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48화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엘리제를 변하게 한 사람을 만나도 소용없어.”
불가사의한 주문이었다. 가브리엘은 루비카에게 왜 그런 일을 꼭해야 하냐고 이유를 따져 물었다. 루비카는 지금은 알려 줄 수 없다며 정확히 일주일 뒤 알려 주겠다고 답했다.
“휴.”
성격 같아서는 알려 주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정말이지 예뻐지고 싶었다. 어머니가 언니들의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고 한숨 쉬면 가브리엘은 “그러게 저도 원해서 못생기게 태어난 게 아니랍니다.” 하며 웃음으로 받아치고 원하는 걸 얻어냈으나 침대에서 밤새 훌쩍이며 울었다. 평생 이런 비참한 기분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럴게요. 대신 정말 일주일 뒤 그 사람을 꼭 만나게 해 주는 거예요?”
대답 대신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 무척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가브리엘에게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솔라나 양의 변화는 기적과 같았다. 신이 자신에게도 기적을 내려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가브리엘이 떠나고 드디어 공작가의 장부를 본 루비카는 놀라움과 우울함, 체념이 뒤섞인 알쏭달쏭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니, 이게 뭐야. 잔액이 줄지 않고 오히려 두 배가 되었네?”
“모두 마님의 덕이지요.”
존경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외치는 칼의 멱살을 잡고 ‘이게 내 덕이냐. 네가 지나치게 일을 유능하게 처리한 덕분이지!’라고 외치고 싶었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장미 화분을 좀 판 걸로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걸까.
“앤에게 들었습니다. 내일 당장 왕비 전하께 장미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 정도 예산을 장미잼이나 사탕을 만드는 데 쓸 예정입니다.”
칼이 투자액을 적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식료품이다 보니 엄청나게 남다 못해 늘어난 예산의 1/10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여전히 많이 남은 돈에 루비카는 한숨을 쉬었다.
“이 많은 돈을 어떻게 하지?”
“마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루비카는 한번 마음대로 해 보자는 심정으로 보석상과 향수 장인들의 이름을 댔다. 슬쩍 저번의 에드가 만만치 않게 돈을 쓸 거라는 암시를 줬다. 하지만 집사는 사색이 되기는커녕 온유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스케줄에 상인들과 만날 시간을 넣겠다고 대답했다. 아, 세사르 경에게 투자를 한다고 할 땐 몰래 에드가에게 일러바쳤던 사람은 정녕 어디로 갔다 말인가.
“됐어. 보석은 이제 너무 많아.”
그리 말하고 그녀는 차에 우유와 설탕을 탔다. 칼의 입술 근처 근육이 실룩거렸다.
“마님, 우유와 설탕은 차의 고유한 향을 해친다고 생각합니다.”
루비카는 보란 듯이 잔을 들어 후룩후룩 마셨다. 이건 칼이 일을 지나치게 잘한 벌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기라도 하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인부들의 임금처리가 밀렸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잠깐 통쾌한 기분을 느꼈으나 곧 허망해졌다. 이래서는 에드가의 콩깍지를 벗기기는커녕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 종신형에 처할 위기였다. 만약 약속대로 이혼을 한다고 하면 칼과 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쩌면 그녀를 대륙 끝까지 찾아내 쫓아올지도 모른다. 그 광경을 상상하며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눌러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리고 에드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언제 올라갔냐는 듯 입꼬리 쭉 내려갔다. 어제도 에드가는 장미꽃 향기를 맡고 있는 그녀를 등 뒤에서 껴안더니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놀란 루비카가 뒤꿈치로 그의 발을 밟는 바람에 이상한 분위기는 거기에서 끝이었지만…… 과연 이대로 그와 순순히 이혼할 수 있을까?
“어라?”
루비카는 깜짝 놀라 치맛자락을 내려다봤다. 동그란 얼룩이 생겼다. 거기에 얼룩이 추가로 몇 개 더 생기기 시작했다. 뺨에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코를 킁 하고 풀었다.
“눈물이라니.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가슴에 무거운 돌이 얹어진 듯 답답하고 울적했다. 에드가의 얼굴을 떠올리려하자 다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를 떠올리면 흐뭇하거나 뿌듯한 게 보통이었다. 대제 자신이 왜 이러는 걸까? 루비카는 테이블에 있던 자수 바구니를 뒤져 몰래 만들고 있던 리본을 꺼냈다.
“우울할 땐 바느질이지.”
작은 새의 소식지를 꼼꼼히 읽어 본 결과 아무래도 크리스토퍼가 로열블루 천을 독점하고 눈치였다. 또 가브리엘에게 ‘클레이모어 가문은 대단하지만 결국 카나는 시골에서 옷을 만드는 견문이 부족한 신인 디자이너’라는 말을 한 걸 보아 은근슬쩍 카나를 깎아내리고 다니는 듯싶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자에게 질 수 없어.’
차 모임의 리본 드레스는 각광받았다. 하지만 매번 똑같은 걸 만들어서는 지금 같은 인기를 유지할 수 없다. 루비카는 지금과는 다른 좀 더 복잡하고 예쁜 리본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바느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광택이 좋은 대신에 매끄러운 천 때문에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어렵사리 바느질을 다하고 리본 모양을 잡았다. 빛에 따라 오묘한 광택을 내는 천은 리본을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이게 했지만 역시 바느질한 부분이 운 게 신경 쓰였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비카는 황급히 바구니를 테이블 아래에 치우고 별일 없는 척하면서 에드가를 맞이했다. 그를 따라 들어온 시종이 두꺼운 종이를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았다.
