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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11화 (111/212)

# 11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11화

떨어져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녀는 친척들과 면담하는 동안 있었던 일과 카나에게 새로 주문한 드레스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또, 그가 왕성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었다. 왕성의 복도는 소문대로 휘황찬란할까? 수도에는 사람이 정말 개미 떼처럼 많을까?

수도는 일반적인 영지의 번화가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 들었다. 항구에도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건 주로 생선과 생필품에 국한되어 있었다. 고가의 상품들은 이를 다루는 고급 상인이 저택으로 직접 왔다.

일부이긴 했으나 수도에는 고급 상인이 엄선한 물건만 파는 가게가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향수 가게였다. 물론 백작 이상 가는 고위 귀족들은 장인을 여전히 저택으로 불렀지만 간혹 콧대 높은 장인은 그들이 자신의 공방에 심부름꾼이라도 보내지 않는 이상 절대 먼저 가지 않았다.

루비카는 그런 이야기를 에드가에게 듣고 싶었다. 물론 그는 바쁜 사람이라 그런 곳에 갈 시간이 없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왕성은 어떤 곳인지, 공주님이나 왕세자에 대해서는 들려 줄 수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앤의 오해에 대해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에드가는 언제나 그렇듯 무심한 태도로 들어 주기만 했다.

아쉬웠다. 그는 자신이 그에 대해 궁금한 만큼 궁금하지 않은 것일까?

그는 무척 바빴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저녁 시간뿐이다. 지금도 아침부터 집무실에 처박혀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겠지. 그가 집무실에 들어가면 코빼기는커녕 머리터럭 하나 보기 힘들었다. 그 문을 지키는 칼은 루비카를 무슨 지옥문에 들어가려 하는 산 자 취급했다.

‘바쁜 사람을 귀찮게 할 수 없지.’

그녀가 정오가 다 되도록 퍼질러 잘 동안 에드가는 새벽같이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겠지. 그 생각을 하니 영 입맛이 돌지 않았다. 루비카는 눈앞의 요리를 먹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입 안의 음식이 모래처럼 느껴졌다.

“그만 먹을래.”

“마님, 너무 조금이에요. 좀 더 드세요.”

“못 먹겠어.”

저녁은 잘 드시는 분이 아침은 매번 왜 이럴까. 앤은 걱정스러웠다. 그녀가 바빠 엘리제에게 시중을 맡겼을 때 루비카는 분명 잘 먹었다. 그녀는 식당이 아닌 침실에서의 식사가 루비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 것 같아 궁리 끝에 주치의에게 도움을 요청해 아침 식사를 침실에서 해도 좋다는 진단을 받아 내었다.

“주스라도 좀 더 드세요.”

“입덧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루비카는 앤의 타는 속도 모르고 태평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루비카를 엘리제가 힐끗 보았다. 엘리제는 이때 어떻게 하면 루비카가 식사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말. 마님, 제게 왜 이러세요.’

자꾸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나눠 먹으려 한다. 엘리제는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 루비카의 꾐에 넘어가 테이블에 앉아 같이 음식을 먹었듯 엘리제는 루비카에게 약했다. 자신에게 뭐든 나눠 주려 하는 사람이 우울한 표정으로 포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지나치기 힘들었다.

엘리제는 결국 큰 결심을 했다. 그녀는 운반대에서 여분의 접시와 수저들을 챙겨 왔다.

“엘리제?”

당황하는 앤을 내버려 두고 엘리제는 루비카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빵 하나를 뚝 떼어 반은 자기 접시에 반은 루비카의 접시에 올렸다.

“저도 먹을 테니 마님도 드셔야 해요.”

엘리제에게 이게 무슨 실례냐고 말하려 했던 앤이 입을 닫았다. 그 전까지는 입맛이 없다고 했던 루비카가 빵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냥 먹으려니 퍽퍽하네요. 스튜에 찍어 드세요.”

