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였다. 33화
한해는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
“왜 이렇게 연락이 늦었어?”
“경찰서에 갔다가 병원에 들르느라고요.”
한해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경찰서에 다녀왔다고?”
“네. 엄연히 폭행을 당했으니까. 바보처럼 그냥 참는 일은 이미 많이 했어요.”
“그럼 강이를 고소한 거야?”
“고소는 아니고, 가정폭력으로 신고했어요. 조만간 조사를 받겠죠. 병원에 가서 사진도 찍고 진단서도 받았고요.”
강은 통화를 하면서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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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병원 앞 벤치에는 둘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워낙 똑 부러지는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호할 줄이야.
“뭘 그렇게 봐요?”
“좀 놀라서. 강이도 예상 못 했을 거야.”
“그렇다면 충격 받고 배우는 게 있겠죠.”
묘한 대답이었다. 배우는 게 있을 거다…….
한해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일단은 그녀를 지켜줄 뿐.
“오늘 밤에 지낼 곳은 있어? 호텔로 가야 하나?”
“그래야겠죠.”
그녀는 대답을 하자마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핸드폰만 들고 나왔지. 택시비도 병원비도 폰으로 입금했잖아.
한해 오빠한테 카드를 빌릴까? 아까 실랑이를 벌이며 몰골이 엉망인데, 이 상태로 신용카드만 달랑 들고 호텔에 가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진 않을까?
수진은 비참하고 처량한 마음을 이겨내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한해는 그녀의 당혹스러운 표정에서 상황을 읽었다.
그녀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혼자 자긴 아무래도 불안하지?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지내도 좋아.”
그녀가 혹시라도 민망해하지 않게 괜히 주절주절 설명을 붙였다.
“지내긴 전혀 불편하진 않을 거야. 어차피 2층 주택이고 각층에 침실이 있어서 나랑 부딪칠 일도 없고.”
“집주인한테 허락 안 맡아도 돼요?”
“혹시나 해서 아까 오면서 물어봤어. 언제든 웰컴이라고 하시던데.”
“고마우신 분이네요.”
“곧 뵐 날이 있을지도.”
“그래요. 그럼 오늘 밤만 신세 질게요. 오빠한테도 고맙고…… 또 정말 민망하네요.”
“고마운 건 접수. 부끄러울 건 뭐야.”
“결혼해서 잘 사는 모습 보여줄 거라고 했는데…….”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잖아.”
“그렇긴 한데,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인생은 좀 그렇잖아요,”
“나도 그래.”
지금 이 순간만 빼고.
한해는 속으로 덧붙였다.
“많이 피곤해요. 이제 좀 씻고 자고 싶어요.”
“당연히 그렇겠지.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다섯 글자가 수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끝내주는 집이 있지. 신혼집 가격으로 치면 상위 0.1% 안에 들 호화로운 집이 있지. 그 집에는 남편도 있고 내 물건들도 있어. 익숙한 침대도 있고.
그런 집을 뛰쳐나와 남의 집에 신세를 지러 가는데…….
왜 이리 편안하고 기대가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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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방문이었다.
지난번에 잠깐 들렀을 때는 정원에서 차만 마셨는데, 집 안에 들어온 그녀는 넓은 공간과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감탄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예술품들이 과하지 않게 집안을 장식하고 있어 집주인의 고상한 취미와 방대한 여행기록을 짐작케 했다.
“사토시 씨라고 했나요? 그분은 어떤 분인가요?”
“사랑꾼.”
한해의 대답에 수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농담 아닌데.”
“오빠만큼?”
“내가 무슨 사랑꾼이야.”
대거리할 말을 찾지 못한 수진은 괜히 집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어딘가로 사라졌던 한해가 반바지와 박스티를 건네주었다.
“너한테 많이 클 것 같긴 한데, 잠옷으로는 괜찮을 거야.”
한해의 옷을 건네받은 수진은 잠시 옛 생각에 젖었다.
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살 때는 오빠네 집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장난으로 오빠 옷을 입어보기도 하고.
“고마워요.”
수진은 더 멜랑콜리해지기 전에 얼른 인사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한해가 작업실로 쓰는 공간이었다. 여러 대의 트레이딩용 모니터와 PC가 세팅되어 있었고 안마 의자와 간단한 운동기구도 놓여 있었다.
