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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6화 (6/92)

6화

비탄이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강의 손끝이 잠시 떨리더니 이내 턱을 괴었다.

신혼 첫날 밤, 신부를 마주 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힘없이 옆으로 흐트러졌다.

“말해줘요.”

수진은 다시 보챘고, 그 말은 도망치지 말라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강은 다시 그녀를 마주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무슨 소리예요. 난 한해 오빠가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오늘 처음 알았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나자마자 당신 머리를 스친 생각, 그게 답이야.”

“선문답하지 말아요!”

수진은 소리를 지르고, 다시 소리 지르고 싶지 않아 주먹에 힘을 주었다. 본능적으로 뭔가 쥐고 싶은 생각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나이프를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강이 중얼거렸다.

“나를 찌르기라도 할 생각인가?”

“무슨 소리예요?”

“언젠가는 당신이 내 심장에 날카로운 말뚝을 박는 순간이 올 것 같아. 이런 생각을 신혼 첫날 밤에 하다니, 너무 슬프군.”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요!”

“말했잖아. 당신이 이미 짐작하고 있는바, 그대로라고. 집안이 그 지경이 되고 우리 집에 와서 살면서도 당신은 강한해를 잊지 못했어. 몸만 우리 집에 와 있지 마음은 늘 그놈에게 가 있었다고!”

“그게…… 죄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나에게는 죄였어. 난 당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갖고 싶었으니까.”

“이강 씨!”

평소에 쓰던 오빠라는 호칭 대신, 한 번도 부른 적 없는 딱딱한 호칭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강은 얻어맞은 사람처럼 아픔을 느꼈다.

“그렇게 부르지 마.”

“당신 아버지가 주문한 대로 부르는 거예요.”

“아버지는 지금 여기 없잖아.”

“하지만 당신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잖아요? 마찬가지 아닌가요? 한해 오빠가 곁에 없었지만 늘 제 마음속에 있었어요. 그게 이상해요?”

“그게 싫었다고! 당신도 알잖아?”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날 온전히 가지기 위해?”

강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침묵 끝에 다른 이야기를 내놓았다.

“다신…… 다신 그딴 얘기 하지 마.”

과격한 표현에 수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나 경고하지. 아버지가 날 지배하고 있다느니 하는 말, 다신 내 앞에서 꺼내지 마.”

수진은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칼도 창도 꿰뚫을 수 없는 불멸의 장수 아킬레스의 약점이 발뒤꿈치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아버지 이태화 회장은 강에게 아킬레스건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자.”

잔뜩 긴장해 있던 강이 먼저 표정을 풀고 와인 잔을 들었다.

“오늘은 우리가 부부로서 맞는 첫날이잖아.”

수진은 입안에 맴돌고 있던 말들을 삼켜야 했다. 결혼 첫날부터 분노의 자궁에서 잉태된 말들을 쏟아내는 건 너무 잔인하니까.

그녀는 마음을 다스리며 잔을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속이지 말아줘요.”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지. 당신을 가졌으니까.”

강도 잔을 들고 가볍게 건배했다.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며.”

강이 말했지만 그녀는 동의하지도 웃지도 않았다. 강 역시 그녀의 태도에 대해 지적하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신혼 첫날밤의 디너 테이블. 서로의 사랑과 믿음을 확인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증오와 불신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저도 하나 경고할게요.”

하나는 잔을 내려놓자마자 말했다.

“결혼한다고 제 육체와 정신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강의 미간에 위태로운 주름이 출렁였다.

“자녀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것처럼, 배우자 역시 서로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을 물건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 아니야. 알잖아.”

“소유라는 표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요.”

“그래. 그 정도는 인정할게.”

강도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만 방으로 올라갈까?”

“잠시만요.”

수진은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강은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지자 긴 숨을 토해냈다.

와인 잔에 와인을 가득 따르고 소주처럼 거칠게 마셔버렸다.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창밖의 야경을 관조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그토록 갖고 싶었지만 온전히 갖지 못했던 존재를 마침내…….

그런데 훼방꾼이 나타나다니.

강은 핸드폰을 꺼내 한해에게 메시지를 썼다.

-오늘 나타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앞으로 수진이 앞에 또 나타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남의 아내가 된 여자에게 옛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주 지저분한 짓이니까. 그리고 그 여자의 남편으로서 참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형도 알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그는 손을 거두었다.

빌어먹을. 겁에 질린 패배자 같잖아. 너는 승자야. 결국 남편이 된 사람은 너라고. 승자의 여유를 보여주자.

