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35화
“그래. 이건 발상 싸움이어서 정보가 부족해서 조금 헤맸을 뿐, 이제 다 끝났다.”
그리고 에드가는 황급히 테이블 위 물건을 서랍으로 치웠다. 그 다급한 동작에 칼은 숨을 참았다.
‘설마 각하께서 연구 중인 걸 두고 딴짓을?’
그럴 리가 없다. 에드가는 태어난 순간부터 성실했다. 가끔 집중이 지나쳐 끼니를 잊을 때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딴짓이라니 그건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분명 남에게 맡길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부품 중 하나를 직접 만들어 보신 걸 거야.’
칼은 목격한 장면을 최대한 좋은 쪽으로 해석했다. 중요한 부품을 철이 아닌 나무로 제작하고 하는 게 이상하다는 사실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각하,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칼이 나가고 에드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꽤 쓸 만한 생각이 나서 집중하느라 흔적을 숨기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그는 서랍에서 바늘과 실을 꺼냈다. 그리고 막 발명한 물건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완벽하게 작동되는군.”
이게 루비카를 감동시킨 물건일까?
‘아니면 힌트를 찾아 또 다른 걸 만들면 되지.’
어차피 자신이 만든 발명품이다. 그가 못 만들 이유가 없다. 늦든 빠르든 그는 루비카의 마음을 얻으리라 확신했다.
* * *
그날 오후 내내 루비카는 안젤라에게 답장을 썼다. 그간 있었던 일을 꼼꼼히 적다 보니 편지는 어느새 열 장이 넘어갔지만 팔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즐거웠다.
그리고 저녁 무렵부터는 테이블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로사를 비롯한 침모들은 그녀의 옆에서 정교한 레이스를 떴다.
“원형 레이스를 떠서 컵받침 대신에 쓰는 건 어떨까요?”
“좋아, 이왕이면 장미 무늬로 하자.”
“냅킨 가장자리에도 자수를 살짝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에드가는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시종을 말리고 문가에 서서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루비카는 바지런히 수를 놓으며 때때로 고개를 들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조용히 웃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그녀가 영원히 이 공간에서 평안과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멍멍.”
라떼가 그를 발견하는 순간, 감상은 끝났다. 에드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개가 얄미웠다. 하지만 루비카가 그를 보고 미소 짓자 꽤 귀엽게 느껴졌다. 개가 짖은 덕에 루비카가 그를 발견했으니 상으로 라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
하녀들이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공작이 라떼를 쓰다듬어 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혼한 뒤 개과천선한 남자 이야기는 전설의 하나로 여겼건만 공작을 보니 꼭 불가능한 소리만은 아니었다.
“뭘 그렇게 공을 들여. 이런 것까지 당신이 할 필요 없잖아.”
에드가는 괜히 볼멘소리를 했다. 초대받은 귀족들이 그녀가 수놓은 냅킨으로 아무렇지 않게 손이나 입을 닦을 거라고 생각하니 샘이 났다.
“이왕 하는 거 정성을 들이는 게 좋지.”
이렇게 모여서 일을 핑계로 수다 떠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루비카는 여전히 시선을 바늘에만 두고 입을 삐죽였다. 얄밉게 말하는 에드가를 보니 좋아한다고 고백한 게 꿈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정성은 나한테만 들여.”
옅은 그의 미소가 의미심장했다. 불시에 들어온 공격에 깜짝 놀란 루비카는 그만 바늘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실을 건드리고 말았다.
“아, 이런 실이 빠졌네.”
“엘리제, 마님 곁에 촛불을 가져다 드리렴.”
얇은 바늘귀에 실을 끼우는 건 제법 힘든 일이다. 특히 해가 진 뒤는 더 어렵다. 인상을 쓰며 그녀는 바늘을 잡았을 때였다.
“그거 이리 줘.”
잠시 그가 뭘 말하는지 몰라 루비카는 어리둥절했다. 답답한지 그가 바늘을 잡고 있는 손을 가리켜 재촉했다.
“얼른.”
바늘과 실처럼 에드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게 또 있을까?