“대단하네…….”
수진은 혼잣말을 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더운물로 몸을 씻다 보니 몸 곳곳에 생긴 상처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상처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한 남편의 얼굴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모두가 일그러진…….
당신. 왜 이랬어? 내가 참고 또 참아줬잖아.
망가졌음을 인정한다고 그 망가짐이 바로 펴지는 건 아니야. 죄를 고백한다고 다 용서받을 수 없듯이.
당신의 횡포를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이유가 당신을 덜 사랑해서라고 한다면…….
응. 나는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나 봐. 그것 역시 인정할게.
그러나 내가 계속 망가진 당신을 받아주고, 외도를 참아주고, 폭력을 견뎌준다면…… 당신은 계속 더 망가질 거야. 결국엔 나도 부서지겠지.
이제 우린 어떡하지? 당신은 경찰에 불려갈 거고, 당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똑똑히 봐야 해. 그럼 좋아질까? 나아질까? 기대해도 될까?
이렇게 슬픈 샤워가 또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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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사이즈는 더 큰 반바지와 맨투맨 셔츠를 입은 수진이 1층으로 내려왔다.
“어…….”
그녀를 본 한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뭐예요. 그 정도로 이상해?”
“아냐. 이상한 게 아니라…….”
한해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렸다.
고운 사람은 미운 데가 없고 미운 사람은 고운 데가 없다.
그녀는 뭘 해도, 뭘 입어도 예쁘다.
그녀의 몸에서는 갓 씻고 나온 향기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언제나 혼자 심야의 시간을 견뎌내던 공간에 그녀가 함께 있었다.
끔찍한 이유 때문에 피신해 온 처지인데 지금 이 순간이 왜 이렇게 달게 느껴질까? 어린 시절 폭우나 태풍이 몰아칠 때 집 안에 꼭 붙어 있으면서 느끼던 안온함 같은?
둘 사이에 고여 있던 정적을 꼬르륵 소리가 흔들었다. 그녀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저녁 안 먹었어?”
“좀 불편한 자리여서 많이 먹지 못했더니.”
“많이 먹었다 해도 오늘 같은 날엔 다 소화되었겠네. 야식 콜?”
수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식을 한 번도 안 시켜봤는데, 뭘로 할까?”
“그냥 내가 라면이나 끓여 먹을게요.”
“왜 나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은 안 해?”
그녀가 또 미소 지었고 한해는 가볍게 한숨 쉬었다.
가련한 신세인데, 미치도록 귀엽네.
사이즈 큰 남자 옷을 입고 웃는 여자는 상어만큼 위험하다는 생각을 얼핏 하면서, 한해는 부엌으로 향했다.
“저도 도울게요.”
그녀가 따라오려고 했지만 한해가 막았다.
“손님은 TV나 보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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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TV를 보면서 라면을 먹었다.
한해와 나란히 앉아 면을 건져 먹던 수진은 결국 감탄하고 말았다.
“어떻게 라면을 이렇게 맛있게 끓여요?”
“내가 라면을 몇 번이나 끓여봤을까? 식당 주인 말고는 나보다 많이 끓여본 사람 없을걸?”
“원래 배에서 라면 많이 먹어요?”
“그럼. 만만한 게 라면이니까. 대신 온갖 조리법을 다 동원하지.”
“이를테면?”
“온갖 해물과 생선, 미역을 다 시도해봤어. 매운탕인지 라면인지 구별이 안 가는 경우도 많고.”
“오늘 라면의 레시피는?”
수진은 연신 면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라면 스프는 3분의 2. 냉동실에 잘라놨던 꽃게로 국물을 내고. 계란 하나는 풀고, 하나는 반숙으로 익히고. 고명은 파와 약간의 숙주로.”
“요리네. 라면이 아니라.”
그녀는 국물까지도 남김없이 비웠다.
시아버지와 먹었던 저녁 식사 가격이 얼마쯤이었을까? 그것보다 두 배쯤 맛있네.
“기억나? 우리 어릴 때 사발면 많이 먹었는데.”
한해의 말에 그녀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어떻게 잊겠어. 햇살 좋던 바닷가에서 후후 불어먹던 우리들의 사발면.
면을 다 삼키기도 전에 모래사장을 내달려 바다로 뛰어들기도 했지.
