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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1화 (1/92)

1화

참 이상하죠? 결혼을 하루 앞둔 여자가 정신과 상담을 요청하다니.

그냥 다 털어놓고 싶어서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요.

선생님은 의사로서 환자의 비밀유지 의무가 있잖아요. 그렇죠? 그럼 안심하고 말씀드릴게요.

긴 얘기는 아니니 10분만 들어주시면 돼요. 딱 10분.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전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동해안에 있는 울진이라는 곳, 들어보셨어요?

맞아요. 대게로 유명하죠. 원자력 발전소도 있고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전에 형성된 동굴 성류굴도 있죠.

하지만 제일 멋진 건 바다예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이 시리고 마음이 시려서,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바다죠.

저는 그토록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어요.

아빠는 고깃배를 탔고, 그 배의 선장님이 바로 옆집에 살았고요. 그 집에는 저보다 두 살 많은 오빠도 있었죠.

‘한해’라는 한자 이름이 있었지만 제가 늘 바다 오빠라고 불렀던 그 오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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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흑…… 읍…….”

나직이 과거를 읊조리던 그녀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죄송해요, 선생님. 이렇게 빨리 눈물이 터질 줄은 몰랐는데.”

정신과 의원 진료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의사가 그녀와 마주하고 있었다. 중년 남자 치고도 무척이나 낮은 저음으로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요. 진정하고 다시 말씀하세요.”

진정이라…… 내가 지금 어떻게 진정할 수 있을까?

그녀는 젖은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후우후우…… 심호흡을 거듭하며 과거로 돌아가 먼 기억을 건져 왔다.

“바다 오빠는 저에게 희망과 같은 의미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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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만이 아니었다. 푸른 바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동네 사람 모두의 희망이었다.

조금만 싹수가 보인다 싶으면 다들 도시로 떠나는 시골에서, 그는 꽤나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는데도 끝까지 마을을 지켰다.

공부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배도 타고 낚시도 곧잘 했다. 운동도 싸움도 잘했는데, 동네에서 괜히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놈들이 있으면 가만히 놔두질 않는 의협심도 있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데도 수영 실력은 선수급. 파도를 가르고 마음껏 헤엄치는 그의 모습에 설레어하던 동네 소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바탕 수영을 하다가 나온 그의 젖은 몸이 오후의 태양을 가리면 마치 후광처럼 빛이 번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소녀들은 한숨지었다.

아……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는 오직 한 명의 소녀, 그녀에게만 손을 흔들어주었다.

“수진아!”

수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번쩍 안아서 들어 올리곤 했는데, 그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둘만의 인사법이었다.

그러나 수진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런 인사는 사라졌고 못내 서운했던 그녀가 물어보았다.

“오빠. 왜 이제 나 안 들어줘? 너무 무거워져서 그래?”

“그럴 리가.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는걸. 사람들이 흉볼까 봐 그래. 다 큰 처녀를 막 안고 들어 올리면.”

그녀는 점점 커가는 몸이 서운할 지경이었다. 키가 커지고 가슴이 나오고 생리를 시작하는 당연한 변화가, 그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래봤자 한해의 체격이 워낙 커서 옆에 서면 꼬맹이처럼 보였지만.

둘은 종종 바닷가 언덕에 올라가서 별 구경을 했다. 그는 생일 선물로 받은 망원경으로 별을 보여줬다.

“저기 보이는 별자리가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카시오페이아.”

별자리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기도 했고, 화성이나 목성 같은 태양계의 행성과 먼 우주의 항성이 어떻게 다른지 가르쳐주기도 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대부분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들이다. 항성이라고 부르지. 그리고 저기 화성, 금성, 또 목성 같은 것은 여기서 보면 별하고 똑같이 생겼지만 지구와 함께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들이고.”

한해 오빠와는 별만큼 많은 추억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별 구경이 제일 행복한 기억이었다.

