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레오는 기다렸다. 체스로 치면 체크메이트를 부른 셈.
어떻게 할래?
평소보다 조금 더 거친 그녀의 숨소리가 들린다.
놀랐어? 많이 놀랐어? 사실 너도 알고 있었지? 내가 너 좋아하는 거.
그걸 몰랐다면 넌 정말 세상에서 제일 둔한 여자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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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둔했던 걸까?
누워서 통화하던 소월은 두통이 있는 사람처럼 미간을 모으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알기로는 그랬다. 꽤나 많은 남자애들이 어릴 때는 주변의 누나들 중 한 명에게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 기억은 풋풋한 추억 정도로 남아, 나중에는 그 누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져버리는 것이다.
레오도 그런 줄 알았다. 아이돌 연습생이었던 시절, 그런 식으로 같은 기획사 연습생 누나를 좋아했겠지. 그리고 이제 그 감정은 우정이 비슷한 뭔가가 되어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도 좋아한단다. 누나도 아니고 ‘너’를 좋아한단다. 어쩔…….
이건 교통사고다.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다.
“못 들은 걸로 해도 되냐?”
핸드폰 너머 레오는 피식 웃었다.
“누나다운 대답이네.”
“장난이야?”
“장난 아니야.”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너 좋아해. 레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예쁜 동생이지.”
“아니. 그런 거 아냐. 나 누나하고 입 맞추고 싶어. 누나 안고 싶어. 누나랑 둘이 여행 가고 싶어.”
이 자식이…….
소월은 입안이 깔깔해졌다. 한해 오빠 때문에 가뜩이나 마음이 들떠 죽겠는데 얘는 왜 또 이래.
“너 알잖아. 나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응. 그게 뭐.”
“뭐긴 뭐야. 임자 있는 사람을 왜 좋아해?”
“누가 할 소리. 한해라는 사람도 좋아하는 여자 따로 있다며.”
“그 여자 결혼했어.”
“그 여자가 결혼 안 했다 해도 누나는 그 남자 좋아했을 거잖아.”
소월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마음이 많이 아팠겠지.
요즘처럼 괜히 히죽거리는 일은 없겠지. 문득문득 그 사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일은 없겠지. 온통 한숨이고 눈물이었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누나가 다른 사람 보는 거 아는데, 내 마음을 어쩔 수 없어.”
“그러지 마. 부탁이야.”
“그 부탁 못 들어줘.”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이게 나야. 내 솔직한 마음이야. 그 사람으로부터 누나 뺏고 싶은 게 내 솔직한 마음이야.”
“뺏…… 야! 너 말이 심하다!”
“보아하니 아직 그 사람하고 본격적으로 사귀는 단계도 아닌 거 같은데. 그렇지?”
돌직구 질문에 소월은 속수무책.
“까불어.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다 너한테 말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예전엔 시시콜콜 다 말했으면서.”
“그땐 네가 시커먼 흑심을 품고 있는 줄 몰랐지. 이젠 알아버렸고! 나 너 작업실에도 안 갈 거야.”
“누나. 유치하게 이러지 말자.”
“유치하게 보여도 어쩔 수 없어. 나 진짜 불편해.”
레오는 그 뒤로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이 소월의 마음을 다독이다가, 결국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버렸다.
그치. 넌 잘못이 없지. 그저 날 좋아해준 것밖에는. 내가 너한테 화낼 일은 아니지.
“레오. 미안해. 내가 괜히…… 혼란스러워서 너한테 화를 냈다.”
“사과받아줄게.”
“작업실 구경 갈게.”
“응. 서울 올라와서 연락해.”
“어…… 그럼…… 잘 있어.”
소월은 어색하게 전화를 끊고 혼잣말을 토해냈다.
“아…… 어떡하냐?”
침대에 벌러덩 누워 눈을 감았다.
연애를 참 자주 하던 친구가 그랬다.
연애라는 게 원래 그렇다고. 안 올 때는 아예 안 오고, 올 때는 막 섞여서 온다고.
