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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27화 (27/92)

27화

수진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어둠이 아니었다면 들켰을 동작이었다.

“나는 망가져 있었어. 너를 처음 만나기 전부터.”

수진은 남편을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렸다. 중학생이었는데 그때부터 망가져 있었다고?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학대를 당했어. 그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당신도 짐작할 거야.”

말 사이사이로 거친 한숨이 섞였다.

“주먹으로 맞고, 발에 짓이겨지고, 목이 졸리고…… 뭐 이런 건 예사였어.”

끔찍한 상상에 수진은 신음을 흘릴 뻔했다.

“가정폭력 뉴스들이 매일 같이 포털에 실리지? 내 얘기야. 나중에는 골프채에도 맞고 한겨울에 쫓겨나서 집 앞에서 무릎 꿇고 애원하기도 했어.”

지금이라도 깨어 있다고 말할까? 당신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였어. 똑같이 학대를 당했지. 난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 당신한테 집착하기 시작한 거야. 당신은…… 내 구원자처럼 느껴졌거든.”

아니에요. 난 당신의 구원자가 아니에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에요. 나 역시 마찬가지고요.

조금만 더 마음이 차오르면 그녀의 입이 열릴 기세였다.

“당신이 서울에 올라와서 같이 살면서 그 인간의 손찌검이 덜해졌지. 난 정말로 확신하게 됐지. 당신이 나를 구원하러 왔다고.”

결국 수진은 입을 열었다.

“안 자고 있어요.”

“응. 알고 있어.”

“아버님한테 얼핏 얘기를 듣긴 했어요. 배다른 자식들이 있다고. 당신의 형제들…….”

“말씀하셨구나.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하나같이 얼빠진 놈들뿐이니까.”

“아버님은 당신만을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하는 것 같던데, 왜 당신한테 그러셨을까요?”

“왜냐면 나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수진은 잠이 싹 달아났다.

“누나? 그건 무슨 얘기예요?”

“나한테는 세 살 더 많은 누나가 있었어. 난 기억이 없지만. 내가 일곱 살 때 누나가 죽었으니까.”

“아니 왜…….”

“엄마하고 나하고 누나, 셋이서 백화점에 갔었대. 누나는 백화점 위층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었고 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써서 엄마랑 같이 지하에 내려왔는데, 백화점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야.”

“아…… 설마…….”

“맞아. 당신이 아는 그 사건이야.”

“혼비백산한 엄마가 나를 데리고 1층으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백화점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있어서 위로 올라갈 수 없었어. 우리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왔고…… 누나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시체도 끝내 못 찾았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미안해요.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당신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강의 음성은 새카만 밤하늘에 퍼지는 달무리처럼 아련했다.

“아빠는 유독 누나를 좋아했대. 그런 표현 있잖아.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 누나는 아빠에겐 그런 존재였어.”

“누나의 죽음을 당신과 어머님 책임이라고 생각하셨군요.”

“본인은 인정한 적 없지만 내가 보기엔 그래.”

수진은 들어맞지 않던 퍼즐 조각들이 끼워지는 느낌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손주를 재촉하는 이유도…….”

“아마도. 어떤 심정인지 대충은 알겠어. 물론 심정적으로 이해가 간다고 아버지의 태도가 정당하다는 뜻은 아냐.”

“어머니가 가끔 이상한 눈빛이나 행동을 하시는 것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더해 죄책감까지 갖고 계셨으니까. 자살 기도도 여러 번 하셔서 정신병원에서 지낸 적도 있어.”

“세상에…….”

“당신이 보기엔 우리 엄마 정말 이상하지만, 내가 본 엄마의 모습 중 요즘이 제일 나아. 아버지도 그렇고.”

수진은 최악의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이 최상의 상태라니…….

내가 집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어땠을까?

짐작도 가지 않았고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놀라운 반전이 있어.”

“지금도 충분히 놀라워요.”

“당신이 울진에서 서울로 같이 올라와서 지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알아?”

“저도 그게 늘 궁금했어요. 아버님 같은 성격에 어떻게 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유가 있지. 당신…… 죽은 우리 누나와 무척 닮았어.”

“뭐라고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난 누나에 대한 기억이 없지. 하지만 사진은 많이 남아 있지. 누나가 열 살 때 사진을 보면…… 당신 어릴 때하고 정말 똑같아.”

“잠깐만요. 이거 너무 혼란스러워서…….”

“끝까지 들어.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설명하기 힘든 끌어당김? 그런 걸 느끼면서도 이유가 뭔지는 몰랐어.”

“당신 눈에만 닮아 보이는 거 아니에요? 제가 죽은 누나를 닮았을 리가 없잖아요. 피가 섞인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리. 난 모르고 있다가 아버지 얘기를 듣고 깨달았는데.”

“뭐라고요?”

