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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40화 (40/92)

40화

나무그늘 사이로 스며든 햇살은 잔인했다. 무릎 위에서 강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마음이 아프지만, 더 아프지 않기 위하여.

“우리 이제 그만해.”

말해버렸다. 단순한 세 마디 말이 아니라 가슴을 내리누르던 돌덩이를 빼낸 기분.

강은 대답이 없었고, 떨림조차 멈추었다.

이름 모를 새가 잠시 떠돌다 사라졌다.

“이유는?”

고개를 떨어뜨린 강의 목소리는 들릴까 말까 했다.

“나 잔인한 사람으로 만들지 마.”

“말해! 이유는!”

“외도와 폭력, 그리고 집착. 시댁의 무시와 노골적인 임신요구. 더 필요해?”

“하아…….”

“내가 과장해서 말한 게 있어?”

“고치겠다고 했잖아.”

“못 믿겠어.”

“믿어달라고, 애원하고 간청했잖아.”

“이미 기회를 줬는데 당신이 짓밟아버렸잖아. 좋아. 조금 더 잔인해질게. 그럼 아이를 안 낳고 둘이서만 살겠다고 한다면? 아버님을 설득할 수 있어?”

강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안 된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하자고.”

“나는 동의 못 해.”

“왜? 대체 왜? 나를 놓아야 당신도 행복해질 수 있어.”

“인정할 수 없어.”

“대체 뭘 인정할 수 없는데?”

수진은 화를 내려다가 겨우 마음을 다스리고 말했다.

“이강 씨, 잘 들어. 이혼은 결혼의 실패가 아니야. 이혼을 실패라고 말하던 시절은 이미 갔어. 이혼은 삶의 여러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뿐이야. 방향을 수정하는 것뿐이고.”

“그런 소리 집어치워. 내가 지금 결혼이니 이혼이니 하는 것 때문에 이래?”

“그럼?”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강의 음성은 절절했다.

“집착이라고 해도 좋아. 나는 널 빼앗기고 싶지 않아.”

수진은 빼앗는다는 표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까지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또 한해의 이름이 나올 테니까.

“나는 당신과 결혼한 뒤 단 하루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

“이제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있잖아, 이강 씨. 내 말 잘 들어봐.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정신과 의사의 권위 있는 말이니까. 부부끼리 서로에게 만들어주는 행복은 노력으로만 되는 게 아니래. 서로 잘 맞는 상대끼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행복해지고 노력하면 더 행복해지지만…… 아무리 해도 그게 안 되는 상대도 있대.”

“난 네가 있어 행복해. 존재만으로도.”

“나는 그렇지 않은데?”

강은 이미 자존심 따위는 수풀에 던져버린 듯했다.

“강한해 때문이지?”

“아…… 또…….”

“어릴 때부터 그랬어. 넌 강한해와 함께 있으면 그냥 계속 웃었어. 시시한 것도 맛있게 먹고.”

“그래. 맞아. 잘 봤네.”

“진수진!”

“어릴 때는 정말 그랬지. 하지만 14년 전 일이야. 한해 오빠와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한해 오빠와 당장 뭔가를 하려고 당신하고 이혼하는 건 아냐.”

“그걸 어떻게 믿지?”

“당신은 몇 번이나 외도를 저질렀지만 난 한해 오빠와 키스 한번 한 적 없어.”

“분명히 해두지. 넌 나중에 재판이라도 할 때 근거로 들이대려고 기정사실화하는 것 같은데, 나는 외도를 저지른 적 없어.”

“하! 이젠 거짓말까지!”

“거짓말만? 이 결혼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봐.”

강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수진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일어선 채로 부들부들 떨던 강이 고개를 휙 돌리고 노려보았다.

“내가 죽으면 넌 슬퍼할까?”

“아아아…… 제발…….”

수진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해?”

강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내가 너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의 백분의 일이라도 흘려줄까?”

“오빠…….”

수진이 일어서려는데 강은 그대로 가버렸다.

