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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83화 (83/212)

# 8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83화

* * *

“카나, 오늘 부른 건 내가 아니라 엘리제의 옷을 만들어 줬으면 해서야.”

루비카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시녀 엘리제를 카나에게 소개했다. 엘리제는 루비카의 손길에 의해 한차례 탈바꿈을 하였기에 카나는 곧 그녀가 타고난 아름다움을 눈치챘다. 어쩌면 다음 사교계 시즌에서 뭍 남성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지도 모르는 고운 처녀였다. 다만 지나치게 수수한 옷을 입고 있는 게 문제였다. 청회색의 간소한 드레스는 청렴해 보일 수는 있어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살리지는 못했다.

“봄이니 화사한 색감의 드레스가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카나는 일단 치수자를 꺼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치수를 재야 할 것 같아요.”

카나의 말에 하녀들이 엘리제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당황했다. 치수부터 재자는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제, 제 치수는 적어 드릴게요.”

“아니에요. 시녀님이 입으신 옷을 보았을 때는 치수를 다시 재야 할 것 같아요.”

“네?”

“혹시 자주 가슴이 답답하지 않으세요?”

“……종종.”

갑작스런 카나의 질문에 엘리제는 일단 대답하고 말았다.

“옷을 입을 때 암홀 부분이 끼지 않으세요.”

“네. 제 체형이 이상해서…….”

엘리제의 말에 카나가 단호히 대답했다.

“시녀님 체형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한 건 속옷이에요.”

“네?”

“정확한 치수를 재고 속옷부터 다시 맞춰야 해요.”

그 말이 신호였다. 하녀들은 엘리제가 눈 깜짝할 틈도 주지 않고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수줍어 하며 치수를 재는 걸 거부하는 소녀들을 다루는데 도가 텄다.

“가만히 계세요. 그렇게 바둥거리면 제대로 못 재요.”

“부끄러워하시면 안 돼요.”

엘리제가 치수를 재는 사이 카나는 소파에 앉은 루비카에게 디자인북을 내밀었다.

“마님을 위재 준비했습니다. 저번에는 제가 많이 부족해서……. 좀 더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과 자수에 대해서 조사했어요.”

루비카는 기대에 찬 카나의 얼굴에 곤란해하며 답했다.

“내 것은 괜찮아.”

“아, 하지만…….”

저번 드레스보다 더 잘 만들 수 있는데. 카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루비카의 주문덕에 카나의 의상실은 자금 문제에서 간신히 한숨 돌렸다. 공작 부인이 자신의 고객인 이상 앞으로 큰일은 없는 이상 의상실을 운영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용기를 내어 예전 패턴사에게 연락했다. 지금 카나 입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월급을 받고 있는 그는 그녀의 재기에 무척 기뻐했다. 심지어 그녀가 지금 월급의 반절만 쳐줘도 의상실을 옮기겠다는 말까지 흔쾌이 했다. 하지만 카나는 아직 그 정도 월급을 지불 할 수 있을 정도로 재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대신 일이 끝난 뒤 카나의 패턴에서 손 볼 곳이 없는지 봐 주기로 했다.

“지금도 옷이 많아. 내 옷은 됐고 엘리제의 옷이나 많이 만들어 줘.”

루비카는 그러고 눈앞에 늘어선 천을 집기 시작했다.

“이건 엘리제의 피부에 잘 어울리겠다. 이건 눈색이랑 비슷해서 좋은 것 같아. 어머, 이건 무늬가 정말 예쁘다.”

루비카는 순식간에 열 개가 넘는 천을 골라내었다. 모두 최고급천이었다. 그녀의 안목은 비켜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치수를 다 잰 엘리제의 몸에 천을 대기 시작했다.

“봐, 잘 어울리지?”

“네, 무척.”

“이걸로는 평소에 입을 드레스를 만들어 줘.”

휙휙 천을 대었다 옆의 하녀에게 넘겼다. 순식간에 다섯 벌이나 되는 주문을 해치웠다.

