘어머니에게는 사과하셨으면 좋겠어요. 아버지의 폭력과 냉대로 어머니는 영혼을 완전히 잃어버리셨어요. 지금이라도 어머니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사과가 있어야 합니다.’다시 치솟는 분노를 겨우 참고 나서, 이 회장은 아내를 노려보았다.
“내가 당신한테 사과해야 하나?”
“네?”
아내는 언제나처럼 잔뜩 움츠린 표정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내가 당신한테 뭐 잘못한 게 있어? 사과할 일이 있냐고.”
“아니요. 아닙니다.”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됐고.”
자리를 뜨려는 이 회장의 뒷덜미를 아내의 목소리가 낚아챘다.
“사과는 됐고요. 대신…….”
이 회장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쓰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뭐지?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래?
“대신 뭐?”
바들바들 그녀의 말이 기어 나왔다.
“이혼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