루비카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그가 가리킨 물건을 건넸다. 에드가는 씩 웃더니 오른쪽 주머니에서 사람 손바닥만 한 기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위쪽의 파인 홈에 실을 올리고, 그 옆의 구멍에 바늘을 넣었다.
“자.”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에드가는 버튼을 눌렀다. 뽕, 스프링 튕기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바늘을 꺼냈다.
“어머나.”
“바늘에 실이 끼워졌어.”
“어떻게 된 일이지?”
모두의 감탄에 에드가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간 골머리를 앓은 보람이 있다.
처음에는 막막했다. 수를 놓아 본 적이 있어야 뭐가 귀찮고 짜증 나는지 알지. 몇 가지 실험 끝에 그는 별 것 아닌 듯하지만 의외로 어려운 게 바로 바늘에 실 끼우기란 결론을 내렸다.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실이 끼워지지.”
에드가가 다시 한번 시범을 보였다. 특히 나이가 들어 시력이 나빠진 침모들이 기뻐했다.
“신기해라.”
“어머, 이게 있으면 돋보기랑 씨름할 필요가 없겠네요.”
“각하, 저희가 한번 해 봐도 되나요?”
에드가가 실 끼우기를 넘기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가며 바늘에 실을 끼웠다. 아주 간단한 발명임에도 그들은 새로운 문물이라도 접한 듯 감탄했다.
“어디서 구한 거야? 사르망 수입품이야?”
루비카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에드가는 그녀의 반응에 조금 실망했다. 아무리 봐도 사랑에 빠진 눈치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실패로군.’
그녀가 아르망에게 반한 계기는 다른 발명품인 것 같았다. 에드가는 스텔라 개발을 좀 더 늦추기로 했다. 루비카를 반하게 만든 발명품을 몇 달 안에 반드시 만들어 낼 계획이다.
“산 게 아니야. 내가 만든 거야.”
“만들었다고?”
“각하께서 만드셨다고요?”
경악 어린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찬사에 익숙한 에드가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짬이 나 재미 삼아 만들어 봤네.”
에드가는 턱 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다들 아쉬운 표정으로 나갔다. 특히 나이 많은 침모 몇몇은 탁자에 있는 실 끼우는 기계에서 한참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래?”
사람들을 다 내쫓은 이유에 대해 루비카가 묻자 에드가는 궁색해졌다. 당신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서 한 일인데 다들 경악하는 게 짜증스러워서 그랬다는 소리는 할 수 없다.
“안젤라에게서 편지가 왔다며?”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제국 최고의 재목에게 변명거리 찾기 정도야 식은 스프 먹기이다.
“아, 알고 있었구나.”
“당신 일인데 당연하지.”
루비카는 그의 다정한 눈빛에 문득 며칠 전의 고백이 생각났다. 평범한 일상이 이어져 그날 일은 꿈이었는가 싶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때 떠오른 걸까? 자신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의 대답이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루비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는데 그가 불시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숨이 코앞에서 느껴지자 그녀의 볼이 발그레 변했다.
“당신 사촌 동생이 입학시험을 잘 치렀다는 건 나도 소식을 들었어. 그 이외에 불편한 건 없대? 필요한 물건이나 도움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못 도와줄 일 같은 건 없으니.”
전에는 그의 이런 다정한 배려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위신을 챙기기 위해 체면치레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 고백하자 그 의미는 전혀 달라졌다. 루비카는 제 맘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으, 음. 괜찮아. 안젤라는 잘 지내는 것 같아. 걱정할 필요 없어.”
“정말?”
“응?”
“정말 괜찮아? 정말 별일 없어? 내가 도울 일 같은 건?”
추궁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에드가는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젠장.
그녀에게 편지를 몰래 먼저 읽었다는 사실은 절대 들켜선 안 된다.
“걱정돼서 그래. 힘든 일이 있어도 꾹 눌러 담지 마.”
“안 그래.”
