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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14화 (14/92)

14화

거부하고 싶었다.

남편과의 관계도 처음부터 종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와중에 집안의 비밀 따위 알고 싶지 않아!

그러나 어머님은 얼굴을 스윽 들이대고 말했다.

“아가야. 너도 결국 나처럼 될 거야.”

비밀이 아니잖아. 이건 무지막지한 저주의 예언이잖아.

“하아…….”

수진은 한숨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어머니는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 가당찮은 동정 따윈 넣어둬. 네 자신에게 쓰기도 모자랄 테니.”

수진은 발에 힘을 꽉 주었다.

온통 검은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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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10분 넘게 말없이 운전만 하고 있는데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수진은 불안한 아이처럼 손톱을 물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주행 중 소음이 없기로 유명한 고급 세단은 달릴 때도 고요했고, 낮게 틀어놓은 라디오가 유일한 소리였다.

“제가 생리통이 심한 편이에요. 매번 그날이 오면 하루 종일 우울하고 피곤하거든요. 오늘도 그래서 축 처져 있었죠.”

맑은 음색의 디제이가 청취자 사연을 읽어주었다.

“제가 힘이 없어 보이니깐 울 남표니가 퇴근길에 집 근처 시장에 들러 보쌈을 사 왔는데, 이게 너무 맛있는 거예요! 남표니하고 둘이 보쌈 파티하면서 맥주 마셨더니 와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더라고요. 헤헤.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있는 것. 그게 행복이구나. 나는 너무 행복하구나.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정말 감사한 하루였어요.”

사연을 다 읽은 디제이가 코멘트를 덧붙였다.

“그쵸! 정말 그래요. 저도 백퍼 공감! 살아보니까 같이 있을 때 행복한 사람하고 함께 사는 거, 그게 최고의 행복이더라고요. 그럼 집이 천국이 되고 침대가 구름이 되죠. 우리는…….”

라디오 방송이 뚝 끊겼다. 강이 라디오를 꺼버린 것.

수진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여전히 창밖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잘했어요. 행복 운운하는 남의 이야기, 나도 더 듣고 싶지 않았어.

달릴 때도, 신호대기에 차가 멈췄을 때도 말이 없던 강은 신혼집이 있는 삼성동에 들어선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후회하냐?”

수진은 지그시 이를 물었다.

단독주택 주차장에 차를 댈 때까지 수진은 말이 없었다.

강은 자동차 시동을 끈 뒤에 재차 물었다.

“후회하냐고.”

“뭘요?”

“이 결혼.”

“후회하면요?”

수진이 고개를 돌려 강을 쳐다보았다.

“왜 물어봤어요? 내가 후회하면 물러주기라도 하려고?”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먼저 대답해. 이 결혼 후회하는지 아닌지.”

수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저는 대답할 수 없어요.”

“예스? 그렇다는 뜻인가?”

“아니요. 대답하기 너무 일러요. 우리 이제 막 신혼여행을 다녀왔잖아요. 결혼이 실험이라면 이제 막 실험실에 들어선 거고, 결혼이 농사라면 이제 막 씨를 뿌린 셈인데…… 후회니 실패니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나요?”

침묵이 길어지면서 점점 딱딱해졌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그런 질문을 하는 당신…… 당신은 후회해서 물어본 건가요?”

“아니.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 열흘 전으로 돌아가도 나는 결혼식장에서 큰 소리로 네! 외칠 거고, 1년 전으로 돌아가도 당신한테 청혼할 거고, 10년 전으로 돌아가도 당신을 서울로 데리고 온 일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표면적으로는 감동적인 말이었다. 새신랑이 할 수 있는 말들 중 가장 감동적인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수진은…… 무서웠다.

이렇게 로맨틱한 고백을 쏟아내는데 왜 무섭지?

설명할 수 없다. 공포란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 가장 직관적인 감정. 진화가 시작된 이래 생존을 위해 가장 예민하게 발달해 있는 촉인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그러나 그녀는 묻고 싶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또 거짓말을 할 건가요? 그렇게 해서라도 나와 결혼할 건가요?