아직 몸 곳곳의 상처는 그대로였고 손가락은 붕대로 감긴 채였지만 마음의 상처는 치료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작 한밤의 라면에.
한해도 그녀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아까 강의 손아귀에 잡혀 있을 때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던 표정이 이제 한결 나아 보였다.
그래. 이걸로 오늘은 족해.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 실례를 범하지는 말자.
아직 그녀의 결혼은 진행 중이고, 나는 아주 오랜 친구로서 쉼터와 라면 한 그릇을 제공해준 것뿐이니까.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수진은 TV를 보며 슬며시 흘렸다.
“고마워요. 아무것도 묻지 않아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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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마지막 이벤트는 설거지였다.
손님이니 얼른 들어가서 자라는 말을 기어코 듣지 않고, 그녀는 함께 설거지를 했다.
그래봤자 냄비 하나 그릇 둘과 수저였지만 한 명은 씻고 한 명은 헹구는 분업으로 설거지를 마쳤다.
그리고 자러 갈 시간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 고민은 해가 뜬 다음에 해.”
“그럴게요. 오빠도 잘 자요.”
한해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저 힘내고 위로해주는 의미로.
그러나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그녀는 헐거운 옷을 손으로 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한해는 일 층에서, 수진은 이 층의 침실에서 잠을 청했다.
정원에서 들려오는 풀벌레들의 노래 소리를 함께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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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술집.
맥주와 칵테일, 위스키를 가리지 않고 파는 어두컴컴한 가게 구석에 강와 레이나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레이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술 한잔하겠냐는 메시지를 보냈고 강은 늦은 시간인데도 순순히 나왔다.
그의 표정은 악마에게 영혼을 절반쯤 강탈당한 사람 같았다.
연거푸 여러 잔의 위스키를 마시도록 놔둔 뒤, 그의 몸짓이 술기운에 조금씩 흔들릴 때쯤에야 레이나가 물었다.
“오빠 얼굴이 왜 그렇게 안 좋아?”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와이프랑 또 뭐가 안 좋구나.”
“이번엔 아예 집을 나갔어.”
“뭐라고? 그럼 오빠 혼자 있다가 나온 거야?”
“응.”
“아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이젠 나도 모르겠어. 수진이가 정말로 결혼 직후부터 강한해와 계속 연락하고 만난 건지…… 아니면 수진이 말대로 정말 우연인 건지. 그런데 그런 식의 우연이 계속…….”
우연이 계속되면 운명이라는 말이 떠올라 강은 입을 다물었다.
레이나는 물을 타지 않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만약 와이프가 계속 강한해와 연락하고 만나왔다면? 이혼이라도 할 거야?”
강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아까 손찌검이 있었어.”
“뭐라고?”
“나도 많이 놀랐어. 집에 들어갔는데 와이프가 그 새끼랑 어릴 때 찍은 사진을 보면서 울고 있잖아. 내가 제정신이었겠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알아.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안 되지. 수진이 성격에 집을 나간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 정도로 믿지도 못하고 참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같이 살아?”
“강한해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모든 게 완벽했을 텐데.”
“오빠. 거짓은 얕은 무덤 같은 거야. 운이 좋으면 오래 감춰져 있지만 제대로 비가 오면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레이나. 나는 왜 수진이를 못 버리지?”
강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레이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버리고 싶어?”
강은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버리지 못하면 계속 이렇게 불행할 텐데? 손찌검까지 나올 정도로 미쳐버릴 텐데?”
“나도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가.”
“맞아.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거야. 하지만 결혼은 머리로 할 수도 있고, 그편이 더 낫다는 사람들도 있어.”
“날 봐, 레이나. 난 태생부터 비정하고 메마른 인생이 정해져 있는 놈이야. 적어도 결혼만큼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끌리는 사람과 하고 싶었어.”
“그냥 끌리는 정도가 아니라 정신이 나가니까 문제잖아.”
“너무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결혼해서는 안 되는 걸까?”
“오빠의 착각이야. 그건 사랑이 아닐지도 몰라. 그건 마치 어릴 때 처음 본 존재를 엄마로 인식하고 계속 집착하는 어린 동물들 같은 심리일 지도 모르지. 아니면…….”
레이나는 머릿속에 있는 단어가 입으로 안 나와서 술 한 모금으로 불러냈다.