섞이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 싶었는데, 이제 딱 알겠어.
섞여버렸다. 어떡하지?
*
며칠 동안 기계처럼 규칙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잠에서 깨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아침 운동. 그것보다 먼저 하는 일은 피트니스 센터에 가는 길에 수진을 찾는 일.
며칠 전 우연히 골목에서 그녀를 발견한 후, 그는 생각했다.
그녀가 왜 이 시간에 여길 걷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또 비슷한 시간에 이쯤에서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연락하고 만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운명의 끈이 연결되어 있다면 언젠가 다시 이어질 거라고 믿을 뿐.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집에 오면 본격적으로 전문 투자자로서 일을 시작했다.
회사에 출근한 것처럼 가벼운 캐주얼 슈트 차림으로 네 대의 모니터를 동시에 체크하며 국내외 시장을 살폈다.
사토시 씨에게 감화받은 1% 법칙을 지키기 위해, 세력이 붙을 우려가 큰 중소기업은 접근하지 않기로 했다.
코스피는 시가총액 20위, 코스닥은 시가총액 10위 안에 드는 기업이 대상.
외국 시장은 직접 투자와 ETF를 동시에 활용해 접근했다.
큰 손실을 막기 위한 헤징 장치도 꼼꼼하게 점검하면서 하루에 1%대 수익만 내도록 그만의 시스템을 만들어갔다.
그는 바이오 위주의 시장에서 전기 자동차를 위시한 배터리 관련 주로 테마가 넘어간다고 시장을 분석했다.
시장에 유동성이 흘러넘칠 정도로 많아, 아무리 보수적으로 접근해도 반나절이면 수익률 2, 3%씩은 무난히 달성할 수 있었다.
처음 주식투자를 공부할 때 모의 트레이딩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엔터 관련주들을 잘 골라내서 한 달 동안 무려 30%의 수익을 올리고 자신감에 가득할 때였다. 사토시 씨는 이렇게 말했다.
“장이 좋을 때 10% 따먹는 건 초등학생도 할 수 있어. 장이 안 좋을 때 손실을 막아야 프로지.”
그는 실제 주식 시장에서 벌어졌던, 참사와 같은 상황들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다 들어봤을 대공황, 오일쇼크, 경제위기 같은 굵직한 사건들 말고도 전체 시장이 10%씩 요동치는 일들은 숱하게 많았다.
개별종목은 더 했다. 실제로 모의 트레이딩을 할 때 그가 늘 재미를 봤던 화장품 테마주가 몇 년간 끝도 없는 내리막길을 걸었고, 지금은 최고가 대비 3분의 1 수준으로 주가가 꺼져 있었다.
“조바심이 난폭 운전이라면 안일함은 졸음운전이야. 둘 다 위험하지만 후자가 더 위험해.”
사토시 씨의 조언은 늘 간결했다.
이미 오전 중에 전체 투자금액 수익률 2%에 근접했다.
2차 전지 시장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기업에 며칠 전에 2천만 원을 투자해놨는데, 한 이틀 잠잠하더니 오늘 오전에만 11% 상승이었다. 그런데도 모니터에는 매수 주문이 쌓여 있었다. 주가가 더 오른다는 이야기.
‘이러다 상한가도 치겠는데? 당연히 ㄱㄱ 쳐야지!’추가 매수를 하고픈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골프로 치면 홀인원, 법으로 정한 개별 주식의 하루 최고 상한 폭 29.9% 상승이라는 짜릿한 기분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러나…… 벽에 붙은 ‘1%’ 종이를 보고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이 떨릴 정도로 아쉬웠다.
반대로 매도 신청을 넣었다. 12% 구간에서 투자금액 30% 매도.
“미쳤다. 후우. 빤히 보이는 돈 놔두고 나오는 일도 고역이네.”
