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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52화 (15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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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52화

공작 앞에 쌓인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런 쓸모없는 걸 만드는데 시간을 소비해야 하냐고 공작 부인에게 따지고 싶었다. 그의 그런 표정 변화를 눈치챘는지 공학자가 망설이며 각하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말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스테판도 그만 자리를 떠나야 했지만 그는 한참 그 자리에 서서 연구소로 들어가는 천 뭉치를 노려보았다.

‘이제 정신을 차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아예 놓아 버린 거였군.’

한동안 공작은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혼자서 무슨 장난감 같은 걸 깔짝거리더니 이상한 바느질 도구를 내놓았다. 잠시 짬이 나서 만들었다고 변명을 했지만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만들었는지는 명확했다. 그래도 스테판은 그저 한때의 바람이려니 했다. 아니 한때의 바람이길 바랐다. 공작의 손에 달린 연구가 몇 개인가. 요 며칠 국왕의 사신과 편지가 몇 번이고 집무실에 들어간 걸 보아 국왕도 그만 정신 차리라고 그를 재촉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공작이 바느질 도구를 만든 건 한때의 장난도 바람도 아니었다. 세상에 아무리 사랑에 미쳐도 그렇지 진짜 장님이 될 필요도 있나.

“하, 그건…… 만들지 않은 생각인가?”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가 가시자 허탈감이 그를 감쌌다. 공작의 신뢰를 얻어 바로 옆 측근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당장 지금 가져가고 싶은 수많은 정보를 두고도 참고 기다린 건 오직 ‘스텔라’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10년이 흘러도 스텔라의 설계도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정신 차리고 이 사실을 알리자.’

스테판은 공작의 이상한 상태에 대해 알리고 대비책을 구하기 위해 전서구실로 향하기로 했다. 상상 외로 충격이 컸는지 가는 길이 꼭 천 리 같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걷다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러던 차 공작 부인과 그 무리가 그를 부르더니 사랑이네 실연이네 지껄였다. 하지만 그의 화를 가장 돋운 건 공작 부인의 ‘에드가 때문일 거야.’ 라는 말이었다.

‘설마 알고 있는 건가?’

부아가 치미는 동시에 덜컥 겁이 났다. 공작 부인은 제법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를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세상일이라는 게 모두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루비카는 스테판이 에드가를 좋아하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었다. 세상의 수많은 남자 중에 하필이면 에드가를 좋아하다니……. 만약 스테판의 마음이 들키는 날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제 남편이었지만 질투보다 스테판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더 좋은 기회가 올 거예요.”

“부인…….”

한참 스테판을 위로하던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그가 무척이나 음침하고 음울한 눈빛으로 그녀를 불렀는데 갈색 눈동자의 중앙에는 이와 반대로 푸른 불꽃이 무섭게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있는 연적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계신 겁니까?”

잠시 고민하던 루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디에도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을 그가 제법 안됐다고 생각했다.

“힘내요.”

스테판은 눈앞에 있는 루비카의 손을 차갑게 내쳤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휭하니 그 자리를 떠났다.

“경, 이게 무슨 불경인가!”

“앤, 괜찮아.”

루비카가 스테판의 태도에 화가 나서 그를 쫓아가려는 앤을 말렸다. 에드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그의 호위를 보고 있을 스테판의 마음은 대체 어떨까.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차 모임에 참석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에게는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안 그래도 스테판이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은 그녀인데 얼마나 밉고 원망스러울까.

‘좀 더 스테판에게 신경 써야겠어.’

에드가의 호위를 그가 계속 맡는 건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 에드가와 좀 떨어지면 스테판의 불안정한 상태가 나아질지 모른다. 스테판이 첩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루비카는 그의 마음을 단단히 착각했다. 그 배려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마님, 해가 벌써 지려 하네요.”

엘리제의 말대로 어느덧 해는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스테판과의 만남 때문일까. 어느덧 싱숭생숭했던 마음은 제자리를 찾았다. 세상에는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자신은 너무 배부른 고민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들어가자꾸나.”

“네.”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 루비카는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처음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왔을 때 보았던 모습과 달리 정원은 색색의 장미꽃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장미꽃을 개발하는 데 투자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 하지만 에드가만이 그녀를 믿고 기꺼이 그러라고 했다. 마영석 일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이야기를 이상주의자의 실없는 소리로 치부했으나 에드가만은 그러지 않았다. 루비카가 그에게서 받은 것 중에서 가장 고마운 것은 사랑보다 믿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앤, 에드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믿어 주겠지?”

충동적으로 옆에 있던 앤에게 질문했다. 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농담을 덧붙였다.

“그럼요. 각하라면 마님이 콩으로 버터를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믿을걸요? 다른 사람이 믿지 않으면 직접 본인이 만드는 방법을 찾으실 거예요.”

하지만 루비카의 귀에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 에드가는 루비카가 말한 기계를 만들어 낼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사람 대신 바느질을 하는 기계라니…… 내가 요구하고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어.’

에드가는 맡겨 놓으라는 듯 반응했고 실제로 리본과 관련된 기계는 벌써 설계를 끝마쳤다. 앞으로 스텔라의 개발을 막으려면 또 어떤 기계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할지, 막막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이루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듯 굴었다. 대체 그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나도 좀 더 그를 믿어야 하지 않을까?’

