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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82화 (8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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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82화

* * *

루비카는 한참을 침대에 앉아 멍하니 가만있었다. 이제야 현실을 실감했다.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동안 꼭 구름 속을 거니는 것처럼 들떠서 깨닫지 못했다. 불안과 초조함의 파편 한 조각이 가슴에 박혀 있었지만 즐거운 나날이었다.

모두가 제 편을 들어주었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감탄했다. 제멋대로 행동했는데도 역시 현명하신 우리 마님이라도 떠받들기 바빴다. 즐거웠다. 그게 거짓이여도 즐거웠을 텐데 진심이었으니 더 즐거웠다.

그래서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방인이었다. 넓고 쾌적한 저택 어디에도 그녀가 쉬이 맘 붙여 쉴 곳 하나 없었다. 이곳은 그녀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로 있어야 할 곳은 낡고 좁은 수도원의 방이었다.

‘……주제 넘었어.’

이방인 주제에 서로 똘똘뭉친 유서 깊은 집안의 전통을 무너뜨리려 했다. 자만했었던 걸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너무 다정해서, 그녀가 원하면 뭐든 들어줄 것처럼 굴어서…….

‘세상에 이유 없는 친절 같은 건 없어.’

만약에 있다면 그건 의도를 숨긴 친절이겠지. 루비카는 씁쓸히 웃었다. 왜 그리 여겼을까. 이곳을 자기 집처럼, 이곳에 그녀가 할 역할이 있는 것처럼, 공작 부인 앞의 예산이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꼈을까.

그것은 클레이모어 공작의 것이지 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곳에 잠시 왔다 떠날 사람이었다. 떠돌이에 이방인인 자신이 오래된 가문의 삶의 방식을 한순간에 바꾸러 들었으니 세상에 그런 교만이 또 어디있을까.

‘주제를 알자.’

얼굴을 쓸었다. 엘리제가 열심히 찜질한 덕에 붓기는 거의 가라앉았다. 엄청난 친절을 당연하듯 여태 당연하듯 받아들인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공작 부인이 아니었다면 받지 못할 친절이지.’

그리고 공작 부인이란 지위는 그녀가 이룬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에드가는 그녀를 사랑해서 청혼한 것이 아니었다.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청혼했을 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특별허가증까지 받은 결혼을 파기했다 일어날 여파가 걱정되어 제안한 기간 한정의 결혼이었다.

‘내 것이 아니야. 애초에 내겐 자격이 없어.’

그럼 자신은 어떤 존재인걸까. 보기 좋은 인형이라 하기에는 제 외모에 심각하게 하자가 있다고 여겼다.

‘공작 부인을 연기하기 위해 고용된 연기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게 딱 알맞았다. 그러고보니 납득이 된다. 에드가는 역할 연기를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자신처럼 한미하고, 기댈 곳이 없고, 친지 하나 없는 사람이 딱이 아닌가.

‘가만, 그러고 보니?’

결혼한 부인을 연기해 줄 여자가 필요한 남자. 뭔가 중요한 것 단서 하나를 찾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루비카의 상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노크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루비카는 잠시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마님, 앤입니다.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고요.”

“괜찮아. 앤.”

“스프와 빵을 가져왔습니다. 조금이라도 드세요.”

앤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입맛은 여전히 없었다. 하지만 오후에 카나와의 약속도 있는데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았다. 게다가 또 거부하면 그때는 앤이 가만히 잊지 않을 것 같았다.

“……알았어.”

곧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앤이 들어왔다. 그녀가 든 작은 쟁반에는 좋은 냄새를 풍기는 스튜와 맛좋은 흰 빵이 있었다.

“기분은 좀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나 때문에 모두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루비카가 말갛게 웃었다. 여태까지 그녀의 미소가 싱그러운 봄 이슬 같았다며 지금은 차분히 가라앉은 저녁노을 같았다. 계속 상처받은 채로 저녁이 되었다면 에드가에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비카는 슬픔을 오래 가슴에 담아 두는 타입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그랬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슬픔에 빠졌을 때 기분을 전환하는데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주방에서 스튜를 끓여 왔어요. 조금이라도 드세요.”