-바쁜 시간 내서 결혼식에 와줘서 고마워. 오늘 밤부터 수진이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줄 테니 걱정 말고. 형도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길.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찍은, 오늘 결혼식을 총괄한 업체에서 샘플로 보내준 사진들 중 신랑 신부가 가장 행복에 겨워 보이는 사진들을 골라 첨부했다.

그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기원했다. 다시는 그놈의 얼굴을 보지 않기를.

.

.

.

수진은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왔다. 얼굴이 얼마나 창백했는지,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여자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아, 죄송합니다.”

괜히 사과를 하고 칸막이 안에 들어가 앉은 수진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놀랍게도 이 와중에 한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바다 오빠가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이었다면? 오늘 밤을 함께 보낼 상대였다면?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려던 차에,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 하지 말자. 불가능한 일이잖아.

다시 오빠를 볼 일이 있을까? 남편이 아니라 그저 옛 인연으로라도…….

수진은 또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 그런 생각하지 마. 너는 오늘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어. 이미 법적으로도 그렇고, 수많은 하객 앞에서 약속도 했어. 돌이킬 수 없다고.

그러다가 또 반대의 생각이 공격했다.

잠깐! 뭐가 안 돼? 이강은 어차피 처음부터 거짓으로 널 속였어. 심하게 말하면 이 결혼은 무효라고! 당장 나가서 말해. 이 결혼은 무효라고!

그녀는 초인적인 힘으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순리에 따르자. 잠깐! 뭐가 순리지?

이제 화장실에서 나가 그의 곁으로 간다. 그리고 함께 침실로 올라가 부부로서의 첫날밤을 뜨겁게…….

수진은 머리를 쥐어뜯을 뻔했다.

성스러운 결혼식날 밤, 자꾸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오늘 밤 나와 침대에 드는 남자가 한해 오빠라면…….

잠깐! 잠깐! 잠깐!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린 수진은 칸막이를 뛰쳐나갔다.

*

말이 저녁이지 아직 밤하늘에 푸른빛이 가득할 때부터 술잔을 기울였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다양한 부위의 돼지고기. 소주와 맥주의 완벽한 비율. 마주 앉은 남자까지…….

소월은 확신했다.

더 이상 바랄 데가 없는 완벽한 조합!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한해의 모습은 참으로 낯설었다. 왜냐면 그동안 한해는 늘 알 수 없는 짐을 진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활짝 웃는 얼굴로 얼굴을 대고 셀카도 찍어줄 만큼 경쾌하다.

게다가 이렇게 멋진 슈트를 쫙 빼입은 모습이라니!

반경 10킬로미터 안에서 적어도 이 남자가 제일 섹시하다는 데 내 왼쪽 손목을 걸게.

“오늘은 참 술이 잘 들어가네요.”

그가 이런 식의 말을 하는 것도 의외였다.

예전에도 항해를 마치고 서울에 머물 때 몇 번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그때는 늘 취하기 전까지만 마시고 잔을 거두었으니까.

오늘은 벌써 소주만 두 병, 맥주도 여러 병.

한해가 쭉쭉 마셔주니 소월도 술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실컷 드세요. 제가 쏜다고 했으니까.”

“아닙니다, 삼항사님.”

“뭐야. 또 더치페이하려고?”

“아니요. 오늘은 제가 낼게요.”

“에이. 갑판원한테 술 얻어먹는 항해사가 어디 있어요.”

“저 돈 많아요.”

술에 취한 얼굴로 내뱉은 한해의 말에 소월은 흠칫 놀랐다.

이 오빠 오늘 무슨 일 있네.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돈을 계속 모으기만 했는데, 이제 쓸 일이 없어져버렸어요.”

“어디에 쓰려고 했는데요?”

“음…….”

한해는 장난스러운, 그러나 마치 슬픔을 숨기고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하는 표정으로 멈춰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워 볼을 꼬집어주고 싶었는데.

“동생을 찾아가려고 했어요.”

“동생? 혹시…… 수진?”

소월은 한해에게 들어 기억하고 있던 이름을 꺼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유일한 여자 이름이기도 했다.

“네. 수진이. 진수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녀는 오래전 배에서 경험했던 일을 떠올렸다.

유성우가 밤하늘을 수놓던 어느 밤이었다.

오로라 못지않은 우주 쇼를 보기 위해 선원들은 갑판에 나왔고, 다들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소월은 한해와 나란히 서서 빛의 마법을 구경했다. 그녀는 발칙한 소원을 빌었다.

‘이 남자와 잘되게 해주세요.’돌아보니 한해는 그 누구보다 간절히 유성을 좇고 있었다.