“당신이 우리하고 같이 살기 시작한 뒤로 아버지가 신기하게도 얌전해지셨고 나는 폭풍 전야처럼 겁먹은 채로 지냈지. 언제 또 술 취한 아버지가 내 목을 조르려나. 언제 또 폭발해서 내 뺨을 후려치려나…… 그런데 어느 날 잔뜩 술에 취해 들어온 아버지가 혼잣말 하는 걸 들었어. 누나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이 누나랑 참 닮았다고.”

“누님 이름이…….”

“지은. 이지은.”

수진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님의 태도가 조금은 납득되었다.

다른 가족들에게는 폭군이나 다름없는 언행을 일삼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그녀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랬구나. 이 모든 게…….

“으스스해요. 지금 제 기분은 그래요.”

남편의 손길이 그녀의 몸을 천천히 감았다. 으스스한 한기를 막아주려는 것처럼.

그녀의 허리를, 어깨를 안전하게 안아주고 토닥여주었다.

“나는 망가진 채로 당신을 만났고, 당신에게 집착했어. 인정할게. 그런데 집착을 멈출 수 없고 그런 내 자신을 혐오해. 그래서 당신을 증오하고 사랑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복수심에 미친 짓을 하고, 그걸 합리화하고 후회하고 또 그런 내 모습에 화가…….”

“그만.”

수진은 남편의 손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당신의 사정, 당신 집안의 복잡하고 기괴한 이야기. 그래요, 다 좋아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나는 물건이 아니에요. 나는 이 집안에 잠시 일하러 들어온 사람도 아니고요. 이런 이야기들은 결혼 전에 알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알았다면?”

“아니…… 한 사람의 아내,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당연히 결혼 전에 알았어야 할 이야기라고요. 반응은 둘째 문제고요.”

“당신이 이 모든 사정을 다 알았다면 나랑 결혼했을까?”

“그 질문을 바꿔 말하면 당신이 이 모든 걸 나에게 속이고 결혼했다는 말이잖아요. 부당하잖아요.”

“그래서, 사기 결혼이다? 돌이키고 싶다?”

“왜 또 그런 식으로 말해요?”

돌이키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고, 요즘에도 불쑥불쑥 든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어마어마한 파장을 몰고 올 발언일 테니.

“난 어떻게든 당신과 잘해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누가 그랬는데. 노력해야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이건 결혼 생활이잖아요.”

“사랑은 아니다?”

“오오 제발. 말꼬리 좀 잡지 말아요.”

강이 처음 자신의 어린 시절 아픔과 집안의 비밀을 고백했을 때, 수진의 마음은 활짝 열렸다. 연민의 힘이 문을 연 것이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강의 비아냥에 다시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강은 침실의 어둠 속으로 마지막 읊조림을 흘려보냈다.

“나는 망가졌어. 당신이 고쳐줄 줄 알았는데.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는 비참해. 그래서 나는 나쁜 짓을 했고…….”

고해성사인가 술주정인가? 미치겠다…….

분노와 연민이 동시에 솟구쳐 올랐다. 그래도 남편이니까…….

“이리 와요.”

그를 안아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기처럼 품을 파고들었다.

“불쌍한 사람…….”

오늘 밤은 당신을 가여워만 할게요.

“자요. 늦었어요. 내일 또 얘기하면 되니까.”

한 뼘쯤 열려 있는 커튼 사이로 깊고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그녀는 남편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며 자문했다.

연민만으로 살 수 있을까? 연민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까? 평생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참고 또 참고 있는 내 분노가 폭발하면 어떻게 될까?

그녀의 품에서 남편은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취중진담을 넘어서는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강한해…… 진수진…… 이것들을…… 죽여버린다…… 개XX…….”

수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남편을 밀어냈다.

당신 말이 맞아. 당신은 영혼이 망가졌어. 처참하게 망가졌어.

.

.

.

저명한 정신분석학자들의 이론을 들먹일 필요 없이 역사가 증명한다.

고백을 한다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특히 영혼이 뒤틀려 있는 사람에게 고백이란 또 다른 죄를 저지르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강은 아침부터 기분이 엉망이었다. 하필 레이나와 함께 있다가 한해를 맞닥뜨린 어제저녁은 최악이었고, 엉망인 기분을 달랜답시고 혼자 술을 마신 건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술에 취해 아내에게 이런저런 헛소리를 늘어놓았던 일이 파편적으로 기억났다. 깨진 거울 조각마냥 조금씩.

아버지에게 학대당했던 일을 털어놓았던 것 같고, 누나 얘기도 했지. 당신을 사랑하고 집착하고 증오한다는 말도 했었나?

빌어먹을…… 내 영혼의 치부를 내 입으로 말해버렸어.

정작 아내는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했는데도, 강은 수치심에 괴로워했다.