바닷가 절벽에 나란히 앉아 있노라면 수진은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그 무엇도 우릴 갈라놓을 순 없어.’

가끔 오빠 어깨에 머리를 슬며시 기대기도 했다. 추운 척 팔짱을 끼기도 했고.

별도 달도 희미한 도시의 밤하늘과는 차원이 달랐다. 바닷가 마을의 밤하늘은…… 손을 뻗으면 은하수의 별들을 훑어 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절벽 아래로는 끝없이 파도가 밀려들고, 신비로운 빛과 어둠 속에 오직 둘뿐이었다.

한해는 고깃배의 선장인 아빠와 둘이 살았다. 엄마는 그가 아주 어릴 때 신 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었다고 했다.

엄마 없이 자란 티가 전혀 나지 않았는데도, 수진은 한해를 볼 때마다 왠지 쓸쓸해 보이고 모성애가 꿈틀거렸다. 그 마음이 모성애인 줄도 몰랐지만.

밤하늘에 시선이 멎은 한해의 옆모습을 훔쳐보면서도 그랬다. 끝내주게 멋지다고 느끼는 동시에 꼭 안아주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겨우 중학생이었던 탓에 바보 같은 질문이 나오곤 했다. 이를테면,

“바다 오빠. 열일곱 살은 어떤 기분이야?”

“고마운 기분.”

“고마운 기분? 그게 무슨 뜻이야?”

“이제 스스로 나를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줄 만큼 몸이 튼튼해졌구나 싶은 마음. 다행이다 싶지.”

“치이. 그래봤자 이제 고1이잖아.”

“응. 그래서 빨리 스무 살이 되고 싶다.”

“스무 살이 되면 뭘 할 건데?”

“어른이 되잖아. 대학생.”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근처에는 대학이 없었으니 떨어져야 한다는 뜻이니까.

“오빠는 어느 대학에 갈 건데?”

“목표는 해양대학이야.”

“해양대학? 그게 어디 있는데?”

“부산.”

“부산은 여기서 멀어?”

“멀지. 아주 멀지.”

중학생인 수진은 오빠와 떨어지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이별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낙담한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손을 잡아줬다.

“하지만 저 별보다는 가깝지.”

그는 수진의 손가락을 펴서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가리켰다.

“북극성. 너의 별이잖아.”

“북극성이 나의 별이야?”

“수진. 빼어날 수에 별 진. 빼어난 별.”

그 말에 축 처져 있던 그녀의 마음이 날아올랐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말 한마디에 그녀의 기분을 하늘처럼 띄워주기도 하고 땅으로 내팽개칠 수도 있는 사람.

그날 밤부터 그녀도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꼭 바다 오빠가 다니는 대학에 입학해 후배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희망의 미풍이 바닷가에 넘실거리던 그 시절. 모든 것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 촉발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번졌지만, 평화로운 시골 바닷가 마을에서는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그즈음 이 바닷가 마을로 전학 온 한 남자아이와 그 가족 때문에 동네가 한바탕 떠들썩했다. 근처 동네도 아니고 서울에서,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시골 마을로 전학을 오는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이강. 수진보다는 한 살 많고, 한해보다는 한 살 어린 학생이었다. 한해처럼 체격도 좋고, 무엇보다 출신을 상징하듯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수진은 동네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들었다.

“울진 출신 중에 제일 성공한 집이지. 서울에서 건설 회사를 한다고 하던데. 빌딩도 몇 채나 짓고 그랬대.”

“그런 집이 왜 이 촌구석 고향에 내려왔대?”

“금융위기인가 뭐시기 때문에 회사가 부도났다지 아마?”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사업이 망해서 도망을 왔다는 데도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에 살면서 외제차를 타고 다니긴 했다.

강의 아빠는 다른 곳에 있는지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고, 엄마도 가끔 장을 보러 나오는 정도 외에는 두문불출.