“오빠는 무슨 생각해요?”

“소원 빌죠. 다른 사람들처럼.”

“무슨 소원?”

“소원은 말하면 안 되잖아요.”

“궁금하다. 뚫어져라 별똥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별똥별 안 봤어요.”

“응? 유성우 보러 나온 거 아니었어요? 그럼 뭘 봤는데요?”

한해는 별들이 비처럼 내리는 신비로운 밤하늘 한복판을 가리켰다.

“북극성이요.”

고대부터 뱃사람들을 이끌어 준 길잡이별을 보며 그는 쓸쓸히 미소 지었다.

소월은 또 궁금해졌다. 남들이 유성우에 홀려 있을 때 혼자 북극성을 보는 이 남자의 마음을 알게 될 날이 올까?

마침내 그날이 온 것이다.

“진수진? 여동생이라면서, 그럼 성이 다르잖아요?”

“복잡한 이야기가 있어요.”

“치이. 또 비밀이라고 둘러대려고?”

“아니요. 오늘은 다 얘기해도 괜찮아요.”

그는 취한 몸짓으로 또 한 잔의 술을 털어놓았다.

“오늘 다 끝났으니까.”

드디어 오늘이구나. 소월은 혹여나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조바심이 나서 조심스럽게 경청 모드를 유지했다.

그럴 필요 없었다. 한해는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그녀도 잘 아는 바다 마을 울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사건과 인연, 그리고 잔인한 운명과 아득한 세월을 지나 슬픈 결혼식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오늘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어요.”

“하아…… 그럼 오빠는 14년 동안 계속 수진 씨를 여자로 좋아했던 거예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늘 깨달았죠.”

“아…… 너무 안타깝다. 아무리 친동생처럼 여겼다고 해도…… 아무리 강이라는 사람이 조건을 내걸었다고 해도…….”

“나는 수진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나에게 엉겨 붙은 불운을 다 떼어내기 전에는 수진이 손을 잡고 싶지 않았어요.”

한해의 음성은 절절했다.

“삼항사님은 절대 이해 못 할 거예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면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는 어머니를 만났던 일도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한 것 같았어요. 그 일을 막으려고 무당이 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러셨구나. 전 오빠 어머님은 기억 안 나요. 아버님은 몇 번 뵈었던 거 같은데. 저한테 과자 사 먹으라고 용돈도 주신 적 있어요!”

“어머니는 저도 잘 기억 안 날 정도로 오래전에 집을 나갔으니까요. 해신이 노여움을 완전히 풀기 위해서는 저도 바다에 나가야 한다고 했어요. 이미 아버지가 제물이 되었으니 저는 안전할 거라고. 오히려 바다에 나가서 축복을 받아오라고 하셨죠.”

“축복이라…… 그 축복이 뭘까요?”

“어떤 특정한 뭔가는 아닌 것 같아요. 이를테면…… 전 이렇게 무사하잖아요.”

한해는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짚었다.

“바다의 저주가 풀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그 자체가 축복이 아닐까요? 게다가 이제 조그마한 사업이라도 할 만큼 돈을 모았다는 거?”

“아하. 그래서 맨날 무슨 투자 관련 공부도 하고 그랬구나.”

한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쓸쓸히 술잔을 들었다.

“얼마나 벌었어요?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너무 노골적인 질문인가? 나도 모은다고 모으긴 하는데.”

한해는 별 거부감 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그가 사용하는 종합금융계좌를 열어 보여주었다.

소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 마이 가뜨…….”

그녀의 눈에 보이는 숫자는 9자리에서 10자리가 되기 직전이었다.

“와아……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이 돈을 모았어요?”

“아시잖아요. 고깃배 타면 돈 많이 모을 수 있는 거. 투자를 배우면서 많이 불리기도 했고.”

“다 써버리는 경우도 많죠. 엄한 데다가.”

“목표가 없다면, 기준이 없었다면 저도 그랬겠죠.”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네요.”

소월은 진심으로 상실의 아픔에 공감해주며 손을 잡아주었다.

“몇 번, 아니 수십 번 제자신에게 물어봤어요.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강이가 뭐라고 하던 간에, 수진이와 몰래 연락을 계속 주고받았을까? 다른 남자가 생기지 않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가난한 갑판원 주제에, 먼바다 고깃배에 일 년 내내 갇혀 있는 처지에 그녀를 차지하려 했어야 할까? 설령 그렇게 했다 해도…… 그녀를 가질 수 있었을까?”