엘리제의 유도에 루비카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근과 호박, 소고기가 잔뜩 든 스튜에 빵을 올려 스푼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앤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동안 아침 식사를 잘 못하신 건 그럼…….’

앤은 엘리제를 혼내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음식을 반씩 뚝 잘라 엘리제와 루비카의 접시에 올려 주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그녀도 아예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아 같이 먹었다.

“고마워.”

식사가 끝나고 루비카는 자그맣게 엘리제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엘리제가 자신을 위해 용기를 냈음을 알았다. 고작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분고하가 엄격한 세리토스 왕국에서 그녀가 한 일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엘리제는 어쩐지 가슴 한쪽이 울컥했다. 따지자면 아주 작은 배려였다. 루비카는 공작 부인이니 그녀의 호의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잊지 않고 고맙다고 말했다. 정작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은 엘리제였다. 그녀야말로 루비카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른다.

“아니에요, 마님.”

반사적으로 부정한 다음 후회했다. 하다못해 ‘제가 더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어야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냥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야.’

엘리제의 마음은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엘리제는 루비카에게 그녀가 루비카를 얼마나 좋아하고, 또 감사하고 있으며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는지 전하고 싶었다. 루비카가 아니었다면 엘리제는 아마 자신이 세상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엘리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렀다. 어떻게 하면 이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럴듯한 수식어로 꾸미는 것보다 진심 그대로를 전하는 게 더 어렵고 용기 있는 일이란다.

엘리제는 그녀의 어머니가 편지에서 종종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리 해도 좋은 말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그래. 진심 그대로를 전하자.

“마님.”

식사를 끝마치고 물을 마신 다음 손을 닦던 루비카가 고개를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엘리제의 얼굴이 자못 비장했다.

“저야말로 마님께 감사해요. 마님이 제게 주신 은혜는 뭐에 비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마님을 위해서 뭐든 할 거예요.”

“정말?”

뜻밖에도 루비카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 뭐든 다 할 수 있어?”

설마 뭔가 이상한 일을 시키려는 건가? 엘리제는 겁이 덜컥 났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카가 시킨다면 그게 설사 목숨을 거는 일이든, 범죄든 다 할 수 있었다. 또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어떤 사악한 일이든 그건 결국 사람을 구하는 일일 것만 같았다.

“그럼, 드레스를 입어 줘.”

“네?”

“예쁜 옷, 화려한 옷을 겁내지 말고 입어 줘.”

루비카는 어안이 벙벙해진 엘리제의 왼쪽 손을 잡더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이야. 그 벼룩색…….”

“마님!”

하지만 루비카의 다음 말은 급박한 시종의 말 때문에 이어지지 못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앤과 엘리제는 급히 일어나 접시와 포크를 치웠다.

“들어오게. 무슨 일인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들어온 시종은 현관과 응접실의 손님 시중을 전담하는 접객 전문이었다. 그는 귀한 손님을 전담하기 때문에 다른 하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옷을 입고 꾸밈새에 나름 신경을 쓰는 자였다. 그런데 어찌나 빨리 뛰어왔던지 포마드를 바른 머리칼이 다 흐트러지고 말았다.

‘누가 무례하게 저택을 휘젓고 다니는 건가?’

처음 마영석을 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래에서 기다리던 몇몇 친척들이 접객 시종들을 제치고 침실이 있는 4층으로 쳐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계단도 있었고, 지키고 있는 호위도 많았다. 게다가 공작 부인의 공간은 역시 아무리 친척이라 해도 공작과 시중드는 이들이 아니면 함부로 침범하기가 힘든 곳이었다.

더욱이 그녀가 임신했다고 알려진 지금은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 경을 치를까 봐 친척들은 방문도 자제하고 있었다.