늘 외로워 보이던 강에게 가장 먼저 다가간 사람이 한해였다. 그는 강을 집에 초대했고 수진에게도 인사를 시켜주었다.

어차피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에 수진은 2학년, 강은 3학년이니 자주 마주치고 친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강 역시 한해 못지않게 수진에게 잘해주었고, 그녀로서는 작은 오빠가 한 명 더 생긴 기분이었다.

강의 능력치는 정말 엄청났다. 수진이 아는 사람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한해였는데 강의 실력은 차원이 달랐다. 중학교는 물론이고 동네 고등학교 학생들을 다 합쳐도 강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없었다.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이나 게임도 마찬가지. 그는 누군가에게 지는 일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아이였다.

한해, 강, 수진. 한 살씩 차이가 나는 셋은 친남매처럼 어울려 다녔다. 시장에 가서 군것질도 하고,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PC방에서 게임도 했다.

공부도 게임도 강이 제일 잘했지만 단 한 가지, 수영만큼은 한해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강은 자꾸 대결하려고 했고, 결국 큰일이 났다.

수영 대결을 한다고 멀리까지 나갔던 강이 쥐가 나서 물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모래사장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진은 발을 동동 굴렀다.

다행이 한해가 목숨을 걸고 강을 구해 나왔지만, 한해는 탈진해버렸고 강은 의식이 없었다.

“오빠! 강이 오빠! 정신 차려!”

수진이 흉부를 압박하고 인공호흡까지 한 끝에 겨우 강을 살려냈다.

겨우 의식이 돌아온 강은 코끝이 닿을까 말까 한 거리에서 수진의 얼굴을 마주했다.

“오빠? 괜찮아? 나 누군지 알겠어?”

그는 멍하니 닿을 듯 수진의 얼굴을 보기만 했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부모의 얼굴을 처음 보듯…….

그 일 이후로 강이 달라졌다. 한해는 물론이고 수진까지 피하기 시작했다.

인사를 해도 안 받고 지나치고, 뭘 잘못했냐고 수진이 물어봐도 말꼬리를 흐리며 피했다. 그녀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2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얼마 안 남은 어느 날. 강이 그녀를 학교 뒤편으로 따로 불렀다. 그는 찬바람 속에 고백했다.

“널 좋아해. 여자로서.”

수진의 충격은 엄청났다. 중학생인 그녀가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친오빠처럼 지내던 강이 오빠의 고백이라니…….

“안 돼, 오빠. 그러면 안 돼…….”

“바다 형 때문이야?”

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끝도 없이 그녀를 응시하는 강의 시선은…… 한해와 수영 대결을 할 때 눈빛과 비슷했다.

그는 고백만큼이나 놀라운 이야기를 또 했다.

“나 다음 달에 서울 올라가. 아버지가 다시 사업을 재기하셨어.”

“응? 진짜?”

“니가 원하면 부모님한테 얘기해서 우리 집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줄게.”

여자로 좋아한다는 고백보다 더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넌 여기 시골에 있을 애가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정말…… 예쁘고 똑똑하단 말이야.”

칭찬이긴 했지만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이런 시골에 처박혀서 어떡하겠다고? 같이 서울로 가자. 너희 부모님도 좋아하실 수 있어.”

그녀는 화가 났고, 그 화를 감추지 않았다.

“내 대답은 거절이야. 난 여기가 좋고 부모님하고 떨어지고 싶은 생각도 없어.”

강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물었다.

“바다 형 때문은 아니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수진은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그녀는 자리를 떴고 그는 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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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수진은 긴 한숨을 밀어냈다. 프라다 재킷 위로 흘러내린 목도리를 벗어 무릎 위에 놓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의사가 물었다.

“강이 오빠와의 관계가 더욱 어색해졌겠네요.”

“그럴 새도 없었어요. 며칠 뒤에…… 후우…….”

수진은 하얀 팔뚝을 손으로 문질렀다.

