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53화
“여기 핀 수국 봤어? 집무실 창에서는 나무에 가려 안 보였을 텐데…….”
화단 모퉁이를 돈 루비카는 더 이상 설명을 잇지 못했다. 손에 든 램프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가 그녀를 꼭 끌어안는 바람에 몸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 수국 향과 그의 향이 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놓아줘.”
그리 말했건만 에드가는 한참이나 그녀를 껴안고 놓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 안긴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파묻고 달달한 향수 냄새 섞인 체향을 맡았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엉망으로 뛰는 그녀의 맥박이 전해졌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빨라질수록 그는 안도했다. 갑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불안했는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어느덧 그에게 자연스럽게 안기고 또 입술도 허락했건만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 알게 된 안정감과 행복이 깊으면 깊을수록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될까 불안했다.
“에드가.”
루비카는 곧 놓아 달라고 청하는 걸 포기하고 그의 뺨을 살며시 손으로 쓸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손짓에 방금까지 그의 등에 들러붙었던 불안이 사라졌다.
“불안해?”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는 적갈색 눈이 신비로웠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아니라고 말했을 그가 마법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루비카 앞에만 서면 그는 솔직해졌다. 그녀라면 그의 모든 것을 말해도 들어 주고 이해해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어디 안 가. 쭉 당신 곁에 있을게.”
루비카를 안은 그의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진심이야?”
“응.”
“그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고 있어?”
소름 돋을 정도로 낮은 음성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그의 푸른 눈은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고 턱 끝과 입은 언제나처럼 강인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를 안고 있는 손이 조금 떨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거다. 루비카는 잠시 그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봤다. 켜켜이 쌓인 감정은 딱히 무어라 정의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웠다.
“응.”
정말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왜곡시키는 긴말 대신 아주 짧게 답했다. 곧 그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더니 입술이 닿았다. 몇 번을 닿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키스를 했지만 매번 입술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발끝까지 열에 휩싸였다.
“루비카.”
키스가 끝난 후 닿은 그의 이마는 변함없는 혈색과 달리 감기 걸린 사람처럼 뜨거웠다. 뺨에 닿은 손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차가운 사람이었던 그가 언제 이렇게 변한 것일까? 루비카는 눈을 감고 그의 따스하고 기분 좋은 손길을 느꼈다.
“정말 계속 내 곁에 있어 줄 거야?”
이미 그리 하겠다고 말했는데 그가 재차 물어왔다.
“쭉 곁에 있을게.”
“아르망을 다시 만나도? 그자 말고 내 곁에 남을 거야?”
“응.”
지체 없이 대답이 나왔다. 에드가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으스러지게 그녀를 껴안았다. 이제 이 품안의 따뜻한 온기와 헐떡이듯 작게 뛰는 심장 소리가 사라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숨 쉬기 힘들어.”
그녀가 힘을 뺀 손으로 가슴을 콩콩 치자 그가 금방 놓아주었다. 루비카는 비실비실 웃고 있는 에드가를 한쪽 눈으로 흘겨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흔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자신의 어디가 그리 좋기에 그가 그토록 기뻐하는지, 가끔은 불가사의했다. 대체 어떤 힘이 그와 그녀를 만나게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작스레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루비카는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변덕스러운 마음을 숨기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것 봐. 수국이 참 예쁘지?”
“당신이 더 예뻐.”
그의 대답에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있는데 수국 같은 게 내 눈에 들어올 리 없잖아.”
그는 그녀의 표정과 상관없이 그런 당연한 진실을 왜 묻느냐는 듯 항의했다. 투정부리는 그도 우스웠지만 더 우스운 건 그런 말이 뭐라고 볼이 달아오르는 자신이었다.
“내가 꽃보다 예쁘다고 말하는 건 당신뿐일 거야.”
“그래야지.”
부끄러움을 떨쳐 내기 위해 한 말에 에드가가 맞장구를 쳤다.
“나 빼고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의 눈이 번들번들 빛났다. 진지한 눈빛과 꽉 다문 입술을 보아하니 진심인 듯싶었다. 심지어 에드가는 한술 더 떠서 누가 그녀를 탐내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정말 이 남자의 눈에 자신은 천하절색으로 보이는 건가.
“다른 사람은 안과 전문의가 필요 없으니 당신 같은 말을 하지 않을 거야.”
“안과 전문의?”
“이번 주 내로 눈 검사 한번 받아 보자. 어디 삔 데가 없는지.”
“내 눈은 아무 이상 없는데…… 당신이 원한다면 받아야지.”
심지어 눈이 삔 거 아니냐는 농담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에 루비카는 그만 화낼 기력도 잃어버렸다. 반면에 에드가는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콧노래마저 부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심지어 루비카가 들고 있던, 무척이나 가벼운 마석 램프를 무겁다는 핑계를 대며 뺏다시피 자신이 들었다.