그녀는 왜 공포를 느끼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아가야. 너도 결국 나처럼 될 거야. 어머님의 서늘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녀의 새카만 눈이 바로 앞에서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

같은 시간. 수진과 강의 신혼집 바로 앞 골목.

울진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 한해가 걸어가고 있었다.

백팩을 맨 차림으로 사토시 씨의 집 앞에 멈춘 그는 고개를 돌렸다.

옆집에 불이 켜져 있다. 지난번에 공사를 하더니 새로 이사를 왔나 보네?

어차피 이웃하고 왕래할 일은 없겠지만, 어릴 때 고향 마을에서는 누가 이사 오거나 하면 떡도 돌리고 인사도 나누고 그랬는데.

옆집의 불빛에서 밤하늘의 달빛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 서울로 왔다. 서울의 달은 바다에서 보는 달과 왠지 달라 보여.

집에 들어가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가부좌를 틀었다. 눈을 감고 천천히 명상에 빠져들었다.

잡다한 생각이 많을 때 가지치기를 하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머리를 식히려고 내려간 울진 여행에서 수진을 만날 줄은 몰랐다.

이루지 못했던 꿈과 냉정한 현실, 그리고 어떤 의미인지 아직은 알 수 없는 등대의 불빛을 모두 보았다.

다시 그녀를 찾아야 할까? 그 말은 이제 막 꾸린 그녀의 가정을 흔들어야 한다는 얘긴데.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건…… 옳지 않은 일이야. 그녀가 원한다면 모를까…….

그럼 나는 다시 예전처럼 기다림을 계속해야만 하나? 14년을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면 그녀가 돌아오기는 하고?

가부좌를 틀고 있던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를 악물고 다시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비바체의 속도로 치닫던 의식의 흐름이 다시 라르고의 속도로 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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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잠을 깨운 건 핸드폰 벨소리였다.

소월이겠거니 싶었다. 어차피 그의 번호를 아는 사람도 열 명 남짓이고, 이런 아침 시간에 불쑥 전화하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을 테니.

그런데 액정에 뜬 발신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 한해는 긴 잠에 잠긴 목을 헛기침으로 정리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좋은 아침!”

사토시 씨의 목소리.

그는 늘 이런 식이다. 핸드폰 번호를 하도 자주 바꿔서 저장을 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핸드폰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서울에도 집이 있고, 도쿄에도 맨션과 상가 건물이 있고, 런던에도 정원이 딸린 집이 있고, 상해에도 50층짜리 빌딩이 있고, 뉴욕 맨해튼에도 아파트가 있었다.

그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남자였다.

“아, 선생님.”

한해는 몸을 일으켜 바른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서울에 오셨나 봐요? 번호가…….”

“집인가?”

“네, 삼성동 선생님 댁입니다.”

“그럼 잠깐 들를 테니 아침이나 같이 먹을까?”

“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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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100곳이 넘는 나라를 여행했노라고, 사토시 씨가 말한 적이 있다.

노르웨이 근처의 바다를 지날 때였다.

‘식성만큼 안 변하는 게 또 있을까 싶어. 백 곳도 넘는 나라를 다니며 그 나라에서 맛있다는 음식을 다 먹어봤는데 말이야. 결국 어느 날 아침에 딱 생각나는 음식은 일식 아니면 한식이거든.’한국인과 일본인의 피가 반반 섞인 그의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오늘도 해장국으로 메뉴를 정했다.

삼성동에서 소문난 ‘중앙해장’ 식당 구석에서 마주 앉아 해장국을 먹다가, 문득 쳐다본 사토시 씨의 모습에 멍해졌다.

정말 평범한 동네 아저씨의 외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편안한 데님에 걸치기 편한 윈드브레이커. 그리고 반백의 머리칼을 멋들어지게 가리는 모자.

아주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 바뀌지 않는 그의 의상.

이런 모습을 보고 누가 수조 원, 아니 짐작도 안 되는 재산을 가진 거부라고 생각할까?

“이 집은 늘 맛있어.”

해장국을 반쯤 비운 사토시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어제 술 드셨어요?”

“아니.”

“꼭 제대로 해장하는 사람처럼 맛있게 드셔서.”

“너는 꼭 실연당한 놈처럼 눌려 있구나.”

