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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12화 (11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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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12화

저택 내 사용인의 위계질서에 따르면 집사는 시녀인 그들보다 위였다. 아무리 시녀라도 공작의 오른팔인 집사의 결정과 집행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집사와 그들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집사는 평민인지만 시녀인 그들은 ‘귀족’이었다.

칼이 집무실 앞을 두 팔 벌려 막는다 해도 에드가의 친척들은 호위를 시켜 그를 쫓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막강한 친척이라고 해도 엄연한 귀족인 시녀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도, 아무리 돈 없는 시녀일지라도 시녀는 귀족이다. 귀족 여인에게 손찌검을 한 사람은 명예가 땅으로 추락하고 만다. 심한 경우 귀족 명부에서 제외된다. 칼이 앤을 급히 청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나만 보내셨어도 되었을 텐데…….’

앤은 앞장서서 걷는 루비카의 등을 보았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몸집. 게다가 오늘은 꾸미지도 못해서 공작 부인의 위엄은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앤은 그 등이 무척이나 크고 단단해 보였다. 거인의 등 뒤를 따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앤은 칼이 유난을 떤다 생각했다. 집사는 예전부터 에드가를 무슨 신 모시듯 받들었다. 선대 주인에게도 충실했지만, 불행한 사고로 선대 공작 내외를 보내서 그런지 그는 에드가에게 과할 정도의 충성을 바쳤다. 앤이 루비카에게 보이는 과보호는 명함도 못 내밀 종류의 것이었다.

설사 질레한 경이 집무실에 쳐들어가도 에드가가 방해된다는 이유로 쫓아내면 그만이었다. 유능한 호위인 스테판은 공작의 명령만을 충실히 수행하는 자였다. 질레한 경이 어떤 자들을 끌고 왔을지 몰라도 스테판에게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루비카는 칼과 앤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고 직접 갔다. 친척들은 은근히 연약한 그녀를 깔보았다. 정통성도 위엄도 없었고 지참금도 거의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직접 지키고자 했다.

앤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이 일을 알게 된 각하는 칼에게 화를 내시겠지만.’

아마 칼도 루비카가 직접 오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에드가는 루비카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어떤 일도 용납하지 않을 스타일이었다. 요즘 들어 그런 성향이 더 심해졌다. 어쩌면 루비카가 자신을 보호하게 했단 사실에 자책할지도 모른다. 사실 앤은 그 장면이 제법 보고 싶었다.

냉정한 에드가가 루비카 앞에서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거나 바보 같을 정도로 환히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앤의 은밀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 * *

“비키지 못할까?”

질레한 경은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는 지팡이를 들고 왔다. 오동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는 무척 단단했다. 그는 그걸 매우 위협적으로 칼 앞에서 휘둘렀다.

“각하께서는 업무에 바쁘십니다. 그분의 막중한 임무에 대해서 잊지 말아 주십시오, 질레한 경.”

“웃기는 소리! 그는 어제 막 도착했어. 그것도 부인의 임신 소식을 듣고! 정말 바쁘면 마석마차까지 써서 영지로 왔을 리가 없지. 칼, 당장 비키게!”

칼은 무거운 집무실문 앞에서 섰다. 흥분한 질레한 경이 집무실에 들어가게 둘 수 없었다. 그가 만약 공작의 멱살이라도 잡게 되면 공작의 이상 상태에 대해서 모두 눈치채게 될 것이다. 에드가는 밤에는 자유로이 걸을 수 있었으나 낮 동안은 그럴 수 없었다. 차라리 낮밤에 관계없이 그랬다면 사고로 불구가 되었다고 꾸며낼 수나 있지. 에드가의 상태는 분명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앤이 빨리 와야 할 텐데…….’

칼은 질레한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불안한 눈으로 보았다. 무섭게 삿대질 하는 지팡이는 조만간 그를 때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군.’

차라리 한 대 맞고 피를 흘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유혈 사태가 일어나면 호위 기사인 스테판이 개입할 것이다. 지금은 스테판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다. 일개 집사인 그를 지키기 위해 친척에게 검을 들이밀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차분한 앤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칼은 안도했다. 시녀장이 문 앞에 서서 버티면 질레한 경도 차마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앤의 옆에는 뜻밖에도 루비카가 있었다.

“마님!”

간소한 실내복을 입은 루비카는 평소와 달리 옅은 갈색 머리를 곱게 땋아 올려 예쁜 핀으로 장식하지 않았다. 얼굴에 화장기도 하나 없었다. 제대로 빗지도 못했는지 풀어진 머리카락은 끝이 뻗쳐 있었다.

“아래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급히 내려왔네. 경, 이게 무슨 소란이지?”

루비카가 최대한 차갑게 말하는데 옆에서 앤이 눈짓했다. 루비카는 그 눈빛의 뜻을 바로 알아듣고 배에 손을 올렸다. 마침 엘리제의 협조 덕에 아침을 넉넉히 먹어 아랫배는 평소에 비해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속은 텅 비었지만.’

아니, 말은 바로 하자. 꽉 차 있다. 아기가 아니라 음식물로.

“부인, 각하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집사에게 비켜 달라고 말씀 부탁드립니다.”

“각하는 일하느라 바쁘시네.”

질레한은 평소와 다른 모습의 루비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부인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차림새를 정돈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손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시는 건 공작 부인의 위엄에 큰 누가 됩니다.”

“손님?”

루비카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이런 미소는 대체 어디에서 배운 걸까. 갓 결혼을 한 새 신부였던 루비카는 이러지 않았다. 좀 더 주변의 눈치를 보고 다정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어떻게 새파랗게 어린 애가 제 앞에서 이런 웃음을 짓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이런 어이없음을 딱 3년 전에 맛봤었다.

