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할 필요 없어.-변명하려는 건 아니고. 꼭 할 말이 있어. 잠깐이면 돼. 35화
그녀가 떠난 집을 돌아보았다.
한해는 믿어지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결혼식장에 들어선 그녀를 본 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그녀와 같은 집에서 밤을 보냈다. 싱싱한 햇살 속에서 신선한 아침을 먹었다.
그는 주식시장 장이 열리기 전에 사토시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랑하려고 전화했나?”
사토시는 장난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자랑은요. 그냥 라면 먹고 잤어요.”
“로맨틱한걸?”
“놀리지 마세요.”
“부러워하는 거야.”
“저기 선생님…… 사실 마음이 좀 복잡합니다.”
“어째서지?”
“수진이가 저에게 피신해 온 상황인데…… 그녀가 곁에 있다고 좋아하는 제 마음이…… 옳은가 싶습니다.”
“정작 자네가 나한테 해준 충고해주지 않았나? 더 늦기 전에 숙희를 구해주라고. 내 자신의 인생도 구해주라고.”
“그랬지요. 하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으니까요. 수진이가 주변의 시선이나 속박에 구애받는 아이도 아니고요. 수진이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겁니다.”
“그럼 뭐가 걱정인가?”
“수진이는 남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지도 몰라요. 그런데 저는 좋아질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집착과 폭력, 외도. 세 가지 중 한 가지도 고치기 힘든데 세 가지 모두 갖고 있는 남편이라. 나아질 수 있을까? 나도 자네랑 같은 생각이네.”
“그렇다면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까요?”
“나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마음을 정한 것 같은데?”
“너무 오랜 세월, 너무 멀리서, 너무 무력하게 수진이를 떠나 있었어요. 더 이상 수진이가 불행해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순 없어요.”
“이제 보니 물어보는 게 아니라 결심을 굳히려고 전화를 했구만.”
“그럴지도 모르죠.”
“자네가 내 인생을 응원해준 것처럼 나도 자네의 인생을 응원해주겠네. 아직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 수진이의 인생도.”
사토시의 음성에는 힘이 넘쳤다. 주변에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제가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선생님하고 숙희 아주머니는 어떠세요?”
“우리? 우리 지금 여행 가.”
“네? 여행이요?”
“다녀와서 얘기해주지. 지금 얘기 길게 할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지.”
사토시 씨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한해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여행이라고?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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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과 여행이라면 이력이 난 사토시였지만 이런 여행은 정말 처음이었다.
제각각 현란한 등산복을 입은 50대, 60대 관광객들이 버스에 가득했다.
멋진 식사와 쇼핑 등등의 제안을 모두 거절한 숙희가 웬일로 먼저 제안한 여행이었기에 사토시는 거절할 수 없었다.
숙희가 가고 싶다며 알아본 여행은 바로 그 유명한 단체 관광. 그것도 꽃놀이.
심지어 그녀가 자기 돈으로 예약한 터여서 사토시는 환불조차 할 수 없이 따라온 상황이었다.
“누구예요?”
전화를 끊은 사토시에게 숙희가 물었다.
“아, 그때 봤던 그 젊은 친구.”
“아. 우리 식당에 왔던. 누구라고 했지요?”
한해가 두 번이나 직접 설명해줬는데 또 잊어버렸다. 그녀의 기억은 점점 더 빨리 사라지고 있다.
“원양어선 타다가 만난 친구야.”
“그래요? 언제 한번 또 데리고 와요. 맛있는 생선구이 해주게.”
“그래. 그러지.”
신청한 사람들을 모두 태우고, 출석체크를 마친 관광버스가 출발했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가이드가 등장해 마이크를 잡았다.
“자 오늘은 말 그대로 꽃놀이 코스가 이어집니다. 예쁜 꽃들 보면서 힐링하시고 정말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저녁 식사까지! 풀코스로 준비되어 있죠. 기대되십니까?”
버스 안에 탄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고 사토시도 얼떨결에 따라쳤다.
“앞으로 한 시간 넘게 가야 하는데 우리 기사님이 깜빡 조실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릴레이 노래 자랑 한번 하려는데요. 어떠세요?”
다시 박수가 쏟아졌다.
“그럼 저부터 한 곡조 뽑아보겠습니다!”
가이드는 버스 안에 설치된 노래방 반주에 맞춰 ‘당돌한 여자’를 불렀다.
