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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19화 (119/212)

# 11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19화

“그럼 에드가에게 전해 시간을 잡아야지 왜 내게?”

“마님께 사죄하고 싶답니다.”

칼의 말에 루비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질레한 경에 대한 함구령이 떨어진 관계로 칼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었다.

“귀찮은데…….”

“쫓아낼까요?”

어제의 소란을 생각하니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질레한 경이 그 난리를 칠 수 있었던 건 그를 따르는 자들 때문이었다. 그래 놓고선 그가 쫓겨나자마자 딱 선을 긋고 사과를 핑계로 알랑방귀를 뀌러 왔다.

‘오늘 쫓아내면 사과를 받아 달라며 내일 또 찾아오겠지.’

어설프게 사과를 받아 주면 친분을 쌓자는 의미로 해석해 계속 찾아올 수 있다. 그건 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공작저에 오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그때 루비카는 어제 소동의 원인 중 하나였던 ‘차’를 떠올렸다.

“칼, 그분들이 오면 응접실로 모시고 커피 대신 차를 내줘.”

“네? 마님, 차는 무척 귀한 음식입니다.”

차 예찬론자인 칼의 눈에는 ‘아까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와 반대로 생각했다.

‘나랑 만나려면 그런 고문 같은 음료를 먹어야 한다고 판단하면 두 번 다시 안 올 거야.’

하지만 그대로 칼에게 말하면 그는 펄쩍 뛸 것이다. 루비카는 칼의 ‘차 사랑’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칼, 어제 내가 커피가 아니라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선언한 걸 잊지 마. 혹시 앞으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내게 가져오는 차라고 설명하면 사람들이 물러날 것 같은데. 그러기 위해선 내가 차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해.”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칼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에드가를 위한 일이라고 하면 쉽게 납득하는 집사였다.

“그리고 음, 언젠가 그대가 내게 ‘차 모임’에 대해 설명한 적 있지? 이게 바로 그 ‘차 모임’에 속하지 않을까?”

“차 모임이요?”

칼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루비카는 차 모임에 관해 설명할 때 칼의 눈이 반짝거렸던 걸 기억한다. 그녀는 최대한 밝게 웃었다.

“그래. 이 기회에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좋은 일 아닐까?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 차를 수입하는 무역상도 많아질 거야. 그럼 에드가를 위한 좋은 차를 좀 더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친척 대부분이 그녀처럼 차를 마시는 것에 고통을 느낄 것이다.

“마님은 정말…… 생각이 깊으십니다.”

하지만 차 예찬론자인 칼은 완벽히 넘어왔다.

* * *

루비카에게 완전히 속은 칼은 진심을 담아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그런 진심은 보통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기 좋은 것이었다.

“부인, 그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

칼이 커피를 마시듯 한입에 차를 털어 넣으려는 친척에게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먼저 향을 즐기고 난 다음에 천천히, 음미하듯!”

루비카는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열변을 토하는 칼의 모습에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칼에게 속마음을 말하지 않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 그럼 그는 이 정도의 열의를 보이지 않았겠지.

“차는 그냥 입이나 축이는 음료가 아닙니다. 삼라만상이 담긴 음료로 대지의 기운과…….”

칼의 끝없는 설명을 들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신 이들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럴 만했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차는 그냥 풀 냄새가 나는 희한한 음료에 불과했다. 루비카는 웃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과연 좋은 향기군요. 각하와 부인께서 좋아하실 만합니다.”

“덕분에 이런 우아한 취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잘도 거짓말을 했다. 그들의 말에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 칼이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앞으로 공작저를 방문하는 손님들에게는 차를 내려 하네.”

“아…….”

참지 못하고 탄식하는 이도 있었다. 루비카는 친척들이 앞으로 그녀를 찾아오지 않을 거란 강한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이 존재하고 열 명 중 한 명은 모두가 싫어하는 걸 좋아하기 마련이었다.

“향기가 정말 좋아요, 마님. 꼭 싱그러운 나무가 잔뜩 있는 숲속에 온 느낌이에요.”

옆자리에 앉은 엘리제의 말에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차를 마시는 표정이 온화하기 짝이 없다. 엘리제는 진심이었다.

“실내에 있는데도 정원에 산책하러 나간 것 같네요.”

“그렇지요? 특히 추운 겨울날 따뜻한 차 한 잔이 주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칼이 즐거워하며 엘리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즐거운 기운에 친척 하나가 찬물을 끼얹었다.

“저, 그런데 마영석 건 말입니다.”

하지만 루비카가 직접 나서서 그 말을 제어할 필요도 없었다. 칼은 말을 꺼낸 이의 잔에 차를 따라 주며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차를 마실 때는 좋은 이야기만 하셔야 합니다. 나쁜 이야기나 이권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툼을 불러일으키고 차 맛을 버립니다.”

루비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차’에 이런 이점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적어도 이 음료가 있는 한 상대에게 나쁜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좋은 사람들을 초대해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신다.’ 정말 좋은 문화네요.”

엘리제는 칼의 말에 진심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녀는 근래 보기 드문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칼은 차향을 음미하는 엘리제의 모습을 흐뭇하니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시녀님. 사막을 건너 있는 동제국에서는 이 차를 매일 아침저녁 마십니다. 주변 사람을 초청해 차 모임을 할 때는 마음을 경건히 하기 위해서 의복도 신경을 씁니다. 물욕을 멀리하되 남루하지는 않아야 하며 주변과의 조화를 신경 쓴…….”