“종교적인 차원이 되어버린 걸지도.”
“종교적인 차원이라…….”
“오빠는 와이프를 숭배하고 있는지도 몰라.”
“숭배하는 대상을 괴롭히고 때려? 부정을 저지르고?”
“숭배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서 일부러 위악적인 행동을 하는 거지. 예전에 기독교가 처음 로마에 퍼졌을 때도 그랬어. 예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자꾸 커져가는데, 그 사실이 두려워서 예수를 부정하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귀족들이 꽤나 많았어.”
“아는 것도 많다.”
“아무나 일타강사 하냐.”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미치겠어. 지금도 수진이가 강한해 그 새끼하고 같이 있을 것 같아.”
“둘이 잤다고 생각해?”
강은 극도로 괴로운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아마도 오늘 밤.”
“연락해봤어?”
“아니. 아까 내가 얼마나 수진이를 붙잡았는지 네가 봤다면…… 노예보다 더 비굴했어.”
“주인을 때리는 노예는 없지.”
“내가 왜 그랬을까? 완력만 쓰지 않았다면 집을 나가진 않았을 텐데.”
강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꿍꿍 내리찍고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레이나는 그 모습이 가여우면서, 동시에 자신의 모습이 웃겼다.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하는데, 너는 연민을 느끼니? 너도 참 제대로 미쳤다.
그녀는 결심했다. 오늘만큼은 먼저 그를 안아주지 않겠다고.
와이프한테 보여주었던 숭배와 비굴함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간절함을 보여줘야 위안을 주겠다고.
그런 식으로 조금씩 길들이다 보면…….
언젠가는 뺏을 수 있을까? 너의 심장을?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수진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자는 곳이 바뀌어서일 수도 있지만 아예 몸 자체가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만큼 오랜만의 달콤한 잠이었다.
2층 침실 창문 밖에서 하도 새소리가 사랑스러워 창문을 열고 봤더니, 놀랄 정도로 창문과 가까운 거리에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나뭇잎을 만져보았다. 잎도 많고 꽃도 예쁘고 새가 사는 나무라니.
내가 이렇게 건강했구나. 내 몸이 원래 이렇게 가볍고 감각이 선명했구나.
그녀는 한해가 어제 챙겨준 칫솔로 이를 닦고 가볍게 세수를 했다.
조심스럽게 1층으로 내려갔더니 좋은 냄새가 났다.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는 한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다가가도 모를 정도로 열중하고 있었다.
“부지런도 하셔라.”
수진의 목소리에 한해는 깜짝 놀라 돌아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굿모닝 수진.”
“정말 굿모닝이에요. 어제 그 난리를 쳐놓고선, 남의 집에서 너무 잘 자버렸네.”
“얼굴 좋아 보여.”
“그렇죠? 내가 봐도.”
그녀는 한해가 만들고 있는 음식을 힐긋 엿봤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오랜만에 오믈렛을 만들어봤지.”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어제 라면 솜씨 봤지? 잠시만 기다려. 눈물 나게 맛있는 오믈렛을 대령할 테니까.”
정확히 10분 뒤에 둘은 정원 테이블에 마주 앉아 오믈렛을 먹었다. 햄, 치즈, 토마토, 양송이, 양파 등등 여러 가지 재료가 두툼하게 들어가 풍미가 제대로 났다.
캡슐 커피로 뽑아준 커피도 후각이 신날 만큼 맛이 깊었다.
“오빠 브런치 카페 열어도 대박 나겠다. 야외여서 더 맛이 좋은 건가?”
수진은 싱그러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한테 시집오는 여자는 좋겠다. 부엌에 들어갈 필요가 없으니까.”
한해의 너스레에 수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매일 이렇게 아침 차려주려고요?”
“그럼.”
“뭐야…… 질투 나네.”
“그럼…….”
한해는 말을 맺지 않고 얼버무렸다.
뭉게구름이 둥둥 떠 있는 새파란 하늘 아래, 오믈렛을 먹고 있는 수진이가 내 옆에 있네.
완벽한 순간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는 정말 오랜만에 신에게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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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만에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호텔에서 며칠 지내야 할지, 수진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단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해야 하기에 집에는 들러야 했다.
수진은 회사에 전화해서 오늘 조금 늦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남편이 출근했을 시간이 지난 뒤에 집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문 앞에서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