“일부러 안 웃는 거 맞죠? 나에게만 차가운 거 맞죠?”
관광객들은 금방 흥이 올랐고 다들 맞죠! 코러스를 붙였다.
가이드의 노래가 끝나자 다른 관광객들의 노래 신청이 이어졌다.
트로트도 있었고, 7080 옛날 가요도 있었고, 걸그룹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도 있었다.
숙희는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했다.
처음에는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어 얼빠져 있던 사토시는 숙희의 모습을 보며 미소가 지어졌다. 얼마 안 있어 그의 미소는 함박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는 속으로 말했다.
우리 숙희 행복해 보이네. 정말 오랜만에. 당신이 좋다면 난 매일 이런 버스를 탈 수도 있어.
가이드가 마이크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우리 어머님 아주 신나게 박수를 치시는데, 한 곡 하시렵니까?”
숙희는 마다하지 않고 마이크를 받았다. 정신없고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가이드에게 신청곡을 말했다. 가이드가 리모컨을 누르자 반주가 흘러나왔다.
“때로는 당신 생각에 잠 못 이룬 적도 있었지. 기울어 가는 둥근 달을 보며 타는 가슴 남몰래 달랬지.”
숙희는 마이크를 꼭 잡고 또박또박 노래를 불렀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향기로운 꽃보다 진하다고.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바보들의 이야기라고.”
흥겨운 멜로디였고 숙희도 신이 나서 부르는데, 사토시는 마음이 저렸다.
마주 보고 노래하는 숙희의 시선에 그는 부끄러워졌다.
나는 왜 더 일찍 용기내지 못했나?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느라? 법과 도덕의 벽을 넘지 못해서?
그의 복잡한 생각과 상관없이 숙희의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 먼 훗날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도. 오늘 밤 또다시 당신 생각에, 타는 가슴 남몰래 달래네.”
노래가 끝나자 관광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와 어머님 노래 정말 느낌 있으시다! 남궁옥분의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잘 들었습니다!”
가이드는 마이크를 사토시에게 넘겼다.
“아버님도 답가 해주셔야죠.”
사토시는 얼떨결에 마이크를 받았지만 즐겨 부르는 노래가 없었다.
하지만 버스 안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오른 상태.
노래방이라는 곳에 몇 번 가 본 적 없는 그는 젊은 시절에 좋아하던 노래를 골랐다.
반주가 나오자 가사만 제대로 따라 부르자는 심정으로 힘주어 노래했다.
“내 모든 것 다 주어도 그 마음을 잡을 수는 없는 걸까? 미소가 없는 그대는 모나리자.”
조용필의 노래 ‘모나리자’였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돌아서야 하는 걸까? 눈물이 없는 그대는 모나리자.”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신나는 노래를 부르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박수 치며 신나게 따라 부르는데 자꾸 마음이 슬픔에 젖었다.
“추억만을 간직한 채 떠나기는 너무나 아쉬워. 끊임없이 속삭이며 그대 곁에 머물지만, 이토록 아쉬워.”
결국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정녕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아 줄 수가 없나? 나의 모나리자. 모나리자. 그런 표정은 싫어…….”
눈물 흘리는 그를 보며 숙희의 얼굴에도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슬며시 손을 잡아주었다. 보일 듯 말 듯 끄덕여주는 그녀의 고갯짓에 사토시의 눈물은 더 뜨거워졌다.
*
“누나 무슨 일 있어?”
집에 들어온 레오는 깜짝 놀랐다. 레이나가 넋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
“오늘 강의 녹화 있다더니 잘 안 됐어?”
“내가 일 때문에 이러는 거 봤냐?”
“또 그 남자 때문이구나. 유부남.”
“아니. 오늘은 여자 때문에.”
“여자? 어떤 여자?”
“유부녀. 그 유부남 부인.”
“설마…… 누나가 만났어?”
“작정하고 만난 건 아닌데. 하여튼 어쩌다 마주쳤는데…… 뭔가 진 느낌이야.”
“그러게 왜 그런 관계를 시작하냐고.”
레오는 한숨을 푹푹 쉬더니 레이나 옆에 앉아 얼굴을 살폈다.
“혹시 맞았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막 머리 쥐어뜯고?”
“아니. 욕도 한마디 안 하더라. 그게 더 빡치게 만드네.”
“그건 무슨 심리야?”
