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64화
하지만 수용만 잘할 뿐이었다. 이오스는 언제나 그렇듯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강풍에 다 날아가 버린 옥수수를 보며 미노스는 한숨을 쉬었다. 권역 안에서의 이오스는 무서울 게 없지만 밖으로 나온 그의 마법은 결코 화수분 같은 게 아니었다.
공작가로 갈 때는 도착하기 전에 몰래 마력을 증폭시키거나 채워 주는 수법을 땅에 심어 놓아 별 걱정 없이 힘을 쓸 수 있었으나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동하는 데 힘을 쓰고 연이어 모래 폭풍과 바람을 일으키다니, 이후에 어쩌자는 건지 걱정스러웠다.
“인간 따윌 상대하는 데 힘 떨어지는 것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나? 어이, 어디 있니, 쥐새끼야!”
스테판은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오스의 마법은 놀랄 만한 것이었으나 북부에서 마물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
옆에 있는 고블린의 말을 들어 보니 힘을 쓰는 데 나름 제약이 있는 듯싶었다. 게다가 이건 서로 싸우고 이기는 싸움이 아니었다.
‘시간을 끌자.’
그가 갑작스레 나타난 방해꾼의 시선을 최대한 끌면 그의 형제가 루비카를 데리고 달아날 것이다.
비록 그가 있던 쪽의 옥수수 밭은 다 날아가 버렸지만 아직 남은 구역도 있었고 산으로 달아나면 상대도 어쩌지 못하겠다 싶었다.
“루비카는 어디 있냐?”
이오스의 질문에 스테판은 대답 대신 조명탄을 날렸다.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을 직격으로 맞은 이오스는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너, 이씨!”
나름 자비를 베풀겠다고, 루비카를 만나 제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지 버릇없는 권속에게 알려 주라고 한 뒤 넘어가려 했건만 돌아오는 게 이거라니.
잔뜩 화가 난 이오스는 앞뒤 가리지 않고 돌멩이를 주워 마구 던졌다. 이오스의 손에서 벗어난 돌멩이는 커다란 바윗덩이로 변해 스테판을 향해 날아갔다. 얄밉게도 스테판을 날쌔게 바윗덩어리를 다 피했다.
“이오스 님, 그렇게 막무가내로 던지지 말고 생각 좀……”
“넌 가만있어. 아, 열 받아.”
정말 쥐새끼처럼 쏙쏙 빠져나가는 스테판에게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이오스는 시간을 멈추는 마법을 쓰고자 했다. 하지만 마법은 발동되지 않았다. 앞서 지나치게 힘을 쓴 까닭이었다.
“아니, 왜 안 멈춰. 이거!”
“그러길래 제가 막 함부로 마법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 말 좀 들어 주십시오.”
“이 씨, 그깟 시간 마법 좀 못 쓴다고 내가 질 것 같아?”
이오스가 스테판과 싸우는 건지 미노스와 싸우는 건지 모를 것 같은 말다툼이 이어지는 사이 에드가는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스테판과 주고받는 신호 같았다.
‘스테판이 이오스를 유인하는 틈을 타 도망치려는 거군.’
그러자면 분명 말을 타러 올 것이다. 에드가는 스테판이 묶어 둔 말과 최대한 가까운 쪽으로 이동해 때를 기다렸다.
약간의 침묵 후 동쪽 방향에서 옥수수가 흔들리더니 스테판의 쌍둥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참 주변을 살펴보더니 오른손의 밧줄을 당겼다. 그러자 얼굴에 자루가 씌어진 루비카가 줄에 끌려 나왔다.
말에 타기 쉽게 손과 발을 풀어 줬으나 달아나지 못하도록 허리를 묶은 밧줄을 그가 쥐고 있었다.
잠옷 차림에 맨발인 그녀의 모습에 에드가는 가슴이 아팠다. 스테판의 쌍둥이가 루비카를 먼저 말에 태우기 위해 등을 돌린 순간 에드가가 주머니칼을 꺼내 그의 목을 찔렀다.
“윽!”
하지만 스테판의 그림자 역할을 아무나 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기척을 느낀 상대는 몸을 틀었다. 그 바람에 에드가는 목표했던 목이 아닌 말의 허벅지를 찌르게 되었다.
