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97화
에드가는 루비카를 믿었다. 그녀는 부드러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무척 강했다. 죄 없는 사람의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는 하였으나 단단해져야 할 때는 무쇠가 되었다.
‘그럼 나도 반말할게. 에드가.’
피식, 그때 루비카의 적갈색 눈동자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다. 누구도 그에게 그렇게까지 강하게 대들지 못했다. 혹 그가 자신의 약점을 잡으라 걱정하였으나 루비카는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식으로 그에게 맞섰다. 하긴 그가 그녀의 약점을 잡을 수나 있을까. 잡아 봐야 그녀의 불쌍한 사촌동생의 운명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에드가로서는 도저히 그런 밑바닥에 가까운 짓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럼 루비카는 제 뜻대로 다룰 수는 있어도 그녀는 그를 미워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이따위에 신경을 쓰지?’
평생 남이 자신을 미워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미워했으면 했다.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았다. 사랑 따위는 지긋지긋하다.
“칼, 의사는 왔나?”
“네. 한참 전부터 침실에서 각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지에 있을 때 그는 주치의를 만나야지. 만나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뤘다. 그럴 시간에 루비카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봐두고 싶었다. 하지만 수도 저택에는 그녀가 없다. 그는 국왕을 보러 가기 전 칼에게 의사를 불러 달라 부탁했었다.
“고맙군.”
에드가가 장갑을 넘기고 성큼성큼 침실로 갔다. 수도의 저택은 옛 방식과 전통이 그물처럼 촘촘이 감싸진 영지 저택와 달리 제마음껏 꾸밀 수 있었다. 공작의 침실은 집무실 바로 옆으로 그는 이곳에서 영지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생활 할 수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영지 생활보다 수도 생활을 더 선호했었다.
“각하. 지그먼트입니다.”
하지만 공작의 침실에서 그가 들어오자마자 일어선 의사와 조수를 보는 순간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받고 싶은 인사는 시커멓고 늙은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가끔은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고 딴청을 부리기도 하였으나…… 그는 루비카의 인사가 받고 싶었다. 제 취향대로 꾸민 저택에서 웃고 있는 루비카는 어떤 모습일지 못내 궁금했다. 할 수 있다면 루비카와 함께 이곳에 오고 싶었다. 그래서 아침나절 공작 내외를 찾았다 황망해하는 친척들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깔깔 웃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가 이 꼴이라서 불가능하겠군.’
“오래 기다리게 했네.”
“괜찮습니다. 제 일인 것을요.”
지그먼트는 현재 수도 내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 중 하나였다. 왕성에서 어의를 일할 것을 제의받기도 했다. 그러는 그는 다양한 환자와 손님을 만나는 걸 더 좋아했다. 게다가 고위 귀족을 여럿 상대하는 게 수익에 더 좋기도 했다. 오늘만 해도 두둑한 선금을 받았다. 그 정도 돈이면 기다리는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에드가가 소파에 앉자 지그먼트의 조수가 가방속에서 환자의 상태와 증상에 대해서 기록하는 일지를 넘겼다. 지그먼트는 우선 질문하기로 했다.
“최근들어 심장이 자주 쿵쾅거리고 현기증이 나신다고요?”
“그렇소.”
“때때로 울컥하고 자신도 모르게 짜증도 나신다고 하셨지요?”
에드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심장에 이상이 없는지 검사를 좀 하겠습니다. 각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조수가 청진기를 대기 위해 에드가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곧이어 나타난 그의 조각 같은 가슴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숨을 참았다. 매일 자리에 앉아 연구만 하는 사람의 가슴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군살 하나 없이 근육으로만 짜여진 그 왼쪽 가슴에 청진기를 올리는 의사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에드가는 같은 남자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외모를 가졌다.
‘응?’