“저건 뭐야?”
“당신이 전에 부탁한 거.”
바로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현재 어떤 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걸 발명할지 그 현황과 계획을 정리한 리스트였다. 루비카는 당장 종이를 펼쳐 보았다. 어려운 기호와 숫자가 잔뜩 적혀 있었다. 에드가는 그것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다 살펴보려면 밤을 새워야 할 텐데”
“괜찮아.”
루비카는 참을성 있게 종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반 정도 넘겼을까 그녀의 손이 딱 멈추었다. ‘스텔라’라는 단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에드가는 그녀의 손이 멈춘 지점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저게 문제였군.’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다시 새파래졌다 빨개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질문했다.
“이 항목은 왜 이름만 적혀 있고 비워져 있어?”
“기밀이니까.”
기밀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거기까지 알려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비카는 한참 종이를 노려봤다.
“얼마나 진척이 된 거야?”
“아직 설계 중이야.”
“이거 꼭 개발해야 하는 거야?”
현재는 스파이를 색출해 내기 위해 미뤄 두고 있지만 언젠가는 개발하리라 마음먹은 무기였다.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와 약속했어. 미래를 위해서도 꼭 만들어야 해.”
루비카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국왕 전하와의 약속이라니 아무래도 그녀 선에서 취소하기는 힘들 듯싶었다.
‘스텔라 때문에 전쟁이 날 테니 만들면 안 된다는 소리를 국왕 전하가 믿어 줄까?’
자신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스텔라의 개발을 막고 싶다. 그러면 이 남자를 살릴 수 있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결심을 마친 루비카는 물끄러미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 있던 그가 제법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가, 나 좋아하지?”
“당연한 걸 왜 물어?”
“그럼 날 위해 발명을 좀 해 줄 수 있어?”
그녀는 소파 아래에 뒀던 바구니를 꺼내더니 방금까지 만들고 있었던 리본은 에드가에게 보여줬다.
“이런 천으로 리본을 만들고 싶은데 바느질을 하면 자꾸 울어. 끝단을 자른 다음에 촛불의 열로 마감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또 일정하게 만들기 어려워. 금방 울퉁불퉁해지거든. 이 끝단을 예쁘게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에드가가 루비카가 내민 리본을 한번 살펴보았다. 열처리를 하는 방법이라면 철판 자르는 기술을 응용해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적당한 온도를 찾아내야만 했다.
“어렵지 않겠군.”
“어렵지 않다고? 금방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야?”
“이런 데 쓰이는 건 아니지만 원리가 비슷한 기계가 있어.”
루비카는 잠깐 팔짱을 꼈다. 쉬우면 곤란하다. 최대한 스텔라 만드는 시간을 방해해서 무슨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녀는 곧 방금까지 하고 있었던 바느질에 시선을 돌렸다.
“카나의 의상실에 주문이 너무 밀려서 재봉사들이 밤낮없이 일하고 있대. 당신이라면 사람 대신 바느질을 해 줄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녀의 마음을 사려 실 끼우는 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해도 너무 단순한 기계였고 루비카의 반응은 미미했다. 아예 바느질을 대신하는 기계를 만드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불가능하진 않지.”
“그럼 다른 일을 제쳐 두고 그것부터 만들어 줘.”
그는 기꺼이 하겠다는 대답을 간신히 자제했다. 물론 루비카가 원하면 당연히 만들어야 하겠지만 맡아 놓은 짐 찾아가는 것처럼 구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 그게 그녀가 아르망에게 반한 계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퍽 좋지 않았다.
“내가 왜 이걸 만들어야 하지?”
“음, 카나는 클레이모어의 디자이너고 그녀가 잘되면 영지에도 좋으니까.”
“그것보다 급한 영지 일도 많아. 그리고 저 리스트에 있는 것들. 제때 만들어서 팔아야 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에드가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아무리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도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착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이미 그녀 때문에 몇 번이고 일을 미뤘다는 사실을 모르는 루비카는 결국 만약의 만약으로 미룬 카드를 꺼냈다.
“만들어 주면 앞으로 키스해도 괜찮아.”
“뭐?”
잠시 에드가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키스라는 건.”
“입술까지.”
에드가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코앞까지 왔다. 루비카가 앉아있던 의자의 손잡이를 그가 꽉 쥐었다.
“정말이야?”
평소보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에 그녀는 등 뒤에 소름이 돋았고 몸에 열이 났다. 눈을 마주치기 위해 몸을 숙인 그의 자세가 맹수처럼 꼭 자신을 먹어 치울 것만 같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제 피할 수 없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뭐든 다 할 것이다.
“응.”
대답을 마치자마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허락한 건 발명을 한 이후가 아니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뜨거웠다. 입술부터 시작된 열기는 그녀의 온몸을 녹여 없애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리웠다. 안 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때때로 그의 입술을 훔쳐보았고 그와 한 키스를 떠올렸다. 자신을 향해 아이처럼 웃는 그의 이마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꼈다.
“에드가.”
그녀가 반쯤 헐떡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닿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술이 닿았다. 아무리 입술을 겹쳐도 가슴 속의 타는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