힘든 일을 눌러 담기는 무슨, 그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으면 바로 바로 반격했는데…….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린 과거나, 네가 격의 없이 말하면 나도 그러겠다고 대꾸했던 지난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루비카는 더없이 볼이 붉어졌다. 그렇게 당하고도 나를 좋아한다고? 정말 이상하다. 에드가는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답답한 건 에드가였다.
힘든 일이 있어도 안 눌러 담길 뭘 안 눌러 담아! 지금 반지 이야기는커녕 아이작 이야기도 제대로 못 꺼내고 있잖아.
에드가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못하는 건 따지고 보면 믿음을 주지 못한 그의 잘못이다.
“아, 참.”
뭔가 생각 난 듯 루비카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에드가의 가슴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뭔가 떠올랐어? 무슨 일이야. 말만 해.”
그는 당장 키스하고 싶은 도톰한 입술을 바라봤다. 저 귀여운 입이 요구하는 일이라면 제 목숨을 내줘야 할 일이라도 그는 들어줄 것이다.
“그, 음. 당신 개인 재산 말이야. 어느 은행에 넣어 두고 있어?”
“내 개인 재산? 당연히 세리토스 은행이지.”
루비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앞으로 할 말을 제발 에드가가 오해 없이 들어주…….
‘아니, 내가 오해를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어!’
제발 오해했으면 좋겠다. 이상한 요구나 하고 제멋대로 구는 여자라고 막 정이 떨어졌음 좋겠다.
“자칼 은행으로 옮기면 안 돼?”
“자칼 은행?”
에드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 은행은 딱히 자금원이 탄탄한 것도 아니고, 이자율이 센 편도 아닌데……?”
그의 말이 맞다. 자칼 은행은 세리토스 은행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자칼 은행처럼 안전한 곳도 없다. 고블린은 고지식해 고객의 돈을 떼어먹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말할 수도 없고.’
루비카는 대신 고개를 뻣뻣이 쳐들었다.
“싫어?”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이 길어진다는 건 싫다는 이야기인데.”
에드가가 한숨을 쉬었다.
루비카는 그가 만나게 될 미래를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바꾸고 싶었다. 거기에 그의 눈에 씐 콩깍지가 떨어지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제멋대로에 말이 안 통하는 여자라고 그가 질렸으면 좋겠다.
“아니, 옮기지.”
“그래.”
그의 대답에 그녀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환히 웃었다. 에드가는 순간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아 올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그를 향해 그리 웃어 줄 수만 있다면 제 개인 재산이 아니라 클레이모어 공작가 재산 모두를 몽땅 자칼 은행에 처박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부탁할 게 없어?”
“부탁이라니……?”
에드가가 그녀를 재촉했다. 루비카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에드가는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다 이야기해.”
네 말썽꾸러기 사촌 때문에 걱정이라는 말만 한마디 해 줘. 그럼 내가 다 처리할게. 그 녀석은 지옥에서도 당신 속눈썹 하나 못 건드릴 거야.
“그럼…….”
루비카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했다. 에드가는 그녀가 아이작 이야기를 하는 걸 망설이는 줄 알았다. 아무래도 좀 수치스러운 이야기이다. 그는 참을성 있게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한참 뒤 그녀가 손뼉을 치며 꺼낸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난 보석이 사고 싶어.”
“보석?”
“응, 엄청 크고 비싼 걸로.”
에드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루비카를 바라봤다. 천진한 척 웃고 있지만 멋쩍음이 느껴졌다.
“그 이외에는 더 없어?”
“더?”
이번에 루비카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고갯짓에 따라 아름답게 흔들렸다. 하지만 지금 에드가의 눈에 그 아름다운 광경이 들어오지 않았다.
“없다고?”
“응, 없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에드가는 간신히 그렇게 대꾸하고 싶은 걸 참았다. 아이작의 일을 알고 있단 티를 내면 안젤라의 편지를 몰래 훔쳐봤다는 사실을 들킨다.
“잘 생각해 봐. 그것 이외에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없는지.”
“없는데?”
“두 번 생각해 봐.”
“……없는데?”
“세 번 더 생각해 봐.”
당황한 루비카는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