아침에 아내의 얼굴 보기가 싫었던 그는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드레스 룸에서 슈트를 입고 있는데 아내가 들어왔다.

“속 괜찮아요? 북엇국 끓여놨어요. 한 숟갈 뜨고 가요.”

“괜찮아.”

“다 차려놨어요. 국물이라도 좀 마시고 가요.”

강은 재킷을 입으려다 말고 식탁으로 향했다.

쓰린 속을 달래며 국물을 떠넘기고 있는데 아내가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기억나요? 어제 나한테 털어놓은 비밀들.”

강은 대수롭지 않은 척 연기했다.

“뭐 대단한 거라고. 비밀까지.”

“여보. 내 앞에선 쎈 척할 필요 없어요. 나 당신 아내예요. 내 앞에서는 솔직해줘요.”

“동정해달라고 한 말 아니야.”

“그럼 왜 했어요? 차라리 끝까지 하지 말지.”

수진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해장국까지 끓여준 아내에게 다시 이런 냉대라니. 어젯밤엔 분노와 연민 중 연민만으로 그를 안아줬으니, 오늘은 화를 낸다.

“내 입장에선 속은 느낌, 당한 느낌인데, 자고 일어나서는 대수롭지 않다고? 이게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에요?”

“아하. 드디어 본심이 나오시네. 사기 결혼을 당했다?”

“말조심해요.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요.”

강은 느낄 수 있었다. 가슴속 가장 깊은 숲속에 사는 괴물이 깨어났음을.

새빨간 혀를 내두르며 거대한 입을 벌리고 나를 집어삼킨다. 이제부터 나는 내가 아니다…….

그는 숟가락을 딱 소리 나게 놓고 일어섰다.

“안 참으면? 어쩔 건데?”

수진은 섬뜩한 폭력의 공포를 느꼈다. 곁을 지나치며 강이 내뱉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건방지게…….”

*

하루에 1%. 쉬워 보이던 그 목표는 며칠째 요원한 것이 되었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 패권 경쟁을 하면서 무역에도 불똥이 튀었다. 두 국가 간의 무역 제제는 국내 기업들에게까지 엄청난 여파를 끼쳤고, 주식 시장은 며칠째 곤두박질이었다.

하루 1% 이익은커녕 마이너스를 보지 않기 위해 해외 시장을 공략해 봐도 소용없었다. 가능한 수단을 총 동원해서 손실을 줄이는 방법밖에.

어젯밤부터 수진에 대한 걱정도 이어지고 있는데 일까지 잘 풀리지 않자 몸이 축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좀 걷다 들어와야지.

막 산책을 나가려던 참에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저는 레이나예요. 이름이 특이하셔서 SNS 계정 찾기가 쉬웠네요. 한해의 SNS에 달린 비밀 댓글이었다.

-잠깐 만나요. 꼭 할 얘기도 있고 하니. 그녀는 개인 연락처를 남겼다.

한해는 검지와 중지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어젯밤에 댓글을 남기려다가 그만두었는데, 오늘 이렇게 연락이 왔네. 운명이라는 뜻일까?

꼭 할 얘기가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당연히 수진이와 강이와 관련된 얘기겠지? 그렇다면 만나야지.

그는 레이나의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네.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죠. 편한 시간을 알려주십시오. 저는 늦은 오후부터 시간이 가능합니다. 바로 답장이 왔다.

-내일 저녁은 어때요? 한해는 고개를 갸웃하고 답장을 보냈다.

-안 될 거 없죠.

.

.

.

외모부터 성격, 능력치, 식성까지 전부 다른 남매의 유일한 공통점. 레이나와 레오 모두 테니스를 좋아했다.

팡팡 튀는 공소리와 바닥을 미끄러지는 테니스 슈즈의 마찰음, 그리고 금방 땀을 짜내는 격한 움직임. 코트 위로 남매의 격전이 펼쳐졌다.

모든 면에서 승부욕으로 가득한 누나와 그 누구와도 싸우려 들지 않는 동생의 승부는 누나의 승리로 끝났다.

남매는 벤치에 앉아 스포츠 음료를 마시며 땀을 식혔다. 레이나는 파라솔이 만들어주는 그늘 바깥쪽으로 툭툭 발을 뻗어 햇살을 걷어차는 장난을 쳤다.

“누나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이네?”

“요즘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겨서.”

“또 그 유부남 관련한 얘기지?”

“그럼. 일 얘기 돈 얘기는 이제 시시해. 연애가 제일 재밌지. 특히 위험한 연애.”

“또 무슨 일인데?”

“그 남자 아내한테도 남자가 있더라고.”

“뭐라고? 그럼 이미 와이프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바람까진 아니고. 요즘 세상에 말이 되나 싶은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간 여자를 지켜주겠다는 호구가 하나 있어.”

“호구 맞네.”