“이건 자수가 화려하니 무도회에 입을 드레스를 만드는 데 사용하자.”

그리고 루비카는 펼쳐진 디자인화에서 가장 화려한 가슴 장식을 골라내었다.

“다이아몬드랑 사파이어를 듬뿍 써서. 아, 카나. 방금 전에 고른 드레스 말인데 그것도 어울리는 보석이 있으면 돈을 아끼지 말고 써. 계산은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

하녀들이 부러움에 침을 삼킨 때 엘리제는 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요!”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 루비카는 예상과 달리 기뻐하지 않는 모습에 당황했다.

“……왜?”

“이런 사치스러운 건 제게 안 어울려요.”

“어울리지 않는다니. 넌 얌전한 것보다 화려한 게 잘 어울려. 이왕이면 난 네가 예쁜 옷을 입는 게 보고 싶어.”

정말이었다. 남들 눈에는 평범하다 못해 못생겨 보이기까지 했던 그녀가 자신의 손에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는 건 퍽 즐거웠다. 전에는 엘리제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호위 기사들이 요즘은 흘낏 흘낏 곁눈질로 그녀를 훔쳐보았다. 루비카는 그런 시선에 조금 우쭐해졌다. 엘리제는 그녀의 자랑이었다.

“안, 안 돼요.”

엘리제는 코너에 몰린 쥐였다.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몰랐다. 이럴 때는 자주 들었던 말이 떠오르기 쉬웠다.

“지나친 사치는 죄악이에요.”

“하지만 이 정도쯤은…….”

“사치예요. 안 돼요!”

엄격한 엘리제의 말에 루비카는 입을 닫았다. 엘리제는 어떻게 이 엄청난 주문을 막아야 할지 막막해 그녀의 어머니가 누누이 말했던 말을 일단 내뱉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이었다. ‘사치’라는 말은 세리토스 왕국에서 최대한 지양해야 하는 가치였다. 사치는 왕국 내에서 가장 질타를 받는다. 그 소리 앞에서는 국왕도 어쩔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요. 시녀님이 그리 여기신다면 보석류는 최대한 빼도록 하지요.”

“그리고 저, 천도 이렇게 화려한 천은 싫어요.”

옷은 먼저 입는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 아무리 화려한 게 어울리고 아무리 보석이 어울린다고 해도 당사자가 싫다는데 도리가 없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루비카는 시무룩해졌다. 조금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자신을 꾸미는 것도 아니고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시녀를 꾸미는데 쓰는 거였다. 덕분에 공작가를 위해서란 핑계로 죄책감 없이 마구마구 주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엘리제가 안 된단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건 보석으로 반짝거리는 가슴 장식과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값비싼 비단이건만…….

이제 이 공작가에서 그녀가 그나마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 * *

“마님께서 아침을 거르셨답니다.”

“……뭐라고?”

에드가는 과거에 자신이 애가 탄다는 기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건 애가 타는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칼에게서 그 보고를 들었을 때 그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었다. 뭐가 그리 속상해서 밥도 안 넘어 가냐고 그녀에게 하소연하고 제가 직접 숟가락으로 스프를 떠 그녀의 입에 넣어 주고 싶었다.

‘젠장 할.’

보고 있던 서류를 다 찢어 버리고 싶었다. 사실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집무실에 돌아와서도 한숨도 자지 못했고 아무리 종이를 봐도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겠거니 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까지 집중을 못했던 적은 처음이다.

“왜? 왜 안 먹는 거지? 앤은 뭘 하고 있지?”

“앤은……지금 문 앞에 와 있습니다. 각하께서 마님께 가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

할 수만 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지.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밤새 그녀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눈 뜨자마자 사과하며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없는 그것이었다.

“할 수 있으면 그러고 싶군.”

“안 됩니다. 각하.”

바로 나온 칼의 대답에 에드가가 기분이 상했다.

“안다.”