“철저히 무시당하는 느낌이랄까?”
침대에서 주운 머리카락을 건네주던 수진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계속 살든 이혼하든 간에 너라는 여자는 별로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야. 이런 식?”
“와…… 그 여자도 대단하다.”
“심지어 내연녀한테 가장 궁금한 질문도 안 했어.”
“그게 뭔데?”
“자기 남편하고 잤냐고 안 물어보더라.”
“누나…… 제발…….”
“그래서 그 남자가 푹 빠졌나 봐.”
“그러다가 정말 이혼하는 거 아냐?”
“모르겠다. 오늘은 아무것도 모르겠어.”
레이나는 혼자 있고 싶다는 눈치를 줬고, 레오는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지금쯤 둘이 만났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
예고도 없는 방문이었다.
“왜? 내가 못 올 데를 왔냐?”
이태화 회장은 뒷짐을 지고 강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아닙니다, 아버지. 차라도 드릴까요?”
“됐다. 저녁 약속이 좀 멀리 있어서 가봐야 해. 잠깐 들른 거야.”
“앉으시지요.”
“아니다. 할 말이 많지도 않고.”
이 회장은 물끄러미 강을 마주 보았다.
아버지만큼 마주 보기 부담스러운 사람은 없었다. 강은 늘 아버지의 시선을 슬쩍 비끼곤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수진이하고는 무슨 일이 있는 거냐?”
강은 이를 꽉 물었다.
역시…… 벌써 감을 잡으셨네. 혹시 아내가 다 일러바치기라도 한 걸까?
일단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탐색을 해봐야겠어.
“수진이하고 저녁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너하고 사는 게 너무 재미가 없어 보여서, 사업이나 좀 해보라고 했다.”
모욕적인 표현이었지만 참을 수밖에.
“뭐라고 하던가요?”
“거절했지. 예상대로. 그냥 자기 일을 계속하겠대.”
“사업에는 별 흥미가 없어 보입니다.”
“너에게 흥미가 없는 거겠지.”
이런 식의 모멸감을 느낄 때마다 강은 패륜적인 상상을 하며 모욕을 견뎠다.
“신혼 초에 트러블이 생기는 부부들이 종종 있습니다. 잘 풀어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온 이유는 아주 간단명료한 우리 집안의 룰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강은 침을 꿀꺽 삼키고 기다렸다. 말로는 집안의 룰이지만 사실상 그냥 아버지가 멋대로 정한 룰일 테지. 다른 가족의 합의 따윈 필요 없으니.
“이혼은 절대 안 된다.”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강의 표정이 구겨졌다.
“절대 안 돼.”
이 회장은 다시 강조했다.
“이혼할 생각은 없지만……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은이는 곁을 떠났지만 그 아이는 지키고 싶다.”
아…… 결국 누나 때문이구나.
“어릴 때는 얼굴만 닮았거니 했는데, 결혼한 뒤에 보니까 당찬 성격도 꼭 닮았어. 마치 빙의한 것처럼.”
“아버지. 그건 그냥 우연일 뿐입니다.”
“당연히 우연이겠지. 하지만 세상에 우연만큼 무서운 게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겨우 그런 이유로…….”
이 회장의 커다란 손이 강의 얼굴을 후려쳤다.
횃불로 얼굴을 지지는 느낌이랄까.
불시에 뺨을 맞은 강은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겨우 그런 이유?”
이 회장은 일으켜줄 생각도, 미안한 기색도 없이 강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강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섰다.
“우리 역사를 봐도 알 수 있지. 후계자가 없는 후계자만큼 위험한 후계자는 없다. 말장난 같으냐?”
“무슨 뜻인지…….”
“너에게 자식이 없는데 이 왕국을 너에게 물려준다면?”
“아…….”
“내가 너를 후계자로 정한 이유는 하나야. 내 핏줄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네가 그 줄을 끊어버린다면…… 나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줄을 이어줄 대안을 찾아야겠지.”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배다른 형제들을 의식하게 만드는 발언.
“너 없이도 회사 잘 돌아가. 그러니 너는 대를 이을 생각이나 해. 알겠어?”
강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번지는 피비린내를 음미하면서.
이에 찍혀 볼이 터진 모양이었다. 고막이 터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
수진은 강의 회사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은 저녁을 먹고 싶었지만 그녀가 식사는 거부하고 차나 마시자고 했다.
