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20화 (20/92)

20화

수진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 얼음처럼 멈췄다.

태도, 말투, 표현, 어느 하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화가 난 남편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이 왜 지금 화를 내?”

“그만 좀 해. 질투도 적당히 해야 예쁘지.”

“하!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두죠. 나 지금 전혀 질투나지 않아.”

곧고 새카만 남편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불쾌할 뿐이야. 당신의 태도, 말투, 표현, 모든 게 다. 그래서 잠시 바람 좀 쐬고 오려고.”

“수틀리면 집 나가버리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어? 아…… 배울 데가 없었겠네.”

수진은 아픈 과거까지 들쑤시는 남편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못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못 배워먹은 나하고 결혼은 왜 했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수진은 몸을 돌리고, 문손잡이를 돌리고, 집을 나가버렸다.

거칠게 닫힌 문을 보며 강은 우두커니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또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그가 몹시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상황.

그녀가 그를 거부하고 등을 돌리고 떠났다.

그녀에게 마구 퍼부을 때 느꼈던 통쾌함은 씁쓸함으로 바뀌고, 이윽고 두려움으로 흘러내렸다.

“수진아.”

그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런데 어쩌냐? 너 이제 못 도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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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이 벌어진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정반대로 명상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음악 소리도 없는 적적함 속에 한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눈은 지그시 감고 무릎에 손을 늘어뜨리듯 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운 장면이지만 실상 그는 실패의 쓴 맛을 교훈으로 승화하는 중.

오늘 전투에서 졌다.

그동안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루 1%의 수익을 내자는 목표를 매일 달성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수익을 내지 않도록 멈춰야 할 정도로, 하루 1%의 수익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

평화로운 항해가 너무 오래 이어져 폭풍에 속수무책이었던 걸까?

오늘 갑자기 미국 연방 준비위원회에서 날아든 금융긴축 시그널이 장을 폭락시켜버렸다.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 증시에 투자하고 있던 외국인들이 이른바 패닉셀 장세를 연출했고, 주가는 종목을 불문하고 속수무책으로 떨어졌다.

장이 얼마 남지 않은, 워낙 오후 늦게 터진 사건이라 손 쓸 틈도 없이 마이너스 3%의 손실을 기록하고 장을 마감했다.

며칠 동안 쌓아둔 적립식 수익이 한 방에 날아간 셈이었다.

그는 가부좌를 튼 채 통렬히 반성했다.

내일 반드시 오늘 손실 입은 부분을 만회해야지.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이를 갈고 있는데 사토시 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한해는 명상을 마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오늘 좀 힘든 장이었지?”

“안 그래도 반성 중이었습니다.”

“뭘 반성하는데?”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3% 이상 손실을 봤습니다.”

“음. 예상보다 피해액이 크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오늘 손실 본 부분은 내일 메우겠습니다.”

사토시 씨는 잠시 말이 없다가 중얼거렸다.

“아직 멀었네.”

“네?”

“오늘 손실 난 부분을 다 메우려면 내일 4% 이상 수익을 올려야 하는데?”

“가능합니다.”

“그러다가 무너지는 거야. 그 마음이 바로 자만이야.”

그의 목소리는 준엄했다.

“내일도 딱 1%. 최대한 보수적인 스탠스를 잡아.”

“선생님. 이거 시뮬레이션으로 여러 번 해본 상황입니다. 제가 충분히…….”

“그렇다면 왜 오늘 장에서는 막아내지 못했지?”

“예상보다 더 큰 폭으로 예상보다 더 빨리 빠져서요.”

“만약 내일도 예상과 달리 장이 움직인다면?”

“그럴 리 없습니다. 내일은 오전 장 하락으로 시작해서 오후에 약간의 반등세가 있을 겁니다. 장 마무리는 모르겠고요.”

“화가 났구나.”

사토시 씨의 잔잔한 목소리에 한해는 찬물을 몸에 끼얹은 기분이었다.

“감정이 섞여 있어. 그럴 때는 먼저 온도를 식혀야 해. 충분히.”

“죄송합니다.”

“반성하지 말고 그냥 마음을 식혀. 그리고 감정이 결정에 개입하지 않을 자신이 생기면 그때 다시 시작해.”

“그사이에는요? 상당히 변동성 큰 장세가 연출될 텐데요. 곧 뉴욕 장이 열리는데…….”

“아직도 서두르는군. 산책이나 하고 와. 동네 한 바퀴. 대신 주식 생각은 1도 하지 말고.”

“선생님…….”

“지금 당장. 명령이야.”

한해는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물 빠진 데님에 후드 티로 갈아입었다.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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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보니 사무실이었다.

수진은 불 꺼진 사무실을 밝히고 자동차 열쇠를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어쩌다가.”