칼의 설명을 듣던 중 루비카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는 친척들을 쭉 둘러보았다. 필사적으로 웃고 있는 게 이들에게 이 시간은 필시 고문과 같으리라.

‘하지만 칼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

이유는 간단하다. 모르니까. 그들은 괜히 아는 체를 했다가 망신당하기 싫어 칼의 말에 따랐다. 심지어 그가 안 좋은 이야기를 해선 안 된다고 말하자 입을 닫았다.

‘그 드레스!’

로열 블루 천과 은색 매듭을 이용해 장식한 드레스가 떠올랐다. 보석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으나 신록에 어울리는 드레스는 칼의 설명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카나는 지나치게 혁신적이어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리라 말했지만, 원래 차 모임에서 입는 드레스라고 소개한다면?’

드래곤이 다스린다고 알려진 동제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 나라에서 나는 물건들은 질이 우수하고 좋긴 했으나 샤르망 왕국의 사치품으로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드래곤이 인간을 다스리는 나라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세리토스 왕국 사람은 없다.

‘다들 믿을 거야.’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루비카는 제 눈앞에 놓인 잔에 담긴 투명한 노란 액체를 보았다. 풀 냄새가 나고 맛도 그녀의 취향과는 수십 미터 이상 차이가 낫지만 이 음료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

‘차 모임을 열자! 패션에 관심이 많고 파격적인 드레스도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귀부인을 모시고.’

대신 지금처럼 차만 달랑 대접해 고문시키듯 열지 말고, 최대한 풀 냄새가 연하게 나는 음료를 만들고, 예쁜 꽃으로 장식하고 음악도 연주하고, 테이블에는 차 대신 마실 수 있는 주스와 다양한 과일, 디저트를 준비하고…….

‘오늘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초대하지 말고, 지금처럼 고문 같은 시간이 아니라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게 준비 하자.’

그렇게 루비카는 차 모임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모임이 앞으로 세리토스 왕국을 뒤흔들게 될 줄은 모르고. 그녀의 동기와 목적은 좋은 차를 알리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이대로 묻히기에는 아까운 파격적이나 예쁜 드레스를 소개하는 것, 그뿐이었다.

* * *

황혼이 질 때쯤 루비카는 친척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떠날 때가 되어서야 루비카에게 사죄의 말 몇 마디를 전할 수 있었다. 개중에 몇 명은 그녀가 일부러 차를 대접했음을 알았다.

‘보통내기가 아니야. 아예 청을 넣을 기회를 원천 차단했어.’

소득이 하나도 없었다. 공작 부인은 공작만큼이나 빈틈이 없었다. 당초 루비카의 목적대로 그들은 괜한 기대를 가지고 공작저에 들락거리는 걸 포기했다.

“앤, 내일 카나를 불러 줄 수 있어?”

루비카는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고 옆에 있던 앤에게 말했다.

“마담 카나요?”

“응.”

앤은 얼마 전에도 부르지 않았냐는 말을 재빨리 삼켰다. 그녀는 며칠 전 루비카 몰래 얇고 반투명한 잠옷을 주문했다.

‘후후후, 잘됐네. 마담에게 오는 김에 그걸 가지고 오라고 해야지.’

하늘이 앤을 돕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클레이모어의 후계를 돕고 있다.

“네, 그럼 마담에게 연통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루비카는 어찌 설명해야 할까 망설였다. 대놓고 패션에 관심 많은 귀부인을 알려 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와 교류할 만한 부인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어?”

“교류할 만한 부인이요?”

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최근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 중이었다. 루비카는 좋은 공작 부인이었지만 상류사회에 인맥이 없었다. 다른 부인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탄탄한 인맥으로 다져져 있었다. 그들은 쉽게 편지로 서로의 안부도 물었고, 모임에 초대했다. 그리고 배타적이었다. 앤은 그녀가 수도 사교계에 입성하게 된 후 다른 귀부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내심 노심초사했었다.

“음, 그분들을 초대해서 오늘 연 차 모임 같은 걸 했으면 하는데…….”

“차 모임이요?”

시종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던 칼이 앤과 동시에 대답했다. 제법 멀리 있던 칼이 어떻게 자신의 말을 들었는지 루비카는 놀랍기만 했다.

“마님!”

그는 매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오늘 갑작스럽게 친척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귀한 차는 그런 불청객들과 함께 마시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차를 서빙하고 설명하는 동안 그는 점점 즐거워졌다. 물론 귀한 차를 마시고 오줌이라도 마신 듯 인상을 찌푸린 몇몇 예의 없는 이들은 짜증스러웠지만 엘리제처럼 진면목을 알아주는 이도 있었다.

루비카는 칼의 반응이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피해 앤을 바라봤다가 깜짝 놀랐다. 그녀 또한 만만치 않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하면 사교계 시즌이 되기 전에 귀부인들과 교류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마님은 정말 똑똑하세요.”

오늘도 나쁜 공작 부인이 되는 건 실패다. 루비카는 차마 그들 앞에 그냥 예쁜 옷을 입을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차 모임을 열 생각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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