점심식사는 일부러 집 근처에 산책을 나갔다가 먹고 들어왔다. 하루 종일 모니터만 보고 있으면 머리가 딱딱해지니까.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그의 또 다른 철칙. 산책할 때, 밥 먹을 때는 트레이딩 앱을 열지 않는다. 주식거래는 오직 사무실에서만 할 것.
“언제나 명심해. 투자에 중독되지 않도록. 투자는 일이라고 생각해. 워라벨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거야.”
대신 그는 가벼운 책을 읽으며 밥을 먹었다. 그것 역시 투자와 관련 없는 인문학 서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막 들어가려는데,
-오빠 뭐해? 소월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난번 울진에서 며칠 같이 지낸 후 그녀는 슬그머니 말을 놓았다 높였다 자기 멋대로 했다. 한해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밥 먹었다. 그녀는 메뉴를 물었고 한해는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찍은 비빔밥 사진을 보내주었다.
-ㅋㅋ오빠도 먹는 거 사진 찍는구나. 의외인데?-매끼 사 먹을 테니까 찍어둬야지. 내가 제대로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있나, 가끔씩 점검용으로.-와아아아아아. 대단대단. 이것이 전문 투자자 클라쓰임니까.-가끔은 내가 만들어 먹으려고^^-하긴 우리 오빠 요리 솜씨는 내가 잘 알쥐.-너희 어머님 요리 솜씨야말로 정말 끝판왕이었어.-안 그래도 오빠 가고 나서 우리 식구들 오빠 칭찬을…… 이미 사위로 들인 분위기ㅋㅋ-나중에 또 인사드리러 갈게. 돈 많이 벌어서 큰 선물 준비해서^^ -뭘 그렇게까지ㅋㅋ-너무 신세를 많이 지고 와서. 고맙다 소월아.-그럼 일단 오늘 저녁 사줄래요?-응? 너 서울 와?-할 얘기가 많아요. 아주 많아. 저녁 콜?-그래. 나야 뭐 매끼 혼자 먹으니까.-꺄올~~~~ 한우 오마카세 사달라고 해야지~~~-뭔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사줄게ㅎㅎㅎ-와 허세까지 섹시하네 이 오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밝은 사람.
누군가 소월에 대해 물어보면 한해는 그렇게 대답할 터였다.
그녀는 잡담만 나눠도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좋은 여자가 왜 나를…….
어쩌면 가능성 0%의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왜?
안타깝다 못해 가끔 화가 날 지경이었다.
식사를 마친 그는 다른 코스로 공원을 한 바퀴 산책한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뽑아들고 집에 들어왔다.
2층 사무실 모니터의 벽 앞에 앉아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다시 전투를 시작할 시간이다. 마음껏 돈을 버는 전투가 아니라 잃지 않는 전투.
아침에 매도 주문을 넣어놓은 건은 이미 진행되어 현금으로 들어와 있었다. 대략 천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
이걸 현금으로 놔둘까 아니면 변동폭이 적고 안전한 고배당주에 넣어둘까?
고민하던 그는 리츠 상품을 떠올렸다.
그래. 리츠가 있었지. 어떤 놈들이 있는지 한번 훑어볼까?
날카로운 시선이 모니터 가득 수많은 음봉과 양봉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
“리츠? 그게 뭐야?”
태화건설의 창업주 이태화 회장실. 이 회장은 느슨하게 팔짱을 끼고 옛날식 파이프 담배를 물었다.
강은 결혼 전부터 야심차게 진행해 온 새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리츠는 요즘은 보편화 되어 있는 개념인데요, 쉽게 말해 부동산 투자를 증권으로 설계한 상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공모 주식을 산 주주들 돈으로 빌딩이나 상가, 쇼핑몰 등등을 운영하고 수익을 주주들한테 배당으로 지급하는 방식이죠.”
이태화 회장은 평생 건물을 짓고 사고팔기만 한 사람이지 주식 투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가 그래프가 거의 제자린데, 이래도 투자가 돼?”
보고서에 있는 기존 리츠 상품들 현황을 살피던 이 회장이 물었다.