청진기로 에드가의 심장 소리를 재던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자신이 들은 소리가 의심이 되는지 위치를 바꿔 다시 심장소리를 재었다. 그의 얼굴에 가득 떠오른 의문에 에드가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죽을병에 걸린 게 틀림없는 듯했다.
“이상이 없습니다. 각하.”
그러나 청진기를 도로 넣으며 지그먼트가 꺼낸 말을 뜻밖이었다.
“이상이 없다고? 그럼 시시때때로 미친 것처럼 심장이 뛰는 건 대체 무슨 이유란 말인가?”
에드가가 화를 냈다. 그는 성질 급한 환자였다.
“이상이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각하, 알레르기 때문에 그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은 두드러기가 나는 식이지만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심장이 뛰는 분들도 있지요. 이제부터 원인을 천천히 알아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원인이라…….”
“먼저 심장이 그런 식으로 뛴 게 언제가 처음이었습니까?”
지그먼트의 말에 에드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보조 의자에 두 다리를 올려 꼬았다. 반쯤 소파에 누운 자세가 되어 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결혼식 때였군.”
“네, 결혼식. 정확히 언제쯤이었습니까?”
지그먼트가 따로 명령하지 않았으나 요령 좋은 조수가 차트에 필기를 시작했다. 아마 지나친 긴장으로 처음 발현한 듯 했다. 지그먼트는 이게 내과 쪽의 일인지 정신 쪽의 일인지 일단 에드가의 말을 들은 다음 판단을 내린 뒤 그가 계속 맡던가 다른 의사를 소개할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정신과 관련된 일은 그의 전문이 아니었다.
“……루비카가 선서를 하기 위해 내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았을 때.”
“네, 루비카가 선서를 하기 위해……. 루비카? 부인 말씀이십니까?”
에드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분 나쁜 듯 한마디 덧붙였다.
“그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게.”
살얼음 같은 목소리에 소름이 쭉 돋았다. 지그먼트는 에드가가 최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 부인의 이름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죄송하다는 말을 주억거리며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 뒤에도 언제 심장이 크게 뛰셨습니까?”
환자는 의사의 말에 충실히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확실히 증상을 알아야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잘난 의사라도 돌팔이 같은 치료를 할 수밖에 없다. 에드가는 아주 사무적인 태도로 그의 좋은 머리를 이용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결혼식장에서 루비카에게 키스했을 때, 그리고 잠옷 차림의 그녀를 봤을 때. 처음 굿나잇 키스를 했을 때, 그녀가 먼저 나를 껴안았을 때. 그러고 보니 그녀가 정원을 산책하는 걸 볼 때마다 심장이 뒤고 손에 땀이 나더군. 체온도 올라가고……. 제일 심했을 때는 새로 지은 드레스를 입고 가는 걸 보았을 때야.”
지그먼트는 깜짝 놀랐다. 냉혈한이라고 소문난 공작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음미하듯 말을 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군. 살몬색 드레스에 벚꽃 무늬 같은 꽃이 그녀의 피부랑 무척 잘 어울렸어. 머리의 장식도 귀여웠고.”
그렇게 그림 같은 미소를 지던 사내가 인상을 썼다.
“그런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지 뭔가. 혹 무슨 이상이 있는 건지, 이렇게 격렬히 뛰다가 갑자기 마비라도 되듯 멈추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더군.”
에드가는 말을 하는 와중에 자신의 두려움이 뭔지 깨달았다. 그는 저주에 걸렸다. 밤에는 괜찮지만 낮동안은 다리가 마비된다. 저주의 증상은 날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처음에는 발가락 정도가 마비되었는데 이제는 점차 올라와 무릎 아래가 통째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의 유모는 떠나기 전 저주가 심장까지 올라가기 전에 풀 방법을 찾으라고 했다.
최근 들어 심장이 고장난 듯 뛰고, 기분이 소나기가 쏟아지는 변덕스런 여름처럼 오락가락했다. 이게 저주의 영향이 아닌지 겁이 났다. 갑작스레 심장에 병이나 그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루비카는 어떻게 하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단서라는 이유로 덜커덕 제 부인으로 삼았다. 그녀를 두고 자신이 잘못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 음. 그게……음.”