그는 결국 앤에게 자기에게 이러지 말고 루비카 곁을 지키라는 명령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세상에 다시없을 비통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무능력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는 루비카가 평소 홀로 하는 아침식사를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만찬 때 스티븐이 만든 케이크를 세상에 저리 기쁠까 싶은 표정으로 먹는 루비카만 알았다. 그녀는 드래곤 아이처럼 모험가들이 힘겹게 구한 과일보다는 농부가 열심히 땅을 일구고 피땀흘려 키운 곡식이나 과일을 좋아했다. 접시 위에 음식을 함부로 남기는 법이 없었다.

‘밥을 안 먹는다니…….’

그렇게 식성 좋은 그녀가 식사를 거른다니 자신이 정말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짓을 한 것 같았다.

‘그깟 전통이 뭐라고, 아니 그건 전통도 아니야. 구습이고 악습이야.’

초대 클레이모어에 대한 긍지나 존경 같은 것도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딴 놈 때문에 시작된 악습으로 자신이 괜한 고통을 받는다 여겼다. 아니, 분명 그 놈도 그런 일을 벌일 때 후일 이딴 악습이 생기리라 그도 몰랐을 거다.

‘정신차리자.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에드가는 서류를 다시 보았다. 국왕이 그동안 신혼을 즐기게 배려해 줬으니 그만 좀 회의에 참석하라고 성화이다. 고작 이삼 주 정도 여유만 주고 저런다니 쪼잔하고 배포 없는 배려였다. 에드가는 투덜거리며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슥슥슥 넘기고 도장을 찍었다. 남들이 본다면 아무 생각 없이 종이나 넘기고 있는 걸로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넘기던 그의 손이 멈췄다.

‘소수점 계산이 틀렸잖아!’

그는 보고서를 올린 학자가 일주일을 넘게 매달린 수식을 단 몇 초도 안 되는 암산으로 풀어 버렸다. 그리고 빨간 잉크로 표시를 해 옆에 던지다시피 빼 버렸다. 이딴 계산이 뭐라고 일주일을 소모하고도 소수점이 틀렸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빠져가지고.’

요즘 너무 너그러이 주변 사람들을 대한 것 같았다. 이런 기본적인 계산도 틀린 보고서가 자신에게 올라왔단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사실 소숫점 계산이 틀린 정도로 실험의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테지만 이건 기본적인 자세의 문제였다.

‘다들 일을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 거야!’

에드가는 술렁술렁 넘겼던 보고서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 펜에 빨간 잉크를 묻혀 잔인한 첨삭을 하기 시작했다. 교수가 철없는 학부생을 가르치듯 그는 각종 실험과 통계에서 빠진 게 없는지 계산에서 오류가 없는지 세세하게 지적을 하기 시작했다. 공작부부의 싸움에 학자의 등이 터질 차례였다.

한차례 분통을 보고서에 터트리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일에 집중하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게 다행이었다. 에드가는 펜대에 펜을 놓고 힐끗 시계를 확인했다. 그녀가 산책을 할 시간이었다. 정신없이 일에 집중하는 와중에도 그는 루비카가 산책하는 시간을 잊지 않았다. 이제는 몸에 각인된 정도였다.

에드가는 서재 위에서는 감쪽같이 의자로 보이는 휠체어를 끌어 창가로 갔다. 그는 휠체어를 굴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으면 정상처럼 느껴졌으나 휠체어가 굴러갈 때마다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산책 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창가로 가는 일은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적당히 처진 커튼 뒤에서 그는 기다렸다. 잠시 뒤 그녀가 예쁜 드레스를 입고 시녀와 하녀에게 둘러싸여 나오겠지.

‘기분이 좀 나아졌으려나.’

에드가는 침을 삼켜 타는 속을 달랬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다는 그의 부인. 루비카의 얼굴을 간절히 보고 싶었다. 실의에 빠진 얼굴을 본다면 분명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실의에 빠졌다면 어느 정도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나오지 않았다. 에드가는 당황했다. 그녀는 그 만큼이나 시간을 지키는 걸 좋아한다. 당장 종을 쳐 칼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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