그녀는 혼잣말조차 다 하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왜? 대체 왜 나한테 그렇게 해?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싹싹 빌라는 게 아니잖아?

내가 오해를 했다면 설명을 해주고, 민망하면 변명을 하고, 잘못이 있으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던가…….

남편의 태도는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신적으로 뒤틀린 사람의 이상행동이었다.

마치 나를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는 듯한…….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그렇게 미우면 왜 결혼했어? 멀쩡한 사람을 죽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결혼을 했다면, 이러진 말아야지.”

며칠 동안 수진은 한해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불쑥 한해 생각이 나도 얼른 지워버렸다. 남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

한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하필 결혼식 당일에 급하게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충분히 고민할 겨를도 없이 선택을 강요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선택은 선택이었다.

주례 선생님이 결혼 의사를 물어봤을 때, 그녀는 망설임 끝에 ‘네’라고 대답했다. 그것 역시 그녀의 의지였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정신과 상담에서 말한 대로 결혼생활을 지켜내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남편을 용서하고, 좋아하고, 잘해주려고…….

당신은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혹시……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려고 결혼한 거야?

집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갇혀 있었다.

“안 되겠다, 수진아. 정신 차리자.”

그녀는 자신의 뺨을 가볍게 때린 후 컴퓨터를 켰다.

차라리 일을 하자! 가만히 있으면 자꾸 남편 생각에 갇히니까.

그녀는 야화 작가의 대본을 다시 정독했다. 이번에는 그냥 읽는 수준이 아니라 발전적 대안을 위한 아이디어들을 정리하면서 읽었다.

-남자주인공 용해준을 미혼이 아니라 기혼 설정으로? 다만 아내와의 관계가 매우 아슬아슬하면서 작품 내에서 또 한 축의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요?-해준의 아내가 플롯의 진행 방향을 흔드는 주도적 역할을 하면 더 좋고. 금방 남편과 한바탕 하고 도망쳐 나와서인지 부부사이의 암투를 전체 스토리에 녹이는 쪽으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현재의 대본은 일종의 성장이야기이자 모험담인데, 그 자체로도 매력 있지만 여성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을 이끌어 내기엔 부족하니까.

-해준의 아내를 비롯한 여성 캐릭터들을 플롯과 반전의 축으로 삼으면 로맨스에 천착하지 않아도 여성 시청자들을 유인할 듯합니다. 그녀는 빨간 펜을 휙휙 돌려가며 작품 속으로 노를 저어갔다. 남편과의 불화에서 체험한 감정을 오히려 그물 삼아 아이디어를 건져 올리며.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 더 나아가 아슬아슬한 결혼생활만큼 주인공에게 큰 고난이 있을까요?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고난이 클수록 스토리가 흥미진진해질 테고요. 2회 차까지 대본을 다 읽고 의견을 정리한 후, 채팅창으로 문서를 보냈다.

-야화 작가님. 아직 안 주무시죠? 바로 답장이 왔다.

-야화는 밤에 피는 꽃이랍니다~수진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밤에 피는 꽃이래. 아 진짜 이 4차원 캐릭터 너무 좋아.

-제가 작품 보면서 아이디어 떠오르는 데로 정리한 내용 보내드립니다~-피디님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 저 부담되잖아요.-대본이 너무 재미있어서 자꾸 보게 되네요.-윽. 더 부담ㅠㅠ 하튼 보고 연락드릴게요. 겨우 2장짜리 문서였기에 작가가 다시 연락하는 데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수진 피디님.-네, 밤에 피는 야화 작가님.-나 진짜 피디 잘 만난 것 같아. 수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그래. 일하는 보람이란 이 맛이지.

-제 아이디어가 마음에 드시나요?-영감이 팍팍 떠오르네요.-아, 도움이 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대본 수정작업하기 전에 소설로 한번 써보라고 한 것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그래서 말인데……. 수진은 그다음에 날아온 메시지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지금 소설 첫 페이지만 한번 써보려고요.-응? 작가님 내일 미국으로 출국하신다면서요?-네. 아침 비행기예요.-그럼 빨리 주무셔야 하지 않나요?-어차피 잠이야 비행기에서 자면 되니까. 피디님도 야근하고 계시잖아욧!-저는 집안에 일이 있어서 사무실에 잠시 피신 왔어요.-혹시 남편하고 한 따까리? 와…… 어휘선택 어쩔! 한 따까리!

-네. 한 따까리 했어요. 신혼인데도 힘드네여ㅠㅠ-크으. 결혼생활의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우리 피디님! 존경합니다. 수진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동시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나 원래 씩씩한 아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하는 일을 열심히 하자.

