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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18화 (118/212)

# 11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18화

에드가가 입꼬리 한쪽을 올리고 빈정대며 말했다. 루비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푸훗’ 하고 웃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웃음에 그는 당황했다.

“왜 웃어?”

농담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웃었다. 에드가는 무엇이 그녀를 웃게 만들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아니, 갑자기 당신이 사과를 하고 내 보폭에 맞추려 해서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는지 쭉 걱정했었거든. 아님, 혹시 어디 아픈 데가 있는 건지 걱정스러웠어. 왜 그런 말이 있잖아.”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는 말?”

에드가가 한껏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방금 세사르 경에 대해 말하는 걸 보니 여전하다 싶어서 마음이 편해졌어.”

“마음이 편하다고?”

“응, 방금 전까지는 긴장했는데 지금 좀 안심했어.”

루비카는 정말 편안히 미소 지었다. 대신 에드가의 머릿속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아르망이란 사람이 다정해서 좋다며!’

그래서 그도 다정하게 대하려 노력했다. 그녀의 행동에 맞춰 배려하려 노력했다. 그녀에게 다정하게만 대한다면 자신이 다 이긴 게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결과는 그가 어디가 아픈 게 아닌지, 자신이 실수한 게 없는지 걱정하는 루비카였다.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에드가는 거대한 벽에 부딪친 느낌을 받았다. 아르망이란 남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래도 에드가, 세상에 만약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세사르 경이라면 알아서 하겠지.’ 하고 손 놓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사르 경이 알아서 할 리가 없잖아. 기사를 데려가는 것도 잊고 혼자 나선 작자인데. 당연히 수색을 해야지.”

루비카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머뭇거리더니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미안해. 그분이 일을 벌인 건 나 때문인데 내가 관리를…….”

“사과하지 마.”

에드가가 소매를 뿌리쳤다. 허공에 그녀의 손이 멋쩍게 남았다.

“당신은 사과할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어.”

루비카는 펼쳐진 손을 쥐었다. 이럴 때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게 더 어울렸다. 하지만 그는 손을 뿌리치고 화가 난 어조로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고 선언했다.

루비카는 또다시 웃음이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공작님은 겉보기와 달리 사람들 대하는 게 영 어려운 듯싶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키도 훨씬 크고 아름답지만 매서운 눈빛을 가진 그가 참 ‘순진’하다고 느꼈다.

“그럼, 고마워.”

사람을 대하는 법은 그녀가 더 잘 알고 있다. 선선히 웃으며 감사의 말을 건네자 그가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그 순진한 모습에 루비카는 깔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공작님은 사슴처럼 도망치겠지.

‘들러붙는 여자가 많으니 카사노바처럼 여자를 잘 다룰 거라고 생각했는데…….’

뺨이 붉어져 그녀와 시선도 못 마주치는 남자를 보자니 가슴 한구석이 콩콩 뛰었다. 이처럼 잘난 남자가 제 앞에서 순진하게 구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그가 퍽 귀엽게 느껴졌다. 루비카는 발그레해진 그의 뺨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정신, 정신 차려.’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루비카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왜 이럴까? 내가 요즘 왜 이럴까?

루비카는 그를 볼 때마다 예전과는 다른 감정이 싹 트는 게 느껴졌다. 추운 겨울이 끝나고 다가오는 봄에 싹틀 씨앗을 품은 대지처럼 그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왜,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 감정은 뭘까?

루비카는 에드가의 붉은 입술에 머문 시선을 황급히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가 또 감사의 대가로 포옹이나 키스를 요구하면 어떻게 하지? 갑작스레 든 생각에 루비카는 당황했다. 더 당황스러운 건 그가 그런 걸 요구할 때 기꺼이 응했으면 응했지 거절할 의사가 전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고마운 건 나지.”

“어?”

에드가가 꺼낸 말을 뜻밖이었다. 가끔 루비카는 그가 하는 말을 따라잡기는 게 힘들었다.

“덕분에 모험단을 활용할 방법을 찾았으니.”

“아, 세사르 경을 수색하는 데 모험단을 쓰려고? 하지만 그래 봐야 며칠 안 될 텐데.”

“세사르 경이 뭘 찾으러 떠났다고 했었지?”

“야생 장미.”

루비카는 뒤늦게 에드가의 말뜻을 눈치챘다. 그는 세사르를 수색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의 연구에 필요한 것들을 수집하는 데 모험단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둔해 빠지고 정신없는 세사르보다 그들 쪽이 전문가였다.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은데…….”

“그 정도로 클레이모어는 휘청거리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에드가가 힘주어 말했다.

“당신이 그의 장미꽃 개발에 투자를 결정하지 않았으면 계속 계약한 모험단을 어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겠지. 덕분에 고민거리 하나가 줄었어.”

루비카는 모든 것을 자신의 덕으로 돌리는 에드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고민 다 나 때문에 시작한 거잖아.”

어쩐지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녀는 요즘 들어 그에게 자꾸 감동하는 것 같았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말에 싱긋 웃으며 팔을 벌렸다.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곧 그가 강인한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숨 막힐 정도로 그가 느껴졌다. 혼란스러운 가운데도 그녀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안 돼.’