“잘 보셨습니다. 드라마틱한 주가 상승은 없습니다. 당연히 폭락하는 경우도 드물지요. 그러니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안전하게 돈을 넣어두고 1년에 두 번 있는 배당에서 은행 이자보다 조금 더 비싼 배당금을 챙겨갈 수 있는 장점이 있지요. 부동산에 관심이 많고 안정적인 투자성향을 가진 투자자들에겐 여전히 각광받는 주식입니다.”
“그럼 그 건물 소유권은?”
“개념적으로는 주주들이 투자한 금액만큼 나눠 갖는 셈이지요.”
“힘들게 지은 건물을 왜 엄한 놈들한테 나눠줘?”
“이거 한번 보시죠.”
강이 눈짓하자 옆에 서 있던 비서가 회장실 벽면에 화면을 띄웠다. 건물을 지어 일반분양을 했을 때와 리츠로 운용을 했을 때의 수익률을 비교한 그래프였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리츠 상품은 저희 측에서도 이득 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차라리 자기가 아파트나 상가를 사는 게 훨씬 이득이잖아?”
“세금과 공실 문제가 아주 골치 아프죠. 투자자 입장에서 리츠는 부동산 주인으로 감내해야 하는 번거로운 것들을 전부 회피하면서 부동산의 공동 주인이 되는 방법입니다. 아주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이 회장은 파이프 담배 연기를 뻐금거리며 그래프와 보고서를 꼼꼼하게 비교해보았다.
“꼼꼼하게 설계한 거지?”
“그럼요, 회장님. 대한은행 리츠팀 최고 에이스 팀하고 몇 달을 매달려서 만든 상품입니다.”
“공모일이 언제라고?”
“다음 주에 열립니다. 홍보 자료는 ?따로 정리해서 회장님 책상 위에 두었습니다.”
“그런 뉴스 나부랭이까지 읽어볼 시간은 없고.”
이 회장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리츠라…… 리츠…….”
그는 주름진 눈꺼풀을 닫았다.
입에 문 파이프에서 연기가 많이 나기 시작한다. 매우 구식이지만 매우 노련한 그의 두뇌가 보통보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는 뜻. 그 결론은?
이 회장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한번 해봐. 봐서 수익률 괜찮으면 또 만들어보고.”
“네! 잘 진행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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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강은 일찍 퇴근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보다 더 일찍 퇴근해서 들어와 있던 수진이 직접 차려낸 저녁 식탁이었다.
“바쁠 텐데 뭘 직접 준비를 했어.”
“이모님이 오늘 좀 일찍 들어가셔야 한다고, 먼저 차려놓고 가시겠다는 걸 놔두라고 했어요. 오늘 제가 일찍 들어올 수 있어서.”
수진은 제육볶음을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간은 맞아요?”
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일 복귀하니까, 할 만해?”
“네. 아주 엣지 있는 작가를 만나서 요즘 그 대본에 푹 빠져 있어요. 아직 완성도는 좀 떨어지지만 스토리가 아주 쎈데…….”
수진은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남편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어서.
그녀의 예상대로, 중간에 말을 뚝 끊었는데도 강은 묻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스토리인데?’이렇게 물어봐주는 대신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내일 저녁에 시간 좀 내줘야겠어.”
“내일? 갑자기요?”
“중요한 자리가 있어. 내가 얘기했지? 이번에 대치동에 새로 지은 빌딩, 리츠로 운영하기로 했다고.”
“들었어요. 22층짜리 복합 상가 빌딩. 당신이 주도한 프로젝트라고, 작년부터 얘기했잖아요.”
“응. 주요 투자자들 ?상대로 내일 저녁에 만찬 겸 설명회를 가질 예정인데, 최종 참가 의사를 밝힌 리스트를 보니까 외국 법인 관계자들이 많아. 그래서 파티 형식으로 이벤트를 하기로 했거든.”
“그런데요? 저는 왜?”