“그만 생각해요.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어도 오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는 또 한 잔을 비우고 웃음을 짜냈다.

“이것밖에 없네요.”

한해는 계속 술을 마셨지만 소월은 술잔을 아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일어서서 걸어가는 한해의 걸음걸이가 비틀비틀했다.

소월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 남자를 챙겨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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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강해지려고 애썼다.

태풍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소년은 그 생각만 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침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돈을 모으고, 체력을 다지고, 공부를 하고, 기본적인 것들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꾸준히 할 수 없는 것들을 초인적인 의지로 매일매일 해왔다.

다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강해지는 것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그녀를 되찾아야만 돈도 건강도 능력도 의미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술집의 좁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차가운 물로 세수했다.

세면대에 비친 얼굴은 알코올이 부른 홍조가 가득했다.

이제 그만 마시자. 너무 취했어.

화장실을 막 나가려는데 핸드폰이 드르륵 울렸다. 메시지 알람이었다.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늘 고독한 상태로 유지해온 그였기에 핸드폰이 울릴 일은 스팸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육지에 있을 때는 소월이 가장 연락을 자주하는 대상이었다.

이번에도 스팸 메시지겠더니 액정을 확인한 그는 총에 맞은 사람처럼 휘청했다.

-바쁜 시간 내서 결혼식에 와줘서 고마워. 오늘 밤부터 수진이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줄 테니 걱정 말고. 형도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길. 강이 보낸 문자였다. 함께 첨부된 사진들도 있었다.

성스러운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진의 모습. 연회복으로 갈아입고 나란히 팔짱을 낀 그녀와 강의 모습은 완벽한 한 쌍이었다.

그랬구나. 강이…… 너는 그랬구나. 이 순간을 맞이하려고 내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겠지. 아마도 수진이는 나를 기다렸을 테니.

졌다. 너한테 졌어. 너만큼 운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자. 너만큼 집요하지 못했다고 말하기엔…… 그 긴 세월 바다를 떠돌며 견뎌온 내 자신이 너무 가여우니까.

나는 누구보다 집요하게 노력했어. 더 강해지려고. 하지만 너만큼 행운을 타고나지 못했다고, 그래서 너에게 졌다고 하자.

패배를 인정한 한해의 시선은 돋보기 초점처럼 수진의 얼굴에 모아졌다.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그 어떤 여자가 이렇게 눈부시게 웃을 수 있을까?

암. 우리 수진이밖에 없지.

다른 남자의 신부가 된 수진이의 모습 위로,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함께 했던 추억이 겹쳐졌다.

온 세상이 다 눈으로 덮였던 어느 겨울날, 둘은 비료 포대를 들고 마을 뒷산에 올랐다.

눈이 쌓인 산등성을 스키로프 삼아 비료 포대를 깔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놀이를 즐겼다.

“꺄아아악! 오빠아아아아!”

수진의 즐거운 비명에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고, 그는 늘 비탈 아래에 먼저 내려가 그녀를 기다렸다. 혹여나 그녀가 다칠세라, 몸으로 그녀를 받아주기 위해.

그의 품에 쏙 안길 때면 그녀는 구슬 같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헤헷! 우리 한 번 더 타자!”

“그래.”

손을 잡고 미끄러운 산길을 오르다 넘어져도 웃음이 났다. 무릎을 돌에 찧어도 웃음이 났다. 손이 시려도, 묻은 눈이 녹아 옷이 축축해져도 웃음이 났다.

함께 있으면 온 세상이 웃음 천지였다.

세월이 흘러 꼬마아이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오늘 밤 달콤한 첫 날밤을…….

한해는 마지막으로 사진 속 그녀를 마주했다.

그래. 그녀가 웃잖아. 행복하다잖아. 그러니 이제…… 놓아줘.

그는 그녀의 남편이 된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축하해. 너도 수진이도 늘 행복하기를 빌어줄게^^그 짧은 메시지를 쓰는데 어찌나 손이 떨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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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은 화가 많이 났다.

화장실에 다녀온 한해는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마치 술로 눈물을 막으려는 양 마셔대고 있잖아.

그녀는 가슴이 아파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울어요. 딱 오늘 하루만 울어요.”

그녀의 말에 만취한 사내의 울음이 끄윽끄윽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자기 몸집보다 두 배는 큰 사내를 품고 다독여주면서, 고등학교 때 배운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구절을 조금 바꿔서 떠올렸다.

사내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그녀의 예상대로 한해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해버렸고, 그가 육지에서는 어디 머무르는지 그녀는 미처 알아놓지 못했다.

그리고 밤이 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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