“질레한 경께서 각하의 집무실 앞에서 소동을 벌이고 계십니다. 집사님께서 막고 계시지만 아무래도 혼자서는 힘에 부치셔서……, 마님을 급히 불러 달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친척들이 찾아온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이 일의 원흉은 그녀였으나 대신 뒤집어쓰기로 한 남자. 친적들은 사실 에드가를 잡아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가 왕성으로 올라가 버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에드가는 그녀의 임신 소식에 열 일 제치고 영지로 내려오고 말았다. 급히 오는 통에 그만 국왕의 협조를 얻는 것도 잊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왕성으로 피신 가 있으라고 했어야 했나.’

하지만 에드가는 어젯밤 그의 품에서 잠든 루비카를 침실로 옮기고 푹 자는 모습을 본 다음에야 떠났다. 내심 그녀는 그가 좀 더 공작저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질레한 경은 어디에 계시죠?”

모두 그녀의 고집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루비카는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나서기로 했다. 그 혼자 이 폭격을 맞게 해서는 안 된다.

“집무실 앞에 계십니다.”

“안내하세요.”

루바카의 말에 앤이 허둥지둥 길을 막았다.

“마님, 아직 제대로 옷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머리도 마찬가지고요.”

옷은 실내용 드레스였으나 보석 같은 건 착용하지 않았다. 밥을 편히 먹을 생각으로 머리도 그냥 풀어 헤친 상태였다. 확실히 저택 내 하인 이외의 사람에게 보여 주기에는 낯부끄러운 모습이긴 했다.

“잠시, 머리라도 하고 가요.”

“하지만 내가 꾸미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질레한 경이 칼을 밀치고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어.”

아무리 칼이 에드가의 충실한 오른팔이라 할지라도 그는 집사였다. 귀족인 친척들이 신분을 무기로 삼으면 칼도 한계가 있었다.

“마님, 호위를 맡은 기사들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앤, 공작 부인인 나도 그가 집무실에 있을 때는 일하는 데 방해될까 연락하는 것조차 고심했어. 그런데 친척들이 이렇게 제멋대로 집무실에 쳐들어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하지만 루비카의 뜻은 완고했다. 그녀는 셰니에 부인이 루비카의 이름을 들먹여 에드가가 일하는 중에 그의 집무실에 들어간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이 일도 사실상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앤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루비카는 자신 때문에 에드가가 곤욕을 치르게 두고 싶지 않았다. 국왕의 지지를 얻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저녁이 되면 더 큰일 치르기 전에 빨리 수도에 있는 저택으로 가라고 하자.’

그리고 오늘은 그녀가 에드가를 위한 시간을 벌 예정이다.

“칼이 도움을 요청할 정도면 정말 급하다는 이야기니까 머리를 해야 한다는 등 체면 차리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가자.”

“하지만…….”

사실 머리는 핑계였고 앤은 루비카가 큰일에 휘말리는 걸 막고 싶었다. 설사 그녀의 임신이 진실이 아니었다 해도 앤에게 루비카는 자신이 지켜야 할 공작 부인이다. 에드가 또한 그녀가 충성을 다해야 할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그를 지켜야 한다는 자각은 없었다.

하지만 루비카의 엄격한 적갈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앤은 입을 다물었다. 루비카의 기백에 눌렸다. 갓 스물두 살이 된 여인이 내뿜을 수 있는 기개가 아니었다. 앤은 꼭 사교계를 주름잡던 선선대 공작 부인이 자신을 노려볼 때와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

앤은 뱀 앞의 생쥐처럼 얌전히 대답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비카의 눈이 곱게 휘었다. 그리고 루비카는 성큼성큼 시종을 앞세워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꼭 대장부 같았다.

앤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그녀는 루비카를 지나치게 과보호하려던 걸지도 모른다. 루비카의 겉모습이 앳되고, 엘리제처럼 곤경에 처한 아이를 지나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서 그런 것일까.

“엘리제, 우리도 가자꾸나.”

“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몸을 날려서 막아야 한다.”

엘리제는 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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