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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98화 (98/212)

# 9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98화

무슨 ‘우리 애가 이제 걸을 줄도 알아요.’도 아니고, 고작 먼저 포옹 한 것 가지고 저렇게 자랑하듯이 말할 필요가 있나.

“그리고 내가 내려다보자 슬쩍 눈을 감더군. 거기에 내가... 음, 음. 입을 맞췄지.”

으아아아! 이제 더는 못 참겠어.

지그먼트와 같은 감정이었는지 조수가 펜을 일지에 찔러 넣다시피 꾹 눌렀다. 잉크자국이 뚝뚝 떨어졌다.

“각하! 각하는 병에 걸리신 게 아닙니다.”

“병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지금까지 내 이야기는 뭐로 들었지? 이렇게 심각한 증세를 듣고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방금까지 웃고 있었던 에드가가 왈칵 짜증을 냈다. 그는 정말 심각했다. 제 병을 제대로 고쳐야 튼튼한 심장으로 루비카를 지켜 줄 수 있다. 그런데 이 의사인지 돌팔이인지 하는 놈이 병이 아니란다. 그럼 이딴 고장 난 심장으로 평생 살아야 하나.

“각하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아니야! 이전에는 결코, 이딴 식으로 심장이 뛰지 않았네. 결코 이런 식으로 비참한 기분에 빠져 든 적이 없었네.”

“그 비참한 기분, 언제 드셨습니까? 들을 필요도 없이 마님께서 눈물 지으실 때 그러셨겠지요?”

아니!

아니라고!

그렇게 외치려던 에드가의 입술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

그랬다. 그는 루비카가 눈물 지을 때 세상이 다 부서질 것 같았다. 심장이 아프고 또 아팠다. 너무 아파 호흡이 곤란했다. 울적하고 짜증나고 비참했다.

‘돌팔이가 아닌가?’

에드가는 생경한 눈으로 지그먼트를 바라봤다. 나이 지긋한 의사는 소문대로 수도에서 실력 있는 의사였나 보다. 그가 말하지 않은 증상을 미리 맞추다니.

‘아니, 그래도 돌팔이야. 나는 분명 병에 걸렸어.’

처음에는 단순한 감기 몸살인줄 알았다.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다. 감기약과 샴페인을 한번에 마셔 부작용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학자에게 의뢰하자 학자는 감기약과 술을 한 번에 먹고 잠깐 그럴 수는 있어도 그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며 연구자체를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에드가는 이 일시적인 현상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러나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가 지나고 지날수록 심장이 뛰는 소리는 더 커졌고, 비참한 기분의 강도는 더욱 세졌다. 기분이 좋을 때 구름 위를 걷는 정도였다면 요즘은 숫제 태양 옆에 서서 불타 녹아 사라질 정도였다.

그리고 바보 같이 한 사람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꼭 무슨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일을 할 때나 책을 읽을 때나 그는 그녀가 떠올랐다.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 그는 뛰어난 두뇌와 함께 뛰어난 집중력을 가진 사내였다.

이게 큰 병이 아니면 뭐가 큰 병이란 말인가.

“그건, 그건 맞지만 그게 내가 정상이란 것과 무슨 상관인가. 나는 병에 걸렸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지그먼트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에드가를 바라봤다. 누구에게도 그런 눈빛을 받아 본 적 없는 에드가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그가 한 말에 받은 충격에 비하면 그건 새발의 피도 되지 않았다.

“각하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저 사랑에 빠졌을 뿐입니다.”

“사, 사……. 뭐? 사랑?”

“네. 지극히 정상적이게도 남편으로서 자신의 아내를 사랑해 그분을 볼 때마다 심장이 뛰고 그분이 웃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그분이 눈물 흘릴 때 세상이 부서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뿐입니다.”

조수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정신의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아니 의학자체를 전공하지 않아도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간단한 처방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똑똑하고 대단하신 공작님이 이런 문제로 자신들을 불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뭐, 사람에 따라서는 아무리 똑똑해도 이런 문제에 늦된 사람이 있으니.’

지그먼트는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공작을 흘끗 바라봤다. 아무래도 비싼 약이나 처방전으로 돈을 챙기기는 글렀지만 이런 간단한 일로 진료비를 두둑이 챙겼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조수도 가야 할 때라는 걸 눈치챘는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그럼, 공작 각하.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다른 거 하실 필요 없이 자주 마님께…….”

“……돌팔이.”

“네?”

에드가가 벌떡 일어나 지그먼트의 멱살을 잡았다. 지그먼트는 나이가 지긋했으나 의사로서 수술을 해야 했기에 팔뚝의 힘이나 다리 힘은 장정 못지않았다. 그러나 그는 에드가에게 그야말로 도살당하는 소처럼 질질 끌려나갔다.

“각, 각하.”

“스승님!”

조수가 재빨리 가방을 챙겨서 따라 나왔다. 순식간에 현관에 도착한 에드가는 그 불쌍한 의사를 문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꺼져!”

지금이야 잘나가지만 소싯적 지그먼트는 종종 이런 취급을 받았다. 그 덕에 적절한 낙법을 익힌 관계로 그는 돌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일 만은 막았다.

“두 번 다시 내 앞에 얼씬하지 마!”

그리고 쾅! 문이 닫혔다.

“아이고, 아야.”

허리를 짚고 일어서는 그를 조수가 부축했다. 대체 뭐가 문제였기에 공작이 저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자신을 쫓아냈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여염집 아녀자도 아니었고 제 부인을 사랑한다고 일러준 건데 저리 화낼 게 뭐람.

‘도대체 귀족들 속을 알 수가 없구나.’