“어디 좀 모자란 사람이냐? 그렇지 않아. 완전 비주얼 갑. 재력도 상당히 있어 보이고, 카리스마 완전 쩔어주시고.”

“그런 사람이 왜 하필 유부녀한테 미련을 못 버리고 그래?”

“그래서 내가 알아보려고. 내일 저녁에 호구를 만나보기로 했거든.”

“참 희한하네. 난 진짜 누나가 이해가 안 가. 그 사람을 누나가 왜 만나?”

“너 같은 연애초보는 상상도 못 할 작전이 있어.”

“아 몰라. 알고 싶지 않아.”

“우리 동생님 연애는 어때?”

“누나보다는 훨씬 더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지. 조금 느리지만. 속도 조절 잘하고 있어.”

레오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레이나는 단번에 무시했다.

“그거 비정상이야. 사랑은 휘몰아치는 거야. 비이성적이고. 제어가 안 되는 게 사랑이지. 정말 사랑하는데 어떻게 조금 느릴 수 있냐?”

“편견을 좀 버려.”

“기습 공격을 한번 해봐.”

“이를 테면?”

“슬쩍 여행을 제안해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려던 레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에이……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안 되는 거야. 연애도 테니스도. 기습을 몰라.”

레이나는 도발하면서 레오의 다리를 테니스 채로 툭툭 쳤다.

“지난번에는 내가 이겼잖아.”

“아쭈? 그럼 한 판 더?”

남매는 다시 코트에 섰다. 레이나가 공을 띄우고 힘찬 서브를 먹였다.

힘찬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창작의 고통이 유별나게 아플 때는 이런 날이다. 아무런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하루가 저물 때.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되어버린 시간을 보며 소월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실 어젯밤에 썩 괜찮은 멜로디가 떠올라서 음정만 녹음해놓고 오늘 간단하게 미디 작업을 해보았다. 그런데 뒤늦게 그 멜로디가 원래 있던 노래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음을 몇 개 살짝 바꾸거나 리듬을 확 달리해서 표절 의혹으로부터 방어막을 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레오가 대여해준 녹음실. 트랙창이 가득 채워진 아이맥 앞에 앉아 있던 소월은 벌떡 일어나 침대겸용 의자에 벌러덩 누웠다.

“아이 씨. 하루 종일 뭐한 거냐.”

가사는 대충 써두었다. 한해를 생각하며 쓴 사랑의 엇갈림에 관한 가사였다.

좋은 곡만 나오면 착착 진행인데. 마음에 드는 멜로디가 안 떠오른다.

이럴 때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좋을 텐데.

그녀의 마음을 엿보기라도 했는지 레오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작업은 잘되어가나? -가사는 뽑았는데 메인 멜로디가 자꾸 표절로 빠짐ㅠ 꽉 막혔어…….-이런…… 우리 누나한테 제주도 리조트 회원권이 있는데 주말에 머리나 식히고 올까?

“엇! 이 자식 뭐야. 왜 이렇게 훅 들어와?”

소월은 혼잣말을 하고 답장을 보냈다.

-솔직히 좀 땡기…… 생각해보고 알려주게씀. 주말은 주말이고, 일단 당장 오늘 밤에 답답한 기분을 털어내야 했다.

레오에게 SOS를 청하려다가 한해의 번호를 띄웠다.

-오빠님. 오늘 저녁에 뭐함?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공포영화 하나 개봉했는데 같이 봐주면 안 돼? 한해의 메시지는 늘 답이 늦다. 써놓은 가사에 그런 내용도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답장이 왔다.

-그러자. 나도 기분 전환이 필요했어.

“오오오, 강한해 갑판원! 빠른 답장 칭찬해!”

또 혼잣말을 하며 메시지를 보내는 그녀의 발끝이 까닥까닥 신났다.

-그럼 같이 저녁 먹고 갈까?-그러자. 어디서 볼까?-오빠 집으로 갈까? 이제 집 구경시켜줄 때 되지 않았어? 잠시 후 한해가 ‘그래’ 짧은 승낙과 함께 네이버 지도를 링크해주었다.

-도착할 때쯤 전화해. 예스! 소월은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소월이 고마웠다. 어떤 때 보면 철없는 동생 같다가 가끔 축 처진 컨디션을 되살려주는 비타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아찔할 정도로 추락하던 주식 시장도 오후가 되어 극적 반등에 성공해 겨우 손실을 메꿨다.

“휴우. 정신이 하나도 없네. 무슨 이런 하루가 다 있냐.”

한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속도조절. 감정조절. 거리조절.

지켜야 할 것들을 되새기며 몸을 쭉쭉 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지금 초인종을 누를 사람은 소월밖에 없지.

인터컴으로 열어줄까 하다가 슬리퍼를 신고 나가서 대문을 열었다.

“전화하라니…….”

그는 말을 맺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소월이 아니라 수진이 서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모습으로.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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