“그러지 마! 왜 자꾸 자신을 몰아가는 거야!”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지만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벤치에 앉은 그녀는 격렬해진 감정을 심호흡으로 다스렸다.

침착하자, 수진아. 마음 약해지면 안 돼.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머지 손을 맞잡은 직장인 커플이 앞으로 지나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몸을 흔들어가며 깔깔대고 웃었다.

유모차를 미는 젊은 엄마가 뒤를 따랐다. 아기에게 계속 말을 걸어주면서.

그래. 수진아. 손잡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사람하고 살아야지.

함께 아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하고 살아야지. 나이 들어도 오래오래 공원을 산책하고 싶은 사람하고 살아야지.

그녀는 어쩌면 남편보다 더 어려운 상대와의 일전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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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태화건설 본사 빌딩.

굴지의 건설사답게, 쟁쟁한 기업들의 본사가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빌딩 톱 층이 이태화 회장의 집무실이었다.

수진은 집무실과 붙은 비서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무척 키가 커 보이는 여비서는 수진에게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고 업무에 열중했다.

잠시 뒤 벌어질 상황이 짐작조차 안 된다.

강이 아버지에게 말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아. 그렇다면 모르고 계시겠네.

우리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건 눈치채신 것 같지만, 이혼까지는 생각 못 하셨을 텐데.

수진은 아예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어제 98퍼센트쯤 마무리한 웹드라마 기획서의 남은 2퍼센트를 어떻게 채울지.

야화 작가의 소설 뒷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질지.

아직 저녁 약속이 없는데 오늘 혼자 밥을 먹는다면 메뉴는? 편의점 도시락?

집무실 문이 열리고 임원들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여비서는 일어나 목례를 했지만, 수진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시 뒤, 이태화 회장이 밖으로 나왔고 그제야 수진도 일어섰다.

“어, 많이 기다렸어?”

“아닙니다. 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차는? 커피?”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와.”

이 회장은 비서에게 다른 사람을 들이지 말고 전화도 연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 회장의 집무실은 수십 명이 근무하는 사무실로 만들어도 될 만큼 넓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수진에게 이 회장이 물었다.

“여기는 처음인가?”

“네.”

“앉아. 편하게.”

몸이 온전히 파묻히는 가죽 소파에 마주 앉았다.

“며느리가 시아버지 집무실까지 찾아온 걸 보면 둘 중 하나 같은데.”

말은 무기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상대할 때 사용하는 말만 봐도 상대의 내공을 알 수 있다.

이 회장의 말투나 표현은 자신만만 그 자체였다.

“지난번에 내가 얘기한 사업을 하고 싶어졌거나 아니면…… 강이 녀석하고 이혼이라도 하려는 게냐?”

역시…… 수진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후자구나.”

이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이블에 놓인 파이프 담배를 집어 들었다.

“임신했을 리는 없고. 피워도 괜찮겠지?”

“아, 네. 편하게 태우십시오.”

“고맙다. 요즘은 이런 것도 조심스러워. 어쩔 수 없는 꼰대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덜 꼰대가 되어야지.”

이태화 회장은 얼굴에 미소까지 띠고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일반 담배하고는 다른, 매캐하면서도 고소한 연기가 집무실에 은은히 퍼져나갔다.

“강이 녀석한테도 들어보겠지만 일단 네 얘기부터 들어보자.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냐?”

수진은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지금 자기 아들 이혼 얘기를 처음 들은 사람 맞아? 태화 건설의 후계자가 될 아들 이혼 이야기를 하는 사람 맞냐고…….

“처음부터, 결혼 전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기 오기 전부터 수진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연습을 해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그이가 울진에 내려오기 전부터 시작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말하지 않고 최대한 사실 그대로를 말하려고 애썼다.

그녀와 한해, 그리고 강. 진실과 거짓. 마음과 노력. 오해와 분노. 폭력과 외도…… 모든 것에 대하여.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이 회장은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뻐끔뻐끔 파이프 담배를 태우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이한테 제 결심을 말했고…… 아버님한테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랬구나.”

그제야 이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이는 뭐라고 하디?”

