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22화 (22/92)

하지만 모닝 키스처럼 기다리고 있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행복한 생기가 몸을 일깨웠다. 22화

-밤새 몇 페이지를 써봤어요. 피디님의 지도편달 덕분에 강렬한 도입부 완성!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야화 작가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문서 파일도 함께.

“오오, 진짜 빠르시네!”

수진은 당장 열어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출근 준비를 했다. 회사에 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봐야지.

날씨도 좋고, 버스와 지하철로 출근하기로 했다.

집을 나선 그녀는 집 앞 카페에서 커피 한 잔으로 카페인을 주입한 뒤 길을 걸었다.

어젯밤 한해와 함께 걷고 머물렀던 골목길과 놀이터를 지나면서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다 꿈은 아니었을까?

부활의 노래가 배경음악처럼 깔리는 착각 속에서 한해의 집 앞에서 멈추었다.

우리 또 그렇게 마주칠 수 있을까? 그걸 바라서는 안 되겠지.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인생이 서커스라고 생각해봐. 수진이 너는 높은 곳에 매달린 외줄을 타고 있어. 떨어지지 않고 잘 타면 너무 좋겠지. 나도 그걸 바래. 하지만 만의 하나 떨어질 수도 있잖아. 그럴 때…… 나는 너를 안전하게 받쳐줄 저 아래 그물 같은 존재였으면 좋겠어.’잘 지내요, 오빠. 바보 같은 생각 그만하고. 난 어떻게든 가정을 지켜보려 하니까.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어제 들었던 노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난히 파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어젯밤 쌓인 무거운 감정들을 후후 불어 날려주었다.

잘되겠지? 잘 될 거야!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남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출근하는 것도 못 봤네요. 충분히 시간이 있을 때 차분하게 대화를 좀 나눴으면 해요. 이따 퇴근하고 시간 어때요? 일찍 들어올 수 있나요?

.

.

.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팀장이 호들갑을 떨었다.

“진 피디. 어제 야근했더라? 왜 그러세요? 신혼 때 많이들 싸운다더니 혹시 어제 한바탕?”

와. 귀신이네.

“다 팀장님 같은 줄 아세요? 우리 신랑이 얼마나 스윗한데.”

수진은 팀장을 면박 주고 자리에 앉았다.

“야화 작가 미국 들어갔다고?”

어젯밤에 메일로 보낸 작가 동향 보고를 읽은 모양이었다.

“네. 그래서 모니터 의견 빨리 넘겨주려고 나왔던 거예요. 아, 마침 아까 원고 도착했어요.”

“헐. 벌써? 어디까지?”

“도입부라는데 어느 정도 분량인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출근해서 읽어보려고 아껴놨으니까.”

“아껴놓은 거 보내봐봐. 나도 같이 읽어보게.”

“알겠어요. 지금 보냅니다.”

수진은 팀장에게 원고를 전달해주고, 컴퓨터 화면에 원고를 띄웠다.

드라마 대본이 아닌 소설 형식으로 쓴 글이 펼쳐졌다.

자, 어디 한번 읽어볼까? 로맨틱 정치스릴러의 세계로 출발!

.

.

.

“와우.”

원고를 다 읽고 먼저 감탄사를 내뱉은 사람은 팀장이었다.

“진피도 봤어?”

“네, 저도 막 다 읽었어요. 몇 페이지 안 되긴 하네요.”

“첫 장면 강렬한데? 느낌 좋아. 대본 첫 번째 신이 뭐였더라?”

“사모펀드 사기 피해자가 자살하러 가는 장면이요.”

“그것보다 백배 낫다. 그거 너무 우울하고 칙칙한 느낌이었어.”

“그럼 듬뿍 칭찬해주겠습니다.”

수진은 야화 작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고 팀장님도 흡족해한다고.

비행기가 이륙했는지 야화 작가는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수진은 최근 1년간 드라마 시청률 순위표를 출력해서 살펴보았다. 작가가 흥행 트렌드를 참고할 수 있게 분석해주는 것도 피디의 몫이니까. 모든 피디가 다 그렇게 친절한 건 아니지만.

일에 열중하면서도 신경이 쓰이긴 했다. 출근길에 남편한테 메시지를 보냈는데 읽고도 답이 없었다.

서로 어느 정도는 참고 견뎌야하는 게 결혼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어젯밤 남편의 태도는 그녀가 용납할 수 있는 기준을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마치 남편이 앞에 있는 양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례하고 폭력적이었어. 그냥 이대로 넘어가면 또 반복될 수도 있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대화를 피하고 감정을 숨기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가 부부 간의 앙금이 쌓이는 거지. 불편하더라도 대화하고 솔직한 심정을 나눠야겠어.