-야화 작가님의 첫 소설의 첫 페이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레이나는 거품 목욕을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늘 와인 한 잔을 들고 월풀 욕조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과 부드러운 거품, 그리고 풍만한 바디감의 와인 한 잔. 셋이 어우러지면 온몸의 긴장을 완벽하게 풀어주는 묘약이 되었다.

샤워로 거품기를 씻어내고 가운을 입고 나왔다. 마침 레오가 집에 막 들어오는 길이었다.

“아오! 누나. 제발 옷 좀 제대로 입고 다녀.”

“뭐가? 샤워하고 가운입고 나오는 게 어때서?”

“끈이라도 꽉 매던가.”

“아쭈? 쬐끄만 게 너도 남자라 이거냐?”

“얹혀 사는 처지에 잔소리할 입장은 아니지만, 우리 문화인으로 최소한의 예절은 지킵시다.”

“됐고. 어차피 오늘 아주 예의 없는 년 됐으니까.”

레이나는 당장 옷을 갈아입을 생각 없이, 냉장고에서 체리를 꺼내들고는 TV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무슨 일 있었어?”

“그때 얘기한 남자 기억나?”

“다른 여자하고 결혼했다는?”

“그렇지. 하지만 곧 내 남자가 될.”

“제발. 그러다 누나 큰일 나.”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네.”

“아까 그 사람 와이프 만났어.”

“뭐? 어쩌다가?”

레이나는 오늘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동생에게 들려주었다.

“아…… 나 진짜 누나 싫다. 왜 그래 사람이?”

“나도 내가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암. 나쁜 년이지.”

“그 여자 입장에선 완전…… 그러다 둘이 누나 때문에 이혼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거야 둘의 선택이지. 내 목표이기도 하고.”

“어쩜 사람이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어? 가정파괴범이잖아!”

“그런데 듣다 보니 좀 그렇다? 너도 다른 남자한테 마음이 있는 여자 좋아한다며.”

“무슨 소릴. 난 떳떳해! 소월 누나랑 그 남자랑 정식으로 사귀는 거 같지도 않고. 그거랑 불륜이랑 같아?”

“나 불륜 안 저질렀어. 아직.”

“내 입장에선 그 정도면 불륜이야.”

“우리 동생 참 착하고 도덕책이야. 인정. 그런데 너…….”

레이나는 레오의 몸에 얼굴을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고기 냄새 오지고요 지리고요.”

“일타강사라고 일부러 급식체 쓰냐?”

“그 여자랑 먹었어? 그래서 아주 얼굴이 싱글벙글이구나. 우리 내기할까? 둘 중 누가 더 먼저 뺏어오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뺏어오는 거 아니라니까.”

“내가 보기엔 그런데?”

“아휴. 내가 누나랑 왜 이런 논쟁을 하고 있냐. 옷이나 갈아입어. 나 들어간다.”

“야, 영화나 하나 같이 보자. 심심해!”

티격태격 싸우는 두 남매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연쇄작용이 시작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

이야기를 만드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른 재능이라는 사실을 수진은 일찍 깨달았다.

그녀는 이야기를 좋아했고, 이야기를 다루고 만드는 법도 공부했지만 한 자 한 자 글로 적어 내려가는 일은 아무리 훈련해도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작가가 아니라 피디가 되었다.

그녀의 차는 신호대기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핸들에 손을 올린 그녀의 시선은 사거리에 서 있는 호텔에 머물렀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아직 불이 켜진 호텔 객실이 몇 곳 보였다.

한참 직접 글을 써보려고 수련할 때 그녀는 괜히 호텔에 들어가 글을 쓰곤 했다.

호텔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이야기. 옆방에 투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1208호 투숙객의 이야기…….

아무런 정보가 없는 완벽한 타인들의 인생을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훈련을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늦은 밤 호텔의 불 켜진 객실을 보면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곤 했다.

내일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혼부부도 있을까? 오늘 그들의 결혼식은 어땠을까? 남편에게, 아내에게 숨기는 비밀도 있을까? 그들은 행복할까?

그녀가 이야기에 천착하게 된 데는 한해의 영향이 컸다.

바닷가 고향에 살던 어린 시절, 서울 아이들에 비해 놀러 다닐 곳이 없었기에 그녀는 책을 탐닉했다. 특히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소설을 좋아했는데, 그에 비해 한해는 책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재미있게 읽은 책이 있으면 한해에게 재잘재잘 스토리를 들려주었고, 한해는 무척이나 흥미롭게 듣고 종종 이렇게 말해주었다.

‘수진이는 책도 좋아하고 이야기도 잘하니까 나중에 작가가 되어도 좋겠다.’그녀는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보며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떠올렸고, 나중에 멋진 작가가 되어 책을 내고 한해에게 선물해주는 상상을 했다.