현인은 사소한 순간에도 현자의 눈을 빛낸다.

“네. 실연이라고 해야겠죠.”

“수진이가 너 싫대?”

사토시 씨와 1년도 넘게 항해를 하면서 수진과의 스토리를 모두 들려주었다. 최근까지 주기적으로 연락하면서도 그는 가끔 묻곤 했다.

‘수진이한테는 언제 찾아갈 거야?’사토시 씨는 아직 수진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사실은…….”

한해는 차분하게 바로 어제까지의 일들을 사토시 씨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묵묵히 집중해서 듣다가 남은 해장국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뚝배기가 다 빌 때까지 말이 없었다.

“자알 먹었다. 커피나 한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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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작고 소중한 행복이여.”

사토시 씨는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길게 들이켰다.

“해장국 먹고 난 다음에 아아 한 모금. 이 짜릿한 맛 때문에라도 살 만하다니까.”

“그게 그렇게 좋으시면 한국에 정착하시죠.”

“왜? 집사 노릇하기 싫으냐?”

“저야 뭐 월세도 안 내고 좋은 집에 사니 나쁠 게 없지만요. 선생님하고 같이 살아도 별로 안 불편할 거 같아서요.”

“한번 그래볼까?”

한해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다.

사토시 씨는 방랑자의 영혼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니까.

그가 다시 수진의 얘기를 꺼낸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반쯤 마신 뒤였다.

“인생유전.”

“네?”

“인생유전이 무슨 뜻인지 알아?”

“자식이 부모의 인생 굴곡하고 비슷한 삶을 사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너는 나하고 피도 안 섞였는데 왜 인생유전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엇갈림. 나도 꼭 너 같은 사랑을 했지.”

한해는 조금 놀랐다. 사토시 씨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는 늘 철학과 과학, 그리고 돈과 역사 등등 거대담론만을 말했으니.

“나는 실패했지만 넌 성공하길 바란다.”

“실패하셨다고요? 선생님도 실패를 할 때가 있나요?”

“딱 한 번.”

사토시 씨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한 번이 내 모든 것을 결정해버렸지.”

“궁금하네요.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라…….”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 검지를 곧게 펴서 빙빙 돌렸다.

“태양계를 상상해봐. 서로 멀리 떨어진 채 운명 지어진 궤도를 도는 지구와 달, 그리고 태양이 수십 년에 한 번 일직선으로 맞춰질 때가 있어. 언젠가 그런 때가 오지 않을까?”

묘한 의미를 품은 말이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쳤지만, 너는 놓치지 않길 바란다.”

“저보고 수진이의 가정을 깨기라도 하란 말씀인가요?”

“아니. 그건 죄가 되니까. 말했잖아. 만약 너와 수진이가 운명이라면, 천체들이 일직선으로 정렬하는 순간과도 같은 기회가 올 거라고.”

“그때까지 전 뭘 해야 할까요? 또 기다려야 합니까?”

“아니. 더 강해져야지. 지금 수진이 옆에 있는 남자보다 더.”

한해는 소리 내어 웃었다.

“선생님이 이끌어주신 덕분에 어느 정도 전업 투자자로 자신이 생기긴 했습니다만, 지금 수진이 남편은 우리나라 건설사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 2세예요.”

사토시 씨는 한해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약해 빠진 녀석. 네 자신의 한계를 미리 설정해놓지 마.”

한해는 얼굴을 찡그리고 이마를 문질렀다.

“세팅은 했어?”

“네.”

“그럼 한번 구경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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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가 집사처럼 머무는 사토시 씨의 2층 주택에는 큼직한 방이 다섯 개나 있었다.

그중 2층에 볕 잘 드는 방이 앞으로 한해의 사무실이 될 터였다.

그는 큼직한 책상에 최고 사양의 컴퓨터와 노트북을 준비하고, 각각에 대형모니터 2개씩 총 4개의 모니터를 연결했다.

초단위로 시시각각 변하는 국내외 주식시장 현황을 보여주는 모니터들이었다.

항해를 하던 중 사토시 씨를 만난 뒤, 그는 전업 투자자가 되기 위해 그 누구보다 혹독한 공부를 했다.