“일찍 왔네?”
수진을 발견한 강은 미소를 띠고 다가와 마주 앉았다.
차를 주문하고, 한 모금씩 입을 축였다.
“이렇게 급하게 대화를……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수진은 더 이상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이미 생각 많이 해봤어.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어.”
“나는 당신 없이 잘 살겠던데.”
“미안해. 레이나를 집에 들인 건 정말…….”
“미안할 일을 저질러놓고 더 미안할 일을 또 저지른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믿어줄 수 있을까?”
수진의 목소리는 배우자의 폭력과 외도를 함께 당한 사람 같지 않게 차분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변명하려고 만난 거 아니야. 다 내가 잘못했어.”
수진은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물었다.
“다 내가 잘못했는데. 집에는 들어왔으면 좋겠어.”
“싫은데?”
“각서라도 쓸까? 또 폭력을 행사하거나 외도를 하면 별거도 각오하겠다고?”
“각서라. 그런 거 10년, 20년 전에나 유행하던 거 아냐? 이강 씨. 시대가 변했어. 이미 당신이 저지른 일로 이혼감이야.”
이혼이라는 말에 강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아버지에게 맞은 뺨이 아직도 얼얼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말했잖아. 시간이 필요하다고.”
수진은 강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강은 미간에 깊은 주름이 진 채로 차를 마셨다. 한숨을 쉬고, 주변을 돌아보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는 어디서 잤어?”
“내가 왜 그걸 보고해야 해?”
강은 입술을 꽉 오므렸다. 까딱했으면 이 말이 튀어나갈 뻔했다.
‘강한해랑 잤냐? 좋았어?’그는 계산된 말을 내놓았다.
“걱정되어서 그러지.”
“병 주고 약 주네.”
“레이나와 마주친 일도 유감이야.”
“아니. 난 그 일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 많은 것들이 명확해졌거든.”
“수진아. 그건 정말 오해야. 우리 어제…….”
“이런. 당신은 나를 하나도 모르는구나. 내가 고작 어젯밤에 당신이 그 여자와 잤냐 안 잤냐를 갖고 이러는 거 같아?”
“그럼 뭐가 명확해졌다는 거야?”
“그 여자는 명확히 당신에게 빠져 있더라. 쉽사리 떨어지지 않을 거야.”
“수진아. 네가 원한다면 나 레이나와 완전히 인연 끊을 수 있어. 다신 안 볼 수도 있어.”
“왜 거기 조건이 붙어? 내가 원한다고 하지 않으면? 계속 만나고, 집에 불러들이고 그럴 거야? 내가 원하는 원하지 않든…… 신혼집에 여자를 끌어들인 일은…….”
수진은 기가 막혀서 말을 끝맺지 못하고 웃었다.
“끔찍하지. 나도 알지.”
“끔찍한 기억이 사라질 때까지라도, 좀 떨어져서 냉각할 시간을 갖자는 거야.”
“집으로 들어와. 우리 집 넓잖아. 얼마든지 서로 안 부딪치고 지낼 수 있어. 내가 정말 조심할게. 네가 먼저 말 걸 때까지 아예 인사도 안 하고 지낼 수도 있어.”
“나 어제 생명의 위협을 느꼈어. 그런데 내 머리채를 틀어잡고,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던 사람의 말을 바로 다음 날 믿으라고?”
강은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금방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경찰서에서 연락 올 거야.”
“뭐라고?”
“어젯밤에 경찰서 갔었어. 가정폭력 신고했으니까. 오늘 연락이 안 왔다면 내일이라도 연락 갈 거야. 있었던 일대로 말해주길 바라.”
“너 진짜 무서운 애구나?”
“내가 처음부터 그랬어? 당신이 날뛰는 거 바보같이 다 받아줬어.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이러지 말자, 수진아.”
“이강 씨. 당신이 이럴수록 지금은 역효과만 난다는 거 모르겠어?”
“다 좋은데 제발 집에만 들어와.”그는 수진이 한해와 한 침대에서 뒹구는 장면이 상상될 때마다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분명히 싫다고 했어. 그 말 하려고 본 거라면,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수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편이 또 손목을 아프게 한다면 참지 않고 소리 질러야지. 그가 또 길을 가로막는다면 재차 경찰에 신고해야지.
그러나 강은 잡지도 막지도 않고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있는데, 그것만 듣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