“당신도 알지? 외국 친구들 그런 자리에 부부동반으로 참석 많이 하는 거. 내일 메인 투자자도 부부가 같이 오는데 당신을 꼭 다시 보고 싶다고 하더군.”
“아…… 그랬군요.”
이 정도면 충분히 따라가줄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일은 하필 야화 작가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곤란해하는 수진의 표정을 본 강이 지그시 이를 물었다.
“왜? 싫어? 귀찮은가?”
“네? 귀찮다니요. 그게 아니고 저도 내일 일이 있어서 그래요.”
강의 고개가 느릿하게 기울어졌다.
“저녁에 무슨 일?”
“아까 말한 그 작가하고 미팅이 있어요.”
“작가하고 미팅을 꼭 내일 저녁에 해야 하나? 미뤄. 낮에 보던가.”
그러려고 했다. 정말이다.
그런데 강의 말본새가 흙탕물처럼 모욕감을 튀겼다. 닦아낼 수밖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해요. 당신 일이 중요한 것처럼 제 일도 중요하잖아요.”
수진은 차분하게 말했고 강은 싸늘하게 되물었다.
“중요한 일이라…… 음 알겠어. 보통 그런 신인 드라마 작가하고는 계약금이 얼마나 돼?”
“정해진 가격은 없지만, 신인 작가들하고 계약할 때도 표준계약서가 있긴 해요. 케이블에 나가는 드라마는 편당 몇백인 경우도 있고, 메이저 제작사인 경우엔 회당 천만 원씩도 써주는데 그건 신인 치고 후한 편이죠.”
“당신 회사에서는?”
“이분은 편당 칠백 정도에 계약할까 해요.”
“총 몇 회나 제작해?”
“지금으로 봐서는 50분짜리 16화?”
“그럼 딱 일억이구나.”
“대략 그렇겠네요. 왜 갑자기 그건…….”
“내일 투자설명회를 하는 우리 펀드 규모가 1700억이야.”
“그래서요?”
“1억짜리 작가하고 저녁 약속 때문에 남편이 하는 1700억짜리 프로젝트를 못 도와주겠다?”
“아니…… 모든 게 돈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저희도 작가 계약 후 실제 제작에 들어가면 제작비가 수십억 들어갈지도 몰라요.”
“수십억…… 흐흐.”
강이 흘리는 웃음이 너무나도 불쾌해 수진은 금방 먹은 저녁을 토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잘 알겠어. 당신에게 나란 존재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수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존재나 무게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내는 남편 일에 내조나 하라는 식의 시선을 인정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일 그만두라면 그만둘 거야?”
“제가 일을 그만둬야 할 이유가 있나요?”
“거봐. 아니잖아. 그래야 밖에 나돌아 다니기도 좋으니까.”
“이강 씨!”
“난 다만 비즈니스의 경중을 비교해줬을 뿐이야. 우린 부부니까 경제공동체고 더 큰 돈이 오가는 일을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
“미안한데 내 기준은 돈이 아니에요.”
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쏘아보았다.
수진은 막막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신혼여행 말미에 한해 오빠 때문에 어색해지긴 했지만, 요 며칠은 서로 조심해가면서 점점 관계를 회복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나 노력하고 있었는데, 당신 언제 또 이렇게 못돼진 거야?
강은 딱 소리 나게 수저를 내려놓았다.
“알아봐줄 수는 있지 않을까? 혹시 그 중요한 작가님하고의 약속을 미룰 수 있는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정말이다. 당신의 말본새가 그리 고약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강과 식탁에서 마주 보는 채로 야화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저녁 약속을 미뤄줄 수 있겠냐고 정중히 물어보았는데 뜻밖에도 너무 단호하게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제가 모레 출국해서요. 미국에서 열흘 정도 지내다 올 예정이에요.”
난감했다. 일단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시콜콜한 얘기 듣고 싶지 않아.”
강의 태도는 집 안에 온통 둘러져 있는 대리석처럼 딱딱했다.
“내일 올 거야 말 거야? 결론만 말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