결국 또 이렇게 오빠 생각을…….

수진은 한해 생각을 끊어내려고, 도망치려고 라디오를 틀었다. 심야에 어울리는 촉촉한 음성의 남자 디제이가 누군가의 사연을 소개하는 중이었다.

-삼성동에서 핸드폰 뒷자리 4088님이 보내주셨습니다. 수진이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우리 동네네.”

-오늘 속상한 일이 있어서 몇 시간을 걸었습니다. 무념무상으로 계속 걷다 보니 일 생각은 사라졌는데 부작용이 있네요.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워지네요. 그리워해서는 안 될 사람인데.

“뭐야 이 사람은. 우리 동네에 꼭 나 같은 사람이 있었네.”

수진이 또 중얼거렸다.

-제가 노래를 잘 몰라서 그런데 이런 밤에 들으면 좋을 노래 한 곡 들려주세요. 이렇게 사연 보내주셨습니다. 음…… 어떤 노래가 좋을까요? 잠시 뜸을 들이며 고민하던 디제이가 결정했다.

-이열치열!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잊어봅시다. 이 노래 들으면서 아주 원 없이 그리워하시고 다시 그분을 마음에 꼬옥 넣어두세요. 부활의 노랩니다. 네버엔딩 스토리. 눈물 겨운 피아노 전주가 시작되는 동시에 신호가 바뀌었다.

이승철의 처연한 목소리가 그녀를 감쌌다.

-손닿을 수 없는 저기 어딘가 오늘도 넌 숨 쉬고 있지만 너와 머물던 작은 의자 위엔 같은 모습의 바람이 지나네. 출발해야 하는데, 페달을 밟아야 하는데…… 그녀는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너는 떠나며 마치 날 떠나가듯이 멀리 손을 흔들며 언젠간 추억에 남겨져 갈 거라고.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어떡해…….”

뒤에서 기다리던 차가 경적을 울리고 나서야 그녀는 차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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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한해는 긴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사토시 씨의 말대로 무작정 걷다 보니 들끓는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오늘 적지 않은 돈을 잃었지만, 내일 그 돈을 다시 벌려고 하지 말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하게 1%의 전투를 벌이자.

이어폰으로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바로 그 골목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며칠 전 우연히 수진을 마주쳤던 곳.

그의 마음은 그대로였다.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자. 그녀의 결혼생활이 행복하기를 빌어주고, 예쁜 아이를 갖기를 빌어주고, 그녀가 하는 일도 다 잘되기를…… 건강하기를…….

만약 그녀가 불행하다면, 만약 그녀가 힘들어한다면, 만약 그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며 손을 뻗는다면…… 그 손을 잡아줘야지.

딱 그렇게만. 인생이 서커스라면, 외줄타기 곡예를 하는 그녀가 혹여 떨어질 때 그녀를 받아줄 그물 같은 존재가 되어주자.

다른 사람이 들으면 호구 같은 소리라며, 사춘기 소년의 순정이냐며 비웃을 테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하긴 어릴 때 세상과 단절되어 바다를 떠돌았으니. 그래서 아직 소년의 심장이 뛰고 있는 지도.

그는 듣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문자를 보냈다. 그리워해서는 안 될 사람이 그리워서 힘들다고. 이럴 때 들으면 좋은 노래를 골라달라고.

별 기대 없이 보낸 문자였는데, 얼마 안 있어 디제이가 그의 사연을 읽고 노래를 골라주었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잊어봅시다. 이 노래 들으면서 아주 원 없이 그리워하시고 다시 그분을 마음에 넣어두세요. 부활의 노랩니다. 네버엔딩 스토리.

“오오, 대박!”

신기한 경험에 한해는 해맑게 좋아했다.

라디오에 사연이 소개되고 노래까지! 이거 행운이잖아?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그날 마주쳤던 수진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귀로는 부활의 노래를 들으면서 집으로 걸어가는데 옆으로 자동차가 쓱 지나가는가 싶더니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마치 그날 아침에 수진을 발견한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날 한해가 멈추지 않고 창문도 내리지 않고 백미러로만 그녀를 확인하고 가버린 것과 달리 자동차는 완전히 멈추었다.

뭐지? 한해도 걸음을 멈추었다.

차 문이 열리고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수진이었다.

“어…….”

한해는 그를 위한 노래가 나오고 있는 이어폰을 뺐다. 그런데도 여전히 노래 소리가 들렸다.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뭐지? 이건 마법인가? 내가 뭔가에 홀렸나?

아니. 마법이 아니라 기적이지.

진짜 그녀가 앞에 서 있다. 젖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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