왜 답이 없냐고 다그치려다가 꾹 참고 기다렸더니 메시지가 도착한 건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오늘 저녁 먹고 들어갈 거야. 늦을 거야. 손에 힘이 쭉 빠졌다.

남편이 늦게 들어와서가 아니었다. 메시지에서도 느껴지는 냉기 때문이었다. 당신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냉랭함의 표시.

지금 이렇게 싸늘하게 등 돌리고 외면할 상황이야? 아니잖아.

그녀는 남편을 이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내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

대화를 외면하는 배우자에게 계속 대화를 종용하면 왠지 초라해지고 굽히고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런 기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답을 보냈다.

-이럴 일이 아니잖아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같이 저녁 해요. 집에서 먹어도 좋고 아니면 당신 원하는 메뉴를 골라도 좋아요. 그때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 얘기하지 않았었나? 전송 버튼을 누르면서 생각했다.

여기까지야. 어젯밤 당신의 무례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처럼, 더 이상 대화를 조르는 건 비굴함이 될 테니까.

.

.

.

노력하고 있네.

강은 아내에게 도착한 메시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내는 노력하고 있다. 결혼생활에 최선을 다하려고.

나란 존재는 그런 존재인 거야. 노력을 해야 하는 그런 존재.

자연스럽게 감정이 생기고 바라보는 눈에 애정이 차오르는 존재가 아니라, 참고 노력하고 맞춰줘야 하는 존재인 거야.

강은 등받이가 높은 가죽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부부사이가 냉랭해진 탓을 모두 수진에게 돌리려고 머릿속 회로를 작동 중이었다.

당신이 신혼여행 중에 강한해와 연락하고 몰래 만난 것까지 내가 덮어주려 했어. 그런 짓을 했으면, 비즈니스를 위한 남편 부탁 하나 정도는 흔쾌히 들어줬어야지. 그걸 또 거부해? 남편의 자존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서 내가 벌을 준 거야.

마음 같아선 좀 더 괴롭혀주고 싶지만, 이번 일은 이 정도로 하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 답장을 보냈다.

-미안. 오늘 저녁에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어제 예민하게 굴었던 일은 미안하다.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지. 그는 비뚤어진 뿌듯함을 느끼며 전송버튼을 눌렀다.

더 이상 괴롭히진 않을게. 다만 네가 상처 낸 자존심은 내가 알아서 치유해줄 생각이야.

-리버 오빠~ 오늘 저녁 어때? 얼마 전에 친구랑 끝내주는 와인 바를 발견했거든. 스페인 사람이 셰프로 있는데 요리도 수준급이야. 그는 한 시간쯤 전에 온 레이나의 메시지에도 답을 해주었다.

-오키도키. 안 그래도 술 한잔 고픈 날이었어. 그는 조금씩 중독되고 있었다. 아내 몰래 나쁜 짓을 저지르며 느끼는 비뚤어진 우월감과 복수심에.

그것은 한번 느끼면 좀처럼 헤어나기 힘든 쾌락의 기제였다. 특히 연인 관계에서 오랫동안 을이었던 사람에게는.

그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자기 합리화를 구축했다.

수진아. 오늘 저녁까지만 하고, 내일부터는 다시 잘 대해줄게. 그러니 다신 나한테 상처주지 마. 예전처럼 널 갖지 못할까봐 안절부절 하던 내가 아니야.

그는 레이나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레스토랑 이름이 뭐야?-세르반테스.

*

오늘은 전업 투자자로 뿌듯해도 좋을 날이었다.

어제 예상과 달리 주식시장은 혼조세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지만, 한해는 정교하게 짠 전략 덕분에 1%가 조금 넘는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장을 마감했다.

어제 워낙 많은 돈을 잃어서 회복하려면 며칠이 더 걸릴 것도 같았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고 금방 원래 리듬을 되찾았다는 점이 더 중요했다.

그는 사토시 씨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연락했다.

“어제는 그렇게 징징거리더니, 오늘 잘 막아낸 모양이네.”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손실을 만회하려는 생각 자체가 위험요소야.”

“이제 알겠습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들이 몇 가지 있지. 남자와 여자는 절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거고, 정치인은 늘 국민을 속일 거고, 주식시장은 매일 열릴 거야.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그러니 절대로 어제의 손실을 오늘 만회하려고 하지 마.”

“이렇게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저녁이라도 사게 해주십시오.”

“흠. 오늘 저녁 먹으러 어디 갈 일이 있는데.”

“아, 선약이 있으신가요?”