수십 권의 경제학 이론서를 읽고, 그만큼의 실전투자서를 읽고, 수천 번의 모의투자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14년 동안 거의 쓰지 않고 모아놓은 돈을 불려 종잣돈을 만들었다.

모니터 4대 중 한 대에 그의 계좌가 띄워져 있었다.

사토시 씨는 계좌의 돈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제법이네. 생각보다 빨리 왔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한해는 오늘부터 전업 투자자로서의 인생을 새로 시작할 참이었다. 그 타이밍을 알고 사토시 씨가 찾아왔을 리는 없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간단하게 설명해봐. 투자자로서 강한해의 작전을.”

“제 목표는 10년 동안 10배로 투자금을 불리는 겁니다. 포트폴리오는 국내주식 40%, 미국 20%, 중국 20%, 그 외 해외주식 10%, 그리고 원자재 종목으로 10%를 잡았습니다.”

“채권은?”

“없습니다. 금도 뺐습니다.”

사토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 주식만 설명해봐.”

“코스피와 코스닥 비율은 7대 3으로 가져갑니다. 코스피에서는 시총 20대, 코스닥에서는 10대 기업에 한정하고 테마주는 취급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투자 전략을 상세히 설명하려면 몇 시간이 걸려도 모자랄 테지만, 한해는 몇 분 정도로 줄여서 개요만 전했다.

사토시 씨는 가만히 듣고 나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전략은 그럴듯한데, 전략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 뭐라고 생각하나?”

“안전자산이 거의 없다 보니 아무래도 하락기에 취약할 테고요. 헤징 전략에 있어서도…….”

“그런 이야기는 집어치우자고.”

선물 옵션에 대해 말하려던 한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토시 선생이 중요한 이야기를 전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었으니까.

“한 가지만 얘기하지.”

그는 프린터에서 A4 용지 한 장을 쓱 빼들고는 책상에 정리해놓은 펜으로 이렇게 썼다.

1%.

“일 퍼센트?”

“하루에 딱 일 퍼센트. 자신 있나?”

“그 정도야…… 하하.”

“퀴즈 하나 내지. 자네가 14년 동안 모은 종잣돈 말이지. 계산하기 쉽게 10억이라고 치면, 그걸로 매일 딱 1%씩만 수익을 내면, 1년 후 얼마가 되어 있을 것 같나?”

“어…….”

한해는 머리로 계산하기가 어려웠다. 두 배? 그 이상?

“1년에 주식시장이 열리는 날은 전부 해서 240일이네. 매일 1%씩만 수익을 낸다고 했을 때, 자네의 1억은 1년 뒤에 정확히 1, 089, 250, 550원이 되어 있을 거네.”

“네? 십억…….”

“10배가 넘어가지. 그렇다면 종잣돈으로 매일 딱 1%씩만 3년 동안 수익을 낸다면?”

충격 받은 한해는 더욱 계산이 되질 않았다. 30배? 40배? 설마 100배?

“1000배. 3년이면 딱 1조가 넘어간다네.”

“아…… 복리의 마법이네요.”

“아니. 절제의 마법이지.”

사토시 씨는 다시 펜을 들고 1%라는 숫자 주위에 동그라미를 여러 개 둘렀다.

“투자의 최대 적은 욕심이야. 장이 좋을 때는 10%, 아니 20%를 먹는 날도 있지. 자네도 그런 날이 가끔 오기를 기대하며 10년 동안 10배로 돈을 불릴 기대를 했겠지.”

한해는 뜨끔한 나머지 슬쩍 고개를 숙였다.

“절대로 하루에 많이 벌 생각은 하지 말게. 대신 하루도 잃지 않는 방법을 연구해. 그래서 매일 더도 말고 딱 1%의 수익만 안정적으로 유지할 방법을 찾아봐. 그럼 10년까지 걸릴 필요 없이 3년 뒤에 자네는 상상를 초월하는 부자가 되어 있을 테니.”

“혹시…….”

“응. 그게 내가 부자가 된 비법이야.”

사토시 씨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건조하고 단단해서, 아까 해장국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사랑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기대하지 말 것. 철저하게 계산만 할 것. 철저하게. 너무나도 철저하게.”