떠올리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지는 그날 밤, 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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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 마을에 가장 중요한 뉴스는 기상예보. 그날의 기상예보는 주민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먼 바다로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되었던 제10호 태풍 ‘카라일’이 갑자기 진로를 바꿔 해안가에 심각한 피해를 줄 것으로 보입니다.”

한해의 아버지가 탄 배는 미쳐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그 배에는 수진의 아버지도 함께 타고 있었다.

“어떡하나. 느그 아버지 빨리 돌아와야 하는데! 무신 태풍이 이래 변덕을 부려싸서…… 아이고…….”

수진의 어머니는 반쯤 실성한 상태였다. 무법자 같은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집 앞 방파제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엄마, 위험하다잖아. 빨리 들어와.”

수진은 엄마의 팔을 잡고 집에 데려왔지만 엄마는 자꾸 집 밖으로 나갔다.

아빠가 걱정되는 마음은 수진도 한해도 마찬가지였다. 한해는 수진의 집에 건너와 그녀를 안심시키고, 함께 기도했다.

“괜찮을 거야 수진아. 두 분 다 무사히 돌아오실 거야.”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한해의 눈에도 공포가 가득했다.

미친 비바람이 동네를 찢어발길 것처럼 휘몰아치던 그날 밤, 모든 것이 끝장나버렸다.

남편이 걱정되어 방파제 앞을 떠나지 못하던 수진의 어머니는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었고 한해 아버지의 고깃배는 결국 태풍을 견뎌내지 못하고 침몰해버렸다.

다음 날 아침. 태풍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하늘은 파랗게 개고 바다는 평화를 되찾았지만, 작은 어촌마을은 죽음과 상실의 그림자에 갇혀버렸다.

그 뒤로도 감당 못 할 상황이 이어졌다.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른 상황에서 빚쟁이들이 몰려와 난리가 났다. 고깃배를 새로 사면서 빌린 돈이 꽤 있었던 탓이었다.

한국해양대학에 가서 선장이 되겠다는 한해의 꿈도, 그 배의 항해사가 되겠다는 수진의 꿈도……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수진은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 뒤, 한해는 버스를 타고 낯선 도시로 향했다.

신내림을 받은 엄마를 찾았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낡은 상가 건물에서 점집을 하고 있던 그녀는 몇 년 만에 아들을 보고는 맥 풀린 한숨을 쉬었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화를 면하지 못했구나. 이날을 막으려고 널 두고 집을 나온 건데.”

그녀는 초점을 잃어버린 눈으로 주섬주섬 무구를 챙겼다.

“씻김굿을 해야겠다.”

그리고 한해가 지켜보는 데서 굿판을 벌였다.

한해는 산산조각나버린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며 울고 또 울었다.

굿을 마친 그녀는 반쯤 눈이 돌아간 얼굴로 한해의 뺨을 감쌌다.

“바다로 가.”

한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돼요. 아빠를 집어삼킨 바다로 가라고요?”

“여기서 도망치면 더 큰 화를 면치 못해. 바다에 몸을 맡겨야 해신이 노여움을 거두신다. 제물은 이미 거둬가셨으니 너에게는 축복을 줄 거야. 어미가 하는 말을 믿어라. 제발…….”

그녀는 눈물로 호소했고, 한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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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고요했던 어느 날 저녁, 한해는 수진을 데리고 언덕에 올랐다. 자주 앉아 있던 절벽에 나란히 앉더니 말이 없었다. 가끔 절벽 아래를 슬쩍 내려다볼 뿐.

“처음이다. 여기가 무섭게 느껴진 적은. 여기서 떨어지면 죽겠지?”

“그런 얘기 하지 마, 오빠…….”

“수진아. 오빠는 학교에 자퇴서 냈다. 배 타려고.”

“뭐라고? 오빠…….”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고 난 뒤, 수진은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이 마른 줄 알았다. 야속하게도 눈물은 끝이 없었다. 온몸에 있는 수분을 다 짜낼 셈인가 싶었다.