“선약은 아니고. 나 혼자 가는 곳인데…….”

사토시 씨는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음…… 이 녀석을 한번 데려갈까?”

“어딘데 그러세요?”

“자네, 생선구이 좋아하나?”

.

.

.

사토시 씨가 한해를 데려간 곳은 번화가에서 조금 들어간 골목에 있는 백반집이었다. 간판도 창문도 모두 꽤나 낡아 식당이 버텨온 세월을 짐작케 했다.

식당 안에 들어가자 주인으로 짐작되는, 앞치마를 두른 초로의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손님이 온 줄도 모른 채 벽에 매달린 TV를 보며 실없이 웃고 있었다.

“이 사람이…… 장사하는 사람이 인기척을 몰라. 숙희야, 나 왔어.”

사토시가 꽤나 큰 소리로 말하고 나서야 숙희라는 이름의 주인은 고개를 돌렸다.

“어머, 연락도 없이. 웬일이래요?”

“식당에 무슨 일로 왔겠어. 밥 먹으러 왔지.”

옆에서 한해가 본 사토시의 태도는 뭐랄까,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손맛만큼 오빠 입맛에 맛는 데가 없지요?”

“무슨 소릴. 싼 맛에 오는 거지.”

“에휴 말이라도. 알았어요. 젊은 분은?”

“이 친구는 삼치. 나랑 나눠 먹지.”

“삼치 하나. 고등어 하나. 알았어요.”

숙희는 주방에 들어가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해는 사토시와 그녀의 관계가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일단 참았다.

잠시 후 그녀는 된장찌개가 팔팔 끓는 뚝배기 두 개를 테이블에 내놓았다. 구수한 냄새가 좁은 가게 안에 넘실거렸다.

“자, 여기 찌개 나왔고.”

곧이어 고소한 냄새를 가득 머금은 생선구이도 등장했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껍질이 식욕을 절로 자극했다.

“여기 삼치 하나 고등어 하나. 꽁치는 서비스로!”

한해는 꾸벅 인사하고 수저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사토시와 한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숙희는 녹차를 담은 일회용 종이컵을 들고 옆 테이블에 앉았다.

“오빠도 참. 오면 온다고 전화를 하지. 입술이라도 좀 발라놓게. 젊은 분도 같이 오셨는데 행색이 너무 꾀죄죄하다. 첫 인상이 좀 이래서 미안해요.”

한해가 손사래를 쳤다.

“별 말씀을요 어르신. 이렇게 맛있는 생선구이는 정말 처음 먹어보네요.”

“그래요?”

사토시도 끼어들었다.

“이 친구가 맛있다는 생선구이는 정말 맛있는 거야. 왠지 알아? 이 친구는 14년 동안 원양어선을 탔거든. 생선 박사라고 할 수 있지.”

“아! 그러면 같이 배를 타다가 알게 되었다는 그분?”

“응. 내 아들 같다고 했던.”

“에이, 오빠 아들치고는 너무 잘생겼다. 헤헤.”

사토시 씨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니까 예순 살쯤 되었을까? 잔뜩 주눅 들어 있던 그녀는 어느새 소녀처럼 웃고 있었다.

“껍데기만 번지르르하면 뭘 해. 진수 녀석도 외모야 번듯하지.”

“우리 진수가 가끔 욱해서 그렇지 걔 연예인이잖아요. 요즘 작품이 없어서 스트레스가 많은데 이제 드라마도 좀 하고 그러면…….”

“드라마는 개뿔! 가서 김치나 다른 거 가져와. 그때 먹었던 그 팍 삭은 거.”

숙희는 웃으며 눈을 흘겼다.

“그때는 시어 빠진 김치를 어떻게 먹냐고 타박하시더니, 맛있었나 보네. 알았어요!”

주방으로 들어가는 숙희의 뒷모습을 보는 사토시의 눈빛이 너무나도 아련했다.

한해는 아까부터 머리가 멍할 정도로 놀랐다.

지금까지 알던 사토시 씨의 모습과 너무 다른 모습이어서. 아무래도 숙희라는 분이…….

“선생님하고 연인 사이신가요?”

“쓸데없는 소리. 임자 있는 몸이야. 서방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다고.”

잠시 뒤 숙희는 색감 좋은 김치를 한 접시 내어왔다.

“자, 잘 익은 김치 대령이요.”

“음. 냄새 조오타!”

사토시와 한해는 남은 밥을 신 김치로 마무리했다. 숙희는 그들이 밥과 반찬을 싹싹 비우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자, 그럼 맛있게 먹었으니 선물을 줘야지.”