“히이잉!”
갑자기 칼에 찔린 말이 놀라 울부짖으며 앞발을 들었다. 루비카는 간신히 말의 갈기를 꽉 잡아 떨어지지 않았다.
자루로 얼굴이 다 가려진 그녀는 무엇 때문에 말이 이러는지 몰랐으나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움직였다.
“뭐야, 저기에 쥐새끼가 또 있네?”
이오스가 잠시 그의 형제에 한눈을 판 틈을 타 스테판이 독침을 날렸다. 하지만 독침은 이오스의 팔에 닿자마자 시커멓게 변해 모래처럼 부서져 버렸다.
“너어!”
감히 인간의 공격이 자신에게 통했다는 사실이 이오스를 흥분시켰다. 화가 난 그의 감정에 반응해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오스, 진정해! 루비카가 위험해.”
아까부터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던 에드가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잔뜩 화가 난 이오스의 귀에 에드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땅까지 흔들리니 말은 도무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점점 갈기를 잡은 루비카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자칫 잘못하면 낙마할 위기였다.
“루비카, 이쪽이야!”
에드가가 그녀를 향해 외쳤지만 역시 듣지 못하게 조치한 듯 그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말에서 떨어지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에드가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직접 말의 등에 올라타 진정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아래에서 말고삐를 잡으면 루비카가 떨어질 수 있어.’
위에서 타야 한다. 에드가는 이오스 때문에 생긴 바위를 이용하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오스가 스테판과 그의 쌍둥이를 막무가내로 공격해대는 턱에 둘은 그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딩고!”
바위 위로 올라가 루비카를 태운 말의 이름을 불렀다. 마구간에는 자주 가지 않았으나 어떤 식으로 훈련받는지 말의 이름은 무엇인지 잘 알았다.
비록 훈련사처럼 복잡한 휘파람을 불 수 없어 복잡한 명령을 할 수 없었지만 이름이 불린 말은 에드가를 향해 뛰어왔다.
승마는 귀족 남성의 가장 기본적인 교양 중 하나였다. 거기에 왕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의 후계자였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납치를 대비한 훈련을 받았다.
그는 말의 각도와 속도를 계산해 열 걸음 정도 남았을 때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말의 엉덩이에 걸터앉는 데 성공했다.
갑자기 자신을 뒤에서 껴안는 남자의 손길에 누구보다 깜짝 놀란 건 루비카였다.
스테판에게서 드디어 달아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붙잡힌 걸까? 팔꿈치로 등 뒤의 사람을 가격하려 했던 그녀는 남자의 손길에 잠시 멈칫했다.
자신의 손이 폭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손은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낮은 듯 차가웠다.
그녀의 손에 말고삐를 쥐여 주는 손동작도, 떨어지지 않게 허벅지로 말의 등을 압박하며 그녀의 등 뒤를 탄탄히 받쳐 주는 넓은 가슴도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에드…… 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오스가 자신을 발견한 데 희망을 걸긴 했으나 그 드래곤은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설사 에드가가 납치 소식을 알게 됐다 해도 전문 추적단을 보내지 직접 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 앉은 그가 얼굴의 자루를 벗겨 주자 보게 된 고삐를 쥔 손은 틀림없이 에드가였다.
목구멍 깊숙이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당장에라도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눈이 가려진 채 이동하는 내내 그녀는 그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동안 그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것은 모두 오해였다.
먼저 체험한 삶대로 운명이 흘러갔다면 납치된 건 그녀가 아니라 그였겠지.
루비카는 그래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자신을 살려 두는 의도가 에드가를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해서라면 그 뜻대로 되지 않게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에드가, 여긴 위험해.”
그녀를 껴안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밤중 그를 깨운 상실감 대신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굳어 버린 듯 차가웠던 심장에 이제야 피가 통하는 듯 뛰어 가슴이 간질거릴 정도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느껴지는 루비카가 가진 고유한 살 냄새는 그에게 강렬한 기쁨과 충동을 안겨 주었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를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알고 있어.”
“그런데…… 그런데 왔어? 당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데 고작 나 같은 거 때문에…….”