“나는 어떡해? 응?”

“강이네 집에서 너를 돌봐주시겠대. 너무 고마운 일이지. 강이 다음 달에 서울 올라간다는 말 들었지?”

“아아…….”

“강이 아빠가 되게 큰 건설 회사 회장님이래잖아. 강이가 널 친동생처럼 어여뻐 하니까, 강이네 부모님도 널 잘 돌봐주실 거야.”

“오빠! 나 싫어! 나 오빠랑 떨어지기 싫어. 부모님도 없는데 오빠까지…….”

한해는 그녀를 꼭 안고 달래주었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야. 생존의 문제야.”

수진은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계속 눈물만 났다.

“어떻게 오빠까지 또 배를 타? 응? 우리 엄마 아빠, 아저씨까지 집어삼킨 바다에 왜 또 나가냐고.”

한해는 무당이 된 엄마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현실도 운명도 같은 곳을 향하고 있어. 바다.”

“배 타고 나가면? 언제 나 찾으러 올 건데?”

“5년? 아니면 10년?”

“뭐라고? 5년? 10년? 오빠…….”

“내가 자리 잡고 널 다시 찾을 정도로 돈을 벌려면…… 그것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어.”

한해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해. 새로운 삶을 살아.”

“오빠…… 난 싫어…… 싫다고…….”

싫다고 말하면서도, 발아래 아득한 낭떠러지를 보며 수진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구나.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닌, 죽고 사는 문제.

“수진아. 부탁 하나 해도 될까?”

그녀는 젖은 얼굴로 한해의 젖은 얼굴을 마주했다.

“우리 서로를 위해 기도할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너도 서울에서 버티기 쉽지 않을 거야.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약속해줘.”

“약속할게.”

“그리고 우리…… 서로를 위해 서로를 잊자.”

그 약속은 하지 않았다. 희망고문이라도 좋으니, 다시 오빠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몰래 품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선 못 살 것 같았으니까.

살아남겠다는 약속은 했지만 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은 것이다.

별도 달도 바다 위로 뚝뚝 눈물 흘리는 밤. 그들이 함께한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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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야기를 마친 수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얘기가 너무 길었나요? 10분이 넘었네요.”

“아니요. 시간은 충분합니다. 한 세션이 50분이니까요. 아직 20분 더 남았습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정신과 의사가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울에 올라온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강이 오빠네 집에서 살게 되었죠. 다들 저한테 잘해주셨어요.”

“강이 오빠는요? 수진 씨를 여자로 좋아했잖아요?”

“그런 마음을 참았던 거죠. 얹혀 사는 입장이었던 저를 더 배려하고 조심해줬어요.”

“오호, 어린 나이에 그런 마음 씀씀이를 갖기 쉽지 않은데.”

“그이는…… 정말 저를…… 정말 오래오래 기다려줬어요.”

“그이? 아, 그분하고 결혼을 하는 건가요? 강이 오빠?”

“네. 바로 내일이요. 그런데 여기 와서 이러고 있네요.”

수진은 다시 쓸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음. 결혼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또 그 과정에서 수진 씨의 마음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네요. 결혼식 전날에 병원까지 찾은 이유가 거기 있을 테니까요.”

“네. 제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과정…… 말씀드릴까요?”

“잠깐만요. 그 전에, 한해 씨라고 했나요? 그분은 그 뒤로 못 만났나요?”

수진의 턱 근육이 수축되었다. 정적이 흐르는 진료실 안에, 꽈득 이 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다 오빠는…… 오빠는…….”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그녀를 봤다면 이런 말을 했을 거다.

결혼을 전날에 신부가 왜 자꾸 울어? 행복해서 잠 못 이뤄도 모자랄 판에.

긴 눈썹 아래 그녀의 젖은 눈이 은은히 반짝였다. 슬픈 전설을 지닌 별처럼.

“바다 오빠는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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