사토시은 아까 들고 온 선물 보자기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안 봐도 뭔지 알겠다는 식으로 씩 웃으며 보자기를 풀었다.

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을 잘 모르는 한해가 보기에도 화가의 솜씨 같았다.

“와, 이 그림은 또 언제 그리셨대? 너무 예쁘다.”

숙희가 그림을 보며 좋아했지만, 그녀의 반응을 세심하게 관찰하던 사토시의 표정은 참담하게 무너져 내렸다.

“날도 더워지는데 산뜻한 그림으로 바꾸자고.”

그는 왠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숙희가 들고 있는 그림을 건네받아 식당 벽에 걸었다.

원래 걸려 있던 꽃 그림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한해를 돌아보았다.

“다 먹었으면 가지.”

“아, 네 어르신.”

둘이 식당을 나가자 숙희가 배웅을 나왔다.

“뭐 하러 따라 나왔어? 들어가.”

“저도 하루 종일 갇혀 있어 답답해서 그러네요.”

“가게 문도 안 잠갔잖아.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아이고. 가져갈 게 뭐가 있다고 그래요?”

“돈 통에 장사한 돈도 그대로 놔두고선!”

“요즘 누가 현금으로 계산해요. 오빠나 그러지.”

사토시와 숙희는 티격태격하면서 나란히 걸었고, 한해는 몇 걸음 뒤에 따라갔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대로가 나왔고, 유리 외벽에 저녁노을이 번쩍이는 화려한 빌딩이 솟아 있었다.

숙희는 까마득하게 높은 건물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고. 높기도 하다. 저건 뭐하는 건물인고?”

사토시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왜?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어?”

숙희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나 같은 노인네가 저런 데를 왜 들어가요.”

“노인네는 무슨. 아직 환갑도 안 됐으면서. 요즘 숙희 나이면 청춘이지.”

“하하하. 청춘이라니. 지나가던 청춘이 웃겠어요.”

사토시는 입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눈가에는 애잔함이 번져 있었다.

“이제 택시 타고 들어갈게. 자네도 가게 들어가 봐.”

“그래요. 또 들러요. 다음엔 전화도 미리 좀 하고 오고.”

돌아서려던 숙희는 갑자기 한해를 휙 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이 잘생긴 총각은 누구라고?”

아까 그녀와 대화까지 나누었던 한해는 의아해하면서도 다시 인사를 올렸다.

“인철 선생님에게 이것저것 배우고 있는 제자입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 오빠 아들 같네. 하하.”

숙희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모습이 골목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사토시는 한숨을 토해냈다.

“한해 군. 삼성동 집에 잠깐 들를까?”

.

.

.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동안 사토시는 그저 창밖을 물끄러미 볼 뿐 말이 없었다.

왠지 방해 받고 싶지 않은 모습이어서 한해도 섣불리 말을 붙이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서야 그는 입을 뗐다.

“오늘 밤, 나하고 시간 좀 같이 보내도 괜찮겠지?”

“그럼요, 선생님. 저야 영광이죠.”

“그럼 우리 멋 좀 내고 외출해볼까?”

평소처럼 허름한 점퍼에 청바지를 입어 동네 아저씨 같던 그는 삼성동 저택에 마련되어 있는 그만의 드레스 룸에서 이탈리아 산 최고급 슈트로 갈아입었다.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매칭한 그의 모습에 한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선생님…… 할리우드 배우 조지 클루니가 울고 가겠어요.”

“그 친구가 나하고 동갑이긴 하지. 흐흐.”

“어딜 가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슈트를 입어야 할까요?”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한해 군 차려입은 모습도 좀 볼까?”

한해도 몇 벌 안 되는 슈트 중 하나를 꺼내 입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사토시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젊음이 좋다.”

“에이, 선생님 옆에 서니 초라한걸요.”

“무슨 소리. 이제 나가볼까?”

한해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차를 놓고 가는 편이 낫겠다고 하는 말에 술을 마시러 나가보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금방 숙희 아주머니와 헤어진 곳이었다.

“어…… 여길 왜 다시?”

“왜? 주인이 자기 건물 들르는 게 이상한가?”

“네에?! 이 빌딩이 선생님 빌딩이라고요?”

한해는 바로 밑에서 보면 고개가 부러질 것 같은 빌딩 앞에서 또 한 번 놀랐다.

“내가 지은 건 아니고. 작년에 샀지.”

사토시는 태연하게 빌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 아주 괜찮은 와인 바가 있어. 스페인 지배인이 직접 와인을 공수하고, 셰프들도 현지인들이 제대로 요리를 내오지.”

“식당 이름이 뭔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