“네? 아…… 동의할 수 없다고…….”

“동의가 아니라 합의겠지. 정확한 용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내가 누누이 말했는데도 녀석이…… 쯧쯧…….”

“동의든 합의든…… 저는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야 물론이지.”

이 회장의 호쾌한 태도에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시댁의 다른 어른들이 그녀를 무시하고 괴롭히려 들 때면 오히려 시아버지가 나서 막아주곤 했다.

“당사자들끼리 물어뜯고 싸울 필요가 뭐 있어. 변호사들끼리 해결할 문제지.”

응? 수진은 입이 딱 벌어졌다.

“아버님…….”

“왜? 설마 내가 강이를 설득이라도 해줄 줄 알았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할 결혼이고요. 그이의 거짓말을 알았을 때는 이미 법적으로 혼인관계여서 어쩔 수 없었어요.”

“멍청한 놈. 내가 이럴 줄 알고서…….”

이 회장은 말을 삼켰지만 수진은 얼핏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고서 빨리 임신부터 시키라고 했거늘!’마치 선녀의 날개옷을 훔쳐 가 땅에 주저앉힌 나무꾼처럼요?

수진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아쉬움을 거두었다.

이혼 결정하길 잘했다.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뭘 해. 이런 야만 속에 살 순 없어.

이 회장은 허공 속으로 연기를 길게 내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태화 그룹처럼 재계 순위권에 드는 집안을 보면 반반이야. 결혼해서 잘사는 애들 반. 이혼하는 애들 반. 이유는 다양하지. 언론에 나오는 이유야 뭐 성격 차이니 뭐니 하지만 들여다보면 기가 막혀. 그런데 공통점은 뭔 줄 아니?”

“뭔데요?”

“그냥 놔주는 법은 없다.”

“아…….”

서늘한 공포. 수진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최고의 변호사들로 팀을 꾸릴 거야. 네 월급으로 어느 정도의 변호인단을 꾸릴지는 모르겠지만, 돈도 시간도 많이 들 거다.”

“아버님…… 제발…….”

아까 남편에게 이혼 통보를 할 때도 솟지 않았던 눈물이 다 솟을 지경이었다.

“재산 분할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마. 재산 분할도 최소한의 기간을 같이 살면서 아이도 양육하고 이런 부부에게나 해당되지. 결혼한 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오해이십니다. 저는 정말 단 한 푼의 재산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결혼 전의 상태로만…….”

“뭔 시답잖은 소릴 하고 자빠졌어!”

갑자기 튀어나온 격한 말투에 수진은 혼이 쏙 빠졌다.

“너는 지금도 나를 모욕하고 있어.”

“아버님…… 모욕이라니…….”

“변호사비 감당 안 되면 꼬리 내리고 조용히 살아. 까불다가 한 번뿐인 인생 만신창이로 만들지 말고.”

“제가 아버님을 모욕하고 있다니요?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는 정말 재산 바라는 거 아닙니다. 아주 쉬운 말로 하자면 속아서 한 결혼이니 무효로 해달라는 겁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지 말씀해주십시오!”

“네가 어떻게 하면 되냐면…….”

이태화 회장은 수진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었다.

“내 앞에서 꺼져.”

그의 눈은 상대를 파괴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악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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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내기 잘했다. 남편과 시아버지를 동시에 만난 수진은 온몸에 힘이 다 빠져서 택시에서 내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호텔 로비의 소파에 축 늘어진 채 아이스티로 당을 보충한 뒤에야 겨우 힘을 낼 수 있었다.

오늘의 수확이라면, 몇 가지 확실해진 것들이 있었다.

남편과 시댁의 바닥을 확인했다.

외도와 폭력으로 모자라 자기 목숨으로 협박을 하는 남편, 돈으로 겁박을 하고 며느리 얼굴에 담배 연기와 막말을 내뿜는 시아버지.

이혼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아이라도 가졌다면?

상상만 해도 몸이 파르르 떨렸다.

겨우 힘을 낸 그녀는 방으로 올라왔다.