자책에 가까운 그녀의 말이 그의 맘에 들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루비카는 그가 지금 무척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맞닿은 등을 통해 손에 잡힐 것처럼 그의 기분을 알 수 있다니…….
“세상이 날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알 바 아냐. 중요한 건 내게 제일 소중한 사람은 당신이란 사실이야.”
그가 아주 딱딱하게 대답하며 고삐를 당겼다. 절벽 방향을 향해 달려가던 말이 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오스 덕에 땅이 수시로 흔들리는 바람에 말을 진정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저주 이후로는 말을 자주 타지 않아 능숙하게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멀리 떨어져 숨는 게 낫겠군.’
에드가는 이오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심히 달린 끝에 이오스는 어느덧 손 정도 크기가 되었다.
멀리서 보아도 월등히 뛰어난 힘을 지닌 이오스를 약 올리며 압박하는 스테판의 솜씨는 감탄이 나왔다.
처음에 비해 힘이 떨어졌다 할지라도 이오스는 강한 드래곤이었다. 그러나 이오스의 머리는 제 힘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몰랐다.
거기에 다혈질이라는 최악의 조합. 스테판은 이오스를 거의 가지고 놀다시피 했다.
‘슬슬 해가 뜰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다리가 마비되면 말 위에서 버티기 힘들어진다. 에드가는 못 말리는 드래곤이 난동을 피우는 틈을 타 일단 비교적 안전한 산속으로 피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각하!”
땅 아래에서 미노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이 놀라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오기 전에 이오스 님께 이곳 위치에 대해서 이것저것 캐물었습니다. 집사가 어디인지 대충 아는 눈치였습니다. 아마 내일 정오까지는 기사단이 도착할 듯싶습니다. 그때까지만 버텨 주십시오.”
목소리에는 지독한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이오스를 말리고 또 말리다 포기하고 에드가에게 온 눈치였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존재 중 하나가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관을 모시는 똑똑한 부하다. 어쨌든 이오스의 곁에 그나마 미노스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맙네.”
“아닙니다. 앗! 조심하십시오.”
미노스의 경고와 함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생각해 보니 아까 이오스와 스테판 사이에 그 쌍둥이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군.’
에드가는 이를 꽉 깨물고 말고삐를 쥐었다. 등에 칼이 꽂혀도 말고삐를 놓진 않으리라. 하지만 칼이 날아가 꽂힌 곳은 그의 등이 아닌 말의 엉덩이였다.
히이이잉!
말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지르며 겅중겅중 뛰었다. 아까보다 말에서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그 자신은 낙법을 배워 문제없었지만 루비카가 걱정이었다. 자칫하면 허리를 크게 다칠 수 있었다.
“에드가, 조심해. 절벽 앞이야!”
하는 수 없이 버티는 사이 어느덧 절벽 앞까지 왔다. 날뛰던 말도 점점 기세가 죽어 갔다.
한참 달려온 데다 부상까지 입으니 말도 힘이 빠질 만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말이 먼저 쓰러질 것이다. 그때 낭떠러지 쪽으로만 쓰러지지 않으면 된다.
에드가는 말을 어느 쪽 방향으로 이끄는 게 좋을지 판단하기 위해 고개를 높이 들어 주변을 살폈다.
‘이런.’
저 멀리 동산 주위 하늘이 어느덧 새빨갛게 변했다. 사물을 분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주변도 밝아졌다.
달은 모습을 감춘 지 오래되었다. 눈앞의 일에 급급해 그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최악이다.’
동산 위에 찬란한 빛줄기 하나가 구름과 공기를 헤치고 그에게 닿았다.
일시에 다리에 힘이 빠졌다. 가장 최악의 순간 저주가 발동되었다. 원래 나쁜 일은 가장 안 좋을 때 일어난다.
“에드가!”
“각하!”
자신의 등을 단단히 지탱했던 그의 이상 상태를 루비카는 놓치지 않았다.
“잡지 마!”
하필이면 낭떠러지 근처,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위험한 사람은 자신 하나면 족했다.
하지만 그가 그리 말한다고 해서 들어줄 그녀가 아니었다. 루비카는 말에서 떨어지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