혀를 끌끌 찼다. 이대로 진료비도 못 건지는 건가? 그럼 억울하기 이를 데 없다. 진료비를 생각하면 새벽별이 뜰 때까지 에드가를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 않았으나 그 돈이 못 받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얘야.”

조수에게 귀족들의 행실을 감독하는 부서에 이 일을 고하자고 말하려던 때 닫힌 문이 열렸다. 곧이어 집사 칼이 곤란한 표정으로 나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집사의 손에는 두둑한 주머니가 하나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그먼트 씨.”

돈을 받으니 웃음이 난다. 사실 몇 안 되는 왕실 가족을 돌보는 것보다 더 많은 환자를 만나 다양한 병을 연구하고 싶다는 건 핑계였고 그는 그냥 돈이 좋았다. 에드가가 루비카를 사랑하듯 그는 돈을 사랑했다.

“아닙니다, 집사님. 그런데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집사님도 그 자리에서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각하께서 마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을 아뢰었을 뿐인데 왜 저리 화를 내시는지…….”

“그게…….”

칼이 말 끝을 흐렸다. 그는 에드가가 루비카를 좋아하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모르면 바보다. 에드가는 루비카 앞에서 가끔 주체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먹고 있는 음식에 집중하거나 배배꼬인 말을 하기 일쑤였다. 어느 정도 냉정을 유지 하였기에 칼은 에드가가 의사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할 때까지 제 주인의 병증, 아니 사랑이 저 정도인줄 몰랐다.

“자존심 문제일겁니다.”

“자존심이라니?”

“저희 마님은……각하를 좀, 귀찮아하시거든요.”

차마 안 좋아한다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지그먼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런 대단한 남자를 귀찮아한다고? 세상에 그런 미친 여자가 어디 있나.

“그래서 지금은 좀 혼란스러워 하시는 걸 겁니다. 아마 나중에 정신을 차리시면 경께 미안해하실 겁니다.”

칼이 애매하게 웃었다. 지그먼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사교계의 매력 넘치는 그 수많은 재목들도 유혹하지 못한 공작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든 거지?

그때 칼이 건넨 주머니 안의 금화를 확인한 조수가 지그먼트에게 조용히 액수를 속삭였다. 선금도 미리 받았는데 이정도면 놀라운 금액이었다. 그 정도 액수면 상대가 공연히 맘 바꾸기 전에 빨리 사라지는 게 예의였다.

“뭐, 어쨌든 각하께서 저러시는 건 몸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 게 아니니 괜히 공연한 약을 드시지 않게 집사께서 잘 챙겨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처방도 내렸겠다. 지그먼트는 빠르게 사라졌다. 칼은 그가 무사히 마차를 타고 떠나는 걸 본 다음 공작의 방으로 돌아갔다. 에드가는 여태까지 머리를 쥐어짜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칼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사막을 건너 온 차를 꺼냈다. 곧 향긋한 향이 침실을 꽉 채웠다. 차는 에드가가 머리가 아플 때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는 것이었다. 이번 일은 잠시 기분전환을 하면 되었다. 머리에 맑은 공기와 향긋한 내음이 들어가면 공작은 놀란 마음은 진정하고 결국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치워.”

하지만 차를 내밀자 에드가는 위협하듯 으르렁거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칼은 가까운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았다.

“각하.”

“나가.”

단호했다. 칼은 잠시 엉거주춤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지금 나가는 게 좋을지 공작이 혼란스러운 마음은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좋을지 섣불리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각하, 그.”

“나가.”

더 있다가 멱살이 잡혀서 문밖으로 팽개쳐지는 사람이 그가 될 기세였다. 칼은 잽싸게 방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에드가는 한참을 앉아 있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는 사랑을 혐오한다. 사랑 같은 건 이 세상에 불행만 준다. 멀쩡한 사람이 사랑에 빠져서 말도 안 되는 짓을 벌리거나 재능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연인을 쫓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그는 목격했다. 사랑 같은 건 할 수 있다면 안 하는 게 나았다.

그의 어머니만 해도 그렇다. 그처럼 고고한 님프가 어쩌다 제 아버지 같은 쓰레기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했다. 그리고 제 아버지가 어째서 어머니 같이 완벽한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운운했는지 불가사의했다. 애초에 사랑이 없었다면, 모두 찬양해 마지않으나 세상을 살아갈 때 꼭 필요치 않는 그 가치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불행이다. 그는 평생 사랑 같은 건 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런 불필요한 감정 따위에 빠져서 뭐하는가.

하지만…….

-그분을 볼 때마다 심장이 뛰고 그분이 웃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확실히 루비카가 웃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 미소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했을 때 울컥 짜증이 치솟았고 말할 수 없는 초초함을 맛봤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향해 그리 웃으면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고, 두 팔로 루비카를 꽉 안고 싶은 충동과 몇 번이고 싸웠는지 모른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크게 뛸 때도 그녀가 항상 함께 있었지.’

특히 이마에 키스하거나 그녀를 껴안을 때면 에드가는 짜릿한 흥분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첫날밤에는 의사에게 차마 이야기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분이 눈물 흘릴 때 세상이 부서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뿐입니다.

그랬다. 루비카가 눈물 흘릴 때 그는 가슴이 미어졌다. 특히 그 때문에 그녀가 신념을 버려야 했을 때 그는 난생 처음으로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전에는 자랑스러웠던 가문의 전통이 짜증스러웠다. 그깟 구습을 지키려 노력했던 지난 세월에 환멸을 느꼈다. 그녀가 오기 전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악습 따위 재까닥 고쳐 놓지 왜 유지했는지 자신이 세상에 다시없을 바보 같았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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