구역질이 몰려와 화장실에서 토를 쏟고, 기어가다시피 침대에 누웠다.

이제 한 사람 더 남았다. 오늘의 결심을 알려줘야 할 사람.

만나서 얘기를 해주면 좋겠지만 힘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녀는 한해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떨리네. 무슨 말을 할지.”

이 시간에 불쑥 전화를 했다는 사실에 상황을 짐작하는 듯했다.

수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하기로 했어요.”

“그래.”

아주 짧은 대답과 긴 침묵.

“그런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힘이 하나도 없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좀 그러네요.”

“일단은 푹 쉬어야겠다.”

“그래야겠어요.”

“강이는 뭐래?”

“용납할 수 없다고 하죠. 시아버님도 만나고 오는 길인데…… 아주 냉정하세요.”

“냉정하다는 게 무슨 뜻이지?”

“법으로 하자는 식. 제일 비싼 변호사들로 팀을 꾸리겠다며, 엄청난 돈과 시간을 각오하라는데…… 벌써부터…….”

수진은 말을 채 맺지 못했다.

“괜찮아?”

“오빠. 미안한데…… 나 괜찮지 않아요.”

남편과 시아버지의 협박에 한껏 당겨졌던 긴장감이 한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풀려서일까?

몽롱한 현기증이 그녀를 휘감았다.

“수진아? 수진아!”

“오빠. 나 좀 어지럽다.”

“어디야? 호텔이 어디냐고!”

익사하기 직전에 보이는 구조대원의 손길마냥, 한해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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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솔직히 기뻤어.

한해는 스스로에게 고백했다.

수진의 이혼 결정을 듣자마자 기뻤다. 작은 틈과 같았던 희망이 빛이 활짝 열린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런 식의 기쁨이었다.

언젠가 문을 나가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갈 날이 있겠지.

그러나 당장은 길고 긴 고난이 예정되어 있다. 그 고난은 그녀뿐 아니라 내가 넘어야 할 고난이기도 하지.

한해는 통화 중에 기력을 잃어버린 수진에게 달려가는 중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녀는 호텔과 방 번호를 흘리듯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사토시 씨가 선물로 사 준 자동차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그는 가속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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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 시작이다.

수진은 침대에 누운 채 공포와 현기증과 싸우고 있었다.

힘을 내기 위해 자신을 칭찬했다.

인내심을 갖고 여기까지 왔고, 현명한 결정을 내렸고, 망설이지 않고 결심을 통보했어. 다 잘한 일이야.

이렇게 나가떨어진 것도 당연해. 다시 일어나 싸우기 위한 휴식이라고 생각하자.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기력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노크 소리와 함께 한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진아. 나야.”

이렇게 반가운 조건 반사가 또 있을까.

그녀는 남아있는 힘을 짜내어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열어주었다.

“진수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한해가 부축해주었다.

“미안해요. 바쁠 텐데.”

“바보 같은 소리.”

그는 수진을 번쩍 안고 침대에 눕혀주었다.

“식은땀 좀 봐.”

이마의 땀을 닦아주는 손길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종종 그랬지. 신나게 뜀박질을 한 뒤 이마에 솟은 땀을 오빠는 손으로 쓱쓱 닦아주곤 했지. 으휴 이 땀 좀 봐. 그러면서. 바로 그 손길이야.

“대단해. 결단력도 대단하고 실행력도 대단해. 나라면 너처럼 하지 못했을 거야.”

“실행력은 뭔가요. 이제 시작인데.”

“어려운 말을 어려운 상대에게 하는 일. 그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어.”

“아하. 옛날에 오빠가 나한테 이별 통보했던 그 실행력?”

“오호. 까부는 거 보니까 기운 좀 차렸나 보네. 괜히 걱정했잖아?”수진은 모로 누운 자세로 빙긋이 웃었다.

“아까는 겁이 났는데 오빠 보니까 겁이 안 나네.”

촉촉이 젖은 그녀의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한해가 쓸어 넘겨주었다.

“그만 까불고 눈 좀 붙여. 그리고…….”

호텔 문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한해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누구 올 사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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