‘……에드가.’

새파란 스물두 살짜리가 공작이 되더니 공작가를 쥐락펴락했다. 물론 질레한 경은 그 속에서도 제 잇속을 챙기고 유지하는데 성공했으나 새파란 어린애에게 이래라저래라 소리를 듣는 건 무척 속이 쓰렸다. 그때 에드가는 딱 지금 루비카처럼 미소 지었다. 그리고…….

“기별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와서 말리는 시종을 제치고 집무실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게 손님이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예산서를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멍청이가 클레이모어의 친척이라고?

질레한은 제 귀를 의심했다. 어쩜 저리 똑같을까? 슬쩍 올라간 입꼬리는 문제도 아니었다. 야멸찬 말의 내용은 에드가가 한껏 그들을 물리치거나 비꼴 때와 똑같았다. 며칠 전 그의 앞에서 자신도 공작을 말리기 위해 애썼다고 눈물을 내비쳤던 부인과 정녕 같은 사람인가.

“단어를 잘못 사용했네. 경 같은 사람을 일컫는 정확한 단어를 알려 주지.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

질레한은 입을 쩍 벌렸다.

“벌써 두 번째네. 기별 없이 멋대로 쳐들어 온 게. 그것도 채 일주일이 안 되어서.”

“그, 음, 음…….”

질레한은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소리치거나 윽박지르는 걸로는 이 공작 부인을 물리치기 힘들 것 같았다. 손님에 대한 예의를 운운하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그녀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이지. 아니, 그동안 에드가에게 특훈이라도 받았나.’

시골에 있던 처녀가 이 정도의 위엄을 갖추는 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녀는 정말 에드가에게 ‘싸가지 없고 오만하게 굴기’라는 특훈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라면 그런 짓을 벌이는 게 가능했다. 어쩌면 ‘그래서는 완벽한 공작 부인에 어울리지 않아!’ 라고 잔소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각하께서는 요 며칠 왕성에 계시다 간신히 영지로 돌아오셨습니다. 내일 다시 올라갈지 모르니 이때가 아니면 언제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까?”

“그는 항상 일 때문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지. 어느 날은 왕성에 있다, 어느 날은 별장에 계시다, 어느 날은 또 공작저에 계시는 등. 한가해서 저택에 돌아온 게 아니니 그분을 귀찮게 하지 마시게.”

“저는 친척으로서 영지 일에 대해서 각하께 간언을 올릴 의무가 있습니다.”

“각하께서 집무실에서 일하실 때는 나조차 함부로 연락하지 못하네. 그는 어제도 바쁘고, 오늘도 바쁘고, 내일도 바쁜 사람이니까.”

루비카는 처음 들었을 때 참 재수 없다고 총평한 에드가의 말을 그대로 입에 올렸다. 질레한은 잠시 침묵했다. 에드가가 자주 읊어 대며 그를 따돌렸던 말을 공작 부인이 할 줄이야. 부부 사이가 좋다니 아무래도 그가 그녀에게 클레이모어 친척을 대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 주고 있는 듯 했다.

‘……이 결혼, 찬성하는 게 아니었다.’

힘없고 어리바리한 여자가 공작 부인이 되길 바랐다. 후작이나 백작가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여인보다 루비카가 좀 더 다루기 쉬울 것이라 기대했다. 설사 에드가가 공작 부인을 싸고돌아도 그가 언제까지나 부인을 지켜 줄 수 있을 리도 없다 여겼다.

―그 여자 보통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질레한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낱 여인이 똑똑하게 굴어 봤자 뭐 얼마나 똑똑하다고. 이제는 그녀가 보통이 아니라는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질레한은 비록 에드가에 비해서 두뇌 회전이 한참은 뒤졌지만 잔머리에 한해서는 자신 있었다.

“물론 각하는 바쁘십니다. 하지만 지금, 각하는 바쁘시지 않습니다.”

질레한이 당당히 외쳤다. 이게 무슨 ‘뜨겁지만 차가운 커피’ 같은 소리인가. 루비카는 잠시 그의 머리가 잘못된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보십시오, 집사가 나르려 한 것을!”

하지만 질레한이 가리킨 쪽을 보았을 때 루비카는 그의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망할!’

그건 언젠가 칼이 열을 내어 설명한 ‘차’라고 불리는 음료를 따르는 기구와 그 찻잎이었다. 아무래도 에드가가 두통을 달래기 위해 유일하게 쉬는 시간에 질레한 경이 들이닥친 것 같았다. 이래서는 질레한 경을 이 자리에 붙잡아 둘 명분이 없다.

‘칼!’

루비카는 원망을 담은 눈으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예민하신 각하가 커피 대신 이국의 음료를 마시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잠시 각하께서 차를 마시는 동안 제가 공작가의 앞날에 대해 한 말씀 올리는 것이 그리 무례입니까? 바쁜 각하께서 유일하게 바쁘지 않은 시간을 틈타 온 제 정성을 봐주시지요.”

루비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질레한은 이것 보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키가 작은 그가 그러니 무척 얄미웠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는 없어.’

뭐든 초반이 중요하다. 처음에 기선을 잡아 두지 않으면 나중에 이를 돌이키기란 무척 어렵다. 특히 루비카처럼 힘없는 여자는 더욱 그랬다. 빈틈을 하나라도 내보여서는 안 된다. 질레한 경은 한 번 맛본 승리를 잊지 않고 두고두고 그녀를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 할 것이다. 루비카는 마음속으로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숫자를 세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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