한해는 몸이 굳어버렸다. 거창하게 투자 전략을 설명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다른 이야기나 기법, 테크닉 등등은 자네가 이미 다 공부했을 테니. 마지막으로.”

그는 최종면접을 치르는 면접관처럼 한해의 눈을 들어다보았다.

“왜 돈을 벌고 싶은지. 먹고살기 충분한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한계를 시험하고 싶은 건지 말해보게.”

“명확합니다. 저는 그저 무기력한 아이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태풍과 가난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습을 그저 울면서 보고만 있었죠. 저 자신도, 저의 꿈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길고 긴 세월을 버티고 홀로서기에는 겨우 성공했지만…… 결국 수진이까지 잃었습니다. 이제 저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약하지 않다고. 먹이사슬 제일 아래에 처박혔던 내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습니다.”

사토시 씨는 빙긋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변하지 않아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지. 돈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자네를 돕지 않겠다고 했고, 그 조건은 지금도 마찬가지야. 자네가 변하지 않았으니 나도 변함없이 자네를 돕도록 하지.”

“저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나야 뭐 어차피 챙겨줄 자식도 없잖아?”

사토시 씨는 농담처럼 눈을 찡긋했지만 한해는 진지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데요. 진짜 이유가 있잖아요.”

“예리한 녀석. 나중에 말해주도록 하지. 자네의 도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과가 나오면. 일단은 흥미진진하게 자네의 도전을 지켜보겠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보자고.”

사토시 씨는 한해의 워크스테이션을 한 번 더 둘러본 후 일어섰다.

“가자.”

“어딜요?”

“내가 말했잖아. 종자돈을 모으면 선물을 주겠다고.”

“저는 이미 오늘 너무 큰 선물을 받았는데요. 1%…… 절제의 마법…….”

“따라와.”

그날 사토시 씨가 준 선물은 절제와 정반대로 너무나도 화려한 벤틀리 세단이었다.

또 하나의 마법처럼, 차는 이미 집 근처에 세워져 있었고 사토시 씨는 무심하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욕심이 생길 때면 이 차를 타고 강남을 한 바퀴 돌아봐. 욕심은 밖에서만 부리고 이 방에서는 언제나 절제. 어떻게?”

“1%만 번다. 대신 잃지 않는다.”

“좋아.”

선물을 준 사토시 씨는 다음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고 사라졌다.

한해는 그날 밤, 정확히 1.17%의 수익을 올렸다. 정보도 확실하고 장도 좋은 날이라 더 먹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지만 겨우 참았다. 대신 그 수익을 지킬 수 있는 헤징 수단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잠들기 전, 그는 혼자 샴페인을 마셨다. 거울 속 자신에게 축배를 들었다.

“1%를 위해 건배.”

새로운 인생의 첫날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

아침이 밝았다.

전업투자자로 나서기로 결심한 뒤 세운 몇 가지 철칙 중 하나.

언제나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가벼운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다.

날씨와 상관없이 운동할 수 있도록 근처 피트니스 센터의 회원권을 사두었다.

걸어가도 될 거리였지만, 어제 사토시 씨에게 받은 선물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는 집에 딸린 주차장에 세워둔 차 시동을 걸고 길을 나섰다.

투자 공부를 시키면서 사토시 씨가 꼭 면허를 따두라고 해서 별생각 없이 따놓았는데, 이미 이 순간을 계획해뒀던 걸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고급스럽다 못해 사치스러운 세단을 모는 기분은 마치 요트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것 같았다.

항해를 쉬는 동안 아르바이트로 택배나 대리운전을 하곤 해서 운전은 익숙했지만 몇억짜리 차를 모는 일은 처음이라 속도를 최대한 낮췄다.

그런데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해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그녀가 걸어가고 있잖아.

뒷모습만 보고 어떻게 아냐고? 팔꿈치만 봐도 알 수 있어.

수진이가 어떻게 이 시간에 이 골목을? 며칠 전에 고향 바닷가에서도 그랬는데…….

짜릿한 소름이 목덜미를 깨물었다.

1%의 행운 혹은 운명일까? 이렇게 1%씩 쌓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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