첫 만남이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일까. 솔직히 말해 루비카는 에드가를 그다지 믿지 않았다. 미노스와의 일도 말하길 망설이는 이유는 단지 그가 받을 상처가 걱정되어서만은 아니다. 그녀는 그가 여전히 아르망을 찾고 있는 자신에게 실망할까 두려웠다. 그가 자신의 과거를 믿어 주길 바라면서도 당연히 믿지 않을 거라고 전제했다. 그래서 가끔 답답하고 모든 걸 토로하고 싶을 때도 꾹 참았다. 그가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거나 뜬구름 잡는 소리로 취급한다면 어찌 견뎌 낼 수 있을까 싶었다.

아무리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 말해도 그녀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허망할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게 그토록 망설여졌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두렵다고 언제까지나 진실을 말하는 것을 미룰 수는 없었다. 한 걸음씩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가야만 했다. 미뤄 둔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세상에 없는 법이다.

‘일단 미노스 건부터 솔직히 말하자.’

물론 지금 당장 드래곤이니 고블린이니 하는 소리를 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세사르 경과 짜고 무슨 내기를 한 거냐는 소리나 들을 확률이 높았다. 다만 미노스를 만나고 실제로 미노스가 고블린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그리되면 그가 반지 이야기를 믿어 줄 확률이 높다. 무엇보다 미노스가 그녀의 이야기에 탄탄한 뒷받침이 돼 줄 것이다.

‘스텔라를 발명하는 걸 확실히 막을 방법이기도 해.’

드래곤을 만난 건 무척 당황스럽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잘됐다. 미래에서 과거로 온 이야기를 하면 에드가도 왜 자신이 아르망을 그토록 찾고 싶어 하는지 이해해 줄 것이다.

“루비카!”

현관으로 들어서니 저택 중심의 넓은 계단에서 에드가가 소매 단추를 잠그며 내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급했던지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다급해 보였던 그는 그녀를 발견하자 무척 놀라며 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니?”

그녀의 말에 그는 잠시 인상을 썼다. 평소 루비카는 이 시간이면 항상 규방에 있었다. 해가 지자마자 그는 그녀를 볼 마음에 뛰기 시작한 가슴을 누르며 규방에 갔었건만 그곳은 휑하니 비워져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밖으로 뛰쳐나가던 중이었다.

“산책…… 나간 건가?”

뒤늦게 루비카 뒤의 시녀가 들고 있는 양산과 그녀의 손에 낀 장갑이 보였다. 안도한 그는 하녀에게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뛰쳐나간 자신이 좀 한심해서 화가 났다.

“응, 바람을 좀 쐬러 나갔어.”

“각하께 말을 전할 하녀를 규방에 남겨 두고 나갈 걸 그랬네요.”

앤이 덧붙이는 말에 루비카는 에드가가 왜 그리 급해 보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민망해서 볼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헛기침을 한차례하고 에드가의 손을 잡았다. 먼저 손을 잡는 그녀의 동작에 그가 잠깐 움찔했으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지 가만히 있었다.

“바깥에 장미가 무척 예쁘게 폈어.”

“알아. 창문으로 매일 보고 있으니까.”

“향기도 무척 좋아.”

그녀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에드가는 볼이 긴장으로 굳었다. 요즘 루비카는 집무실에 너무 오래 앉아만 있으면 좋지 않다는 말을 종종 흘렸다. 열심히 숨기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낮 동안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데 슬슬 불만이 싹틀 타이밍이란 생각이 들었다.

“같이 산책할래?”

“산책? 이미 해가 졌잖아.”

“하지만…… 그럼 내일 낮에 같이 산책갈래?”

“낮은 시간이 안나.”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나가자. 너무 집무실에만 있는 건 안 좋아. 아무리 바빠도 맑은 공기도 마시고, 태양도 보고 그래야 해.”

하지만 루비카가 쏟아낸 것은 불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걱정이었다. 에드가는 잠시 그녀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비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 그럼 지금 나가지.”

생각하기 전에 대답이 나갔다. 그의 대답에 기뻐하는 그녀의 미소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낮이 아닌 밤이면 또 어떤가. 환한 마석 램프를 든 시종 덕에 지나가는 길이 낮처럼 밝았다.

“이것 봐, 에드가. 장미도 예쁘지만 여기 델피늄도 예쁘게 폈어. 정원사의 솜씨가 정말 좋은 것 같아.”

에드가도 그 꽃을 자주 보았지만 구태여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꽃의 이름도 몰랐지만 에드가는 그 자리에서 정원사의 월급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예쁘군.”

“향기도 좋아. 한번 맡아 봐.”

먼저 숨을 깊게 들이쉬는 그녀를 따라 숨을 들이켜자 짙은 꽃향기가 느껴졌다. 밤의 정취를 담뿍 담은 꽃향기는 퍽 싱그럽고 아련한 느낌이 났다. 답답한 실내에서 카펫 냄새와 함께 맡는 화병의 꽃향기와 전혀 달랐다.

“정말 좋긴 하군.”

“후후후.”

어색해하면서도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는 에드가의 모습에 루비카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드가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웃었다. 그녀의 맑은 웃음을 보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도 이렇게 쉽게 웃을 수 있는 사내라는 걸 그는 루비카를 통해 알았다.

“에드가, 내가 정원 안내를 해도 될까? 이제 당신보다 내가 정원을 더 잘 아는 것 같은데.”

시종에게 마석 램프를 건네받고 루비카가 조금 짓궂게 웃었다. 단둘이 산책하자는 뉘앙스에 에드가의 가슴 한쪽이 불타올랐다. 에드가는 곧바로 호위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명했다. 루비카는 불만으로 타오르는 스테판에게서 슬쩍 시선을 돌려 모른 척했다. 차라리 그를 떨어뜨려 놓는 게 스테판의 정신건강에도 좋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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