“나쁘지 않네, 밤 산책.”
은은한 달빛 아래 루비카의 피부가 하얗게 반짝였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잔디를 밟을 때마다 서걱거리는 치마 소리, 예쁜 꽃을 볼 때마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르는 잔잔한 미소. 함께 손을 잡고 오붓이 정원을 걷는 이 시간이 마치 꿈과 같았다.
“오늘 자칼 은행에서 사람이 왔었지?”
루비카가 언제 미노스에 대해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자산을 관리하는 은행에서 사람이 왔으니 혹 어디 문제가 생겼나 싶어 당연히 신경 쓸 만하다 싶었다.
“응.”
“면담실에서 단둘이 한참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러나 그가 걱정한 건 자산의 운용 같은 게 아니었다. 루비카는 잠시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그럼 안 돼?”
“그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구속하는 남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루비카와 은행원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무척 신경 쓰였다. 그가 모르는 그녀의 고민을 은행원이 들어 줬다고 생각하면 조금 화가 나고 기분이 울적해졌다.
“커피랑 다과도 대접했다며? 은행원한테 너무 친절을 베푼 거 아냐?”
속 좁아 보일까 봐 본심을 말하지 못하고 공연한 트집을 잡았다. 그게 더 속 좁아 보인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손님이잖아.”
“손님이라도……. 당신은 너무 친절해.”
불만스레 턱을 쓰다듬는 동작에 루비카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숨기지 못하고 살짝 튀어나온 아랫입술에 그녀는 곧 그가 질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라.’
망설이며 미노스의 이야기를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다 낫다.
“그 은행원이 당신이랑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
“나랑? 고작 그런 걸 부탁하려고 당신한테 면담을 요청한 거야? 간도 크군.”
당장이라도 자칼 은행과의 거래를 취소하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기 전, 루비카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아르망을 찾을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어.”
“뭐?”
에드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램프를 쥔 손마디가 새하얗게 변했다. 루비카는 잠시 격앙된 그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에드가라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방법을 알려줄 테니 당신을 꼭 만나게 해 달라고 했어.”
에드가의 눈썹이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그의 분노가 향한 곳은 루비카가 아닌 정체도 모르는 은행원이었다.
‘순진한 사람 하나 속여 먹으려는 사기꾼이 들러붙었나 보군.’
아르망이 자신이라는 걸 아는 에드가에게 자칼 은행원의 제의는 영 미심쩍은 것이었다. 루비카가 아르망을 찾는 걸 어떻게 일개 은행원이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녀가 우연치 않게 내뱉은 말을 이용해 한몫 단단히 잡아 보려는 속셈이라면 이 세상의 빛을 두 번 다시 못 보게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당장 내일 시간을 내라고 칼에게 말하지.”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냥…… 당신이 적당히 괜찮은 날에 만나도 돼.”
그렇지 않아도 루비카는 요즘 에드가가 다른 일을 다 미뤄 두고 자신이 부탁한 일을 하고 있어 신경 쓰였다. 스텔라의 개발을 미루기 위해서 낸 꾀이긴 했으나 그의 손에 달린 산업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죄짓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좋아했던 남자를 찾는 일에 그가 다른 중요한 일을 미루고 시간을 내겠다고 말하니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차마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녀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매만졌다. 망설이는 표정에 에드가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간신히 참고 최대한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아르망을 빨리 찾으면 당신도 좋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녀의 눈이 촉촉이 젖었다. 에드가의 속마음을 모르는 그녀는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해 줄 수 있는 거지? 자신이 상처 입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누군가에게 이런 사랑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그녀는 항상 봉사하는 사람이었지 배려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마워.”
사실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그를 기만하는 것 같았다. 대신 진심을 담아 고맙다고 말했다. 적어도 그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이었다.
“그렇지 않아, 루비카. 고마워할 필요까지는 없어. 이건 당연한 거야.”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존심 같은 건 다 버리고 버림받은 사내 연기든 뭐든 다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정작 루비카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자신이 아르망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화내지 않을지 조금 걱정스러웠다.
“당연한 거라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뭐든지 하려 하는 건 당연한 거야. 거기에다 당신은 내 아내잖아.”
그것도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람.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그의 곁에 쭉 함께 있겠다고 말하는 순간, 이혼에 대한 약속은 깨졌고 그들의 결혼은 단순한 계약 이상이 되었다. 에드가는 이제 루비카를 아내로 부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루비카 또한 자신은 진짜 아내가 아니라며 한계를 긋지 않았다.
“세상엔 사랑을 핑계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많아.”
“알아. 모든 나쁜 짓을 정당화하기에 가장 좋은 말이지.”
그가 허리를 구부려 아주 짧게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 깊은 키스가 아니었으나 그 이상으로 가슴에 짜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건 눈부시게 환한 그의 미소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