일지를 두고 지그먼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조수도 적는 걸 멈추고 매우 기묘한 표정이 되어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정말 잘못된 걸까? 정말 잘못되어서 큰 병이어서 그녀를 두고 죽을 수도 있는 건가?
“큰 병인가?”
“아,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그먼트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사내가 눈을 내리깔고 고통에 차 신음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제 심장이 다 두근거려 심란했다. 그를 더욱 심란하게 만드는 건 환자가 지껄이는 말의 내용이었다.
‘정말 몰라서 이러는 것인가?’
에드가가 얼마나 명석한 두뇌를 가졌는지, 그가 아카데미에서 얼마나 우수했는지는 지그먼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마흔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구경해 보았던 아카데미에서 그는 공작의 대단함에 대해서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그런데 그 뛰어난 사내가 멍청이처럼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돌팔이가 아닌지 시험해 보시려고 이러시나?’
지그먼트는 에드가를 다시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았다. 심각한 분위기가 아무래도 농담을 하거나 연기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큰 병이 아니면 대체 왜 이러는 건가?”
“크, 음. 흠흠. 일단 심장과 관련된 증상은 정리했습니다. 주로 루비…… 아, 부인과 함께 있을 때 그러시는군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
에드가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새파란 눈 위의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우수에 찬 모습이 그의 미모의 마지막 한 조각을 완성시켜 주었다.
‘……내 생각에는 공작 부인의 심장이 더 남아나지 않겠는 걸.’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남편으로 둔 부인의 심정은 어떨까? 아마 매일 아침이 꿈같겠지. 저런 아름다운 얼굴을 한 사내가 매일 사랑을 고백하는 광경을 그리니 지그먼트는 같은 남자임에도 두근거렸다. 분명 공작 부인은 심장이 뛰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겠지.
“흠, 심장 쪽 증세는 그렇다고 치고 울컥 짜증이 나는 건 어쩔 때 그러십니까?”
그는 확진을 내리기 전 의사답게 일단 모든 증세를 수집하기로 했다. 심장이 뛰는 건 그렇다 치고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게 만약 부인과 관계가 없다면 마음의 병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정신의학계는 히스테릭 같은 전에 설명되지 않았던 마음의 병을 이론을 세워 설명하고 효과 있는 치료 방법을 찾는 열풍이 불고 있다 들었다. 그는 어쨌든 주요한 고객 중 하나인 에드가를 면밀히 관찰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짜증도 자주 나고 어떨 때는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 회의적인 기분이 들 때가 있어.”
‘호오.’
이번에는 좀 구미가 당겼다. 조수도 마찬가지였는지 빠르게 일지에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구름 위를 날아가는 것처럼 한없이 기분이 좋을 때가 있지. 그럴 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아. 태어나길 잘했다고, 세상이 이렇게 총천연색으로 빛났나 싶고, 새삼 이 세상의 모든 게 좋아 보이는 거지.”
지그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만난 학자가 알려 준 마음의 병명이 생각났다. ‘조울증’이라고 했었나? 우울증과는 좀 다른 증세였다. 공작처럼 바쁜 업무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런 병을 얻을 수 있다 싶었다. 지그먼트는 다음에 에드가가 만날 의사를 위해 증세를 좀 더 파고들기로 마음먹었다.
“언제 그렇게 주로 기분이 좋으십니까?”
“루비카가 내게 웃어 줄 때.”
“네. 루비……네?”
방금까지 에드가가 눈썹에 어린 우수는 싹 사라졌다. 그는 뭔가 재미있는 기억이 떠오른 아이처럼 쿡쿡하고 몸을 비틀어 웃었다.
“얼마 전에는 먼저 나를 껴안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