이대로라면 또 그의 품에 안겨 잠들 것 같았다. 숨을 내쉬고 들이 쉴 때마다 그의 짙은 체향이 그녀를 침범했다. 꼭 볕 좋은 날 잔디밭에 누운 기분이었다. 영원히 일어나지 않고 이대로 잠들고 싶은…….

그녀는 사랑이라 불리는 항목에 한해서는 늦된 편이다. 관심도 적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이 마법 같은 현상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러면 내가 꼭 에드가를…….’

좋아하는 거 같잖아. 그런데 그러면 안 되잖아. 안 돼. 나는 그러면 안 돼.

‘아르망.’

루비카는 에드가의 품에 안겨 그를 떠올리려 애썼다. 가련하고 슬픈 그녀의 사랑. 삶의 마지막까지 그녀를 생각해 주고 포탄 속에서도 그녀를 구하러 왔던 사람. 포기하지 말라고, 살라고 속삭였던 너무나도 늦게 찾아온 그녀의 사랑.

하지만 아르망의 얼굴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숨 한가득 들어오는 에드가의 체향이, 뺨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를 꼭 안은 강한 팔이 모든 것을 방해했다.

“루비카.”

그녀는 그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는 몸이 돌처럼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는데 그가 부르자 마법처럼 움직여졌다.

“아.”

에드가의 손가락이 루비카의 눈가에 닿았다. 눈가를 쓸어 주는 다정한 손길에 그녀는 자신이 또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은 기뻐서가 아니지?”

에드가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속삭였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한 게 있다면 알려 줘.”

잘못한 것. 그가 잘못한 게 뭐가 있을까?

그녀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것,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로 그녀를 현혹한 것,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 준 것, 그녀가 찾고 싶지만 어찌해야 할지 막막한 사람에 대해 자세하게 묻고 대신 찾아 주겠다고 한 것,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

‘……처음처럼 계속 재수 없게 구는 게 좋았잖아.’

그럼 이런 혼란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겠지. 그는 잘못한 게 없다. 그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신경을 쓰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 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어찌 잘못을 물을 수 있을까.

잘못한 건 그녀다.

마음에 다른 사람을 품은 채 그의 행동에 흔들리고, 그 다정함에 취해 기대고 싶어 하는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거다.

어떻게 한 마음에 두 사람을 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삶의 마지막에 찾아온 진실된 사랑을 고작 다정함 때문에 저버릴 수 있을까?

“저기, 에드가…….”

“응.”

“나한테 너무 잘해 주지 마.”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눈동자도 떨렸다. 에드가는 그 속에 있는 망설임과 두려움을 읽었다. 동시에 그의 심장이 떨렸다. 당장에라도 루비카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겠다고 말해 줘.”

그녀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리라 믿었다. 그는 항상 그랬다. 설사 모난 말을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그 뜻에 따랐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그녀가 하는 다른 부탁은 모두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은 들어줄 수 없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그녀에게 불친절해지라니, 그가 그걸 수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전에 심장이 아파서 부서질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에드가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루비카를 제 품에 다시 거칠게 껴안았다.

“아무 생각하지 마.”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의 행동에, 배려에, 그녀가 드디어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 여겼던 그녀의 사랑이었다. 그게 얼마나 가슴이 벅찬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냥, 그냥 이대로 있어 줘.”

마음 같아서야 그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 하나 전하지 못한 놈보다 깊고 진한 키스로 자신이 더 그녀의 곁에 어울린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그에게 흔들리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죄책감을 느꼈다. 아르망과 그녀는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서로에게 좋아한다는 말조차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 죄를 지은 것 같았다.

그동안 배웠던 수많은 가치와 교육이 그녀를 짓눌렀다.

한 사람을 향한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

물론 에드가 또한 그것이 지켜야 할 가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키스로 윽박지르며 자신을 사랑하라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해서 그녀의 사랑을 얻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그녀의 마음이 다 망가진 이후일 텐데.

‘하지만 그딴 놈에게 내줄 수 없어.’

좋아하는 여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하지 못한 놈이다. 그녀는 그가 다정하고 친절했다고 칭찬했지만 사랑하는 여자에게 친절해지는 건 쓰레기가 아닌 이상 당연한 거 아닌가? 이기적이고 제 잘난 맛에 산다는 그조차 그녀를 사랑하게 된 후로 뭐라도 더 챙겨 줄 게 없을까, 뭘 더 해야 그녀의 마음을 살 수 있을까 항상 전전긍긍인데.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지 관리를 해 오지 않은 게 한이었다. 그랬다면 그녀는 지금쯤 그가 꼼짝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신사인 줄로만 알고 있겠지.

에드가는 루비카의 등을 토닥였다. 그의 따뜻한 손길에 눈물이 조금씩 멈추고 몸의 떨림도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그런 변화가 그를 뿌듯하고 기쁘게 했다. 어쩜 한 사람에게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지 신기했다.

‘세상엔 서로 사랑을 약속하고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배신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신은 너무 착해. 좀 이기적으로 살아.

에드가는 그렇게 속삭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 * *

다음 날 아침, 무례를 사죄한다는 이유로 친척들이 오후에 찾아오겠다는 연통이 왔다. 질레한 경이 어떤 식으로 경을 치고, 에드가가 그를 어떻게 협박했는지 소문이 쫙 돌았다. 질레한과 같은 꼴을 당할까 무서워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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