“고마워.”

뭉근히 끓은 스튜를 빵에 적셔 조금 맛봤다. 맛있었다. 음식이 위에 들어오니 밀려왔던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녀는 앤이 보고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스튜를 먹었다. 배가 부르니 기분이 좀 더 나아졌다.

“오후에 카나와 약속이 있지.”

루비카가 침대에 일어나 활동을 할 기세를 보이자 앤이 안도했다.

“네, 그 전에 기분전환 하실 겸 산책을 하시는 건 어떨까요?”

“……산책.”

루비카는 잠시 창밖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이 산책을 할 때마다 에드가가 이를 지켜보고 있는 걸 알았다. 지금은 그와 최대한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또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에드가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아니 그가 잘못한 게 없기에 더욱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잘못 없는 그를 상대로 상처받은 자신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남 카나를 뵐 때 무슨 옷을 입는 게 좋을까요?”

“그냥 편한 옷을 골라줘.”

앤은 최대한 발랄하게 대답하였으나 루비카는 여느 때처럼 활짝 웃지도 눈을 반짝이지도 않았다. 다른 때와 확실히 달랐다. 눈치 좋은 앤은 시중드는 하녀들을 최소한으로 불렀다. 다들 차분히 자기 일만 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래도 마담이 만든 걸 입는 게 좋겠지?”

드레스를 고를 때 루비카는 그저 그 한마디만 했다. 이 옷에는 뭐가 어울릴 것 같고, 이 색은 무엇과 비슷하다는 여느 때와 같은 수다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차려 입은 다음에 그녀는 엘리제를 찾았다.

“왜 내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지 않았니?”

엘리제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엘리제는 루비카가 선물한 드레스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옷은 그녀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역시 그 옷은 그녀가 입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비쌌다. 가슴 장식에 보석이 많이 사용된 것도 부담스러웠다. 엘리제의 어머니도 편지로 우려를 나타내었다.

‘공작 부인께서 너를 아끼고 예뻐하신다니 무척 기쁜 일이구나.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행동을 조심해야 해. 엘리제, 분수를 알아야 한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분수에 맞지 않게 사업을 키우고 형편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해서 솔라나 가문을 파멸시켰구나. 너는 그러지 말아라. 어떤 옷을 입든 네 주인인 공작 부인보다 비싼 옷을 입지 말고, 부인께서 아무리 너를 아껴도 지나친 선물을 거절하거라. 사치는 독이란다. 한번 중독되면 쉬이 빠져나올 수 없어. 네 수입과 지참금, 미래. 그리고 고생하고 있는 동생을 생각하렴.’

그 비싸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노라면 이제까지 입었던 옷들은 넝마처럼 느껴졌다. 엘리제는 그 느낌이 우려스러웠다. 그와 같은 드레스는 그녀의 한 달 치 월급을 다 털어도 살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가슴 장식의 루비는 할 수 있다면 빼내어 팔고 싶었다. 다만 그것은 공작 부인의 선물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

“너무 아까워서…… 예쁘지만 사교계 시즌에 열리는 무도회를 위해 미뤄 두려구요.”

기껏 선물한 루비카의 마음이 상할까 엘리제는 최대한 듣기 좋은 핑계를 만들었다. 오늘 루비카가 엘리제에게 옷 몇 벌을 선물하려 한다는 걸 알았다. 엘리제는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들여 지나치게 화려한 드레스는 거절하고 평소에 입을 옷 한두 개만 부탁 할 예정이었다. 그 조차도 거절할까 했으나 그럼 루비카의 호의를 너무 거절하는 것 같아 그리 결정했다.

“아.”

루비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의 의도와 달리 루비카는 그녀에게 옷 한 벌밖에 선물하지 않은 자신이 배려가 없다고 느꼈다. 엘리제의 사정상 그녀는 월급을 자유로이 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어쩌면 첫 월급을 수도에 있는 동생을 위해 다 써 버릴 수도 있었다.

‘동생보다 자신을 챙기라고 해서 들을 아이는 아니야.’

루비카도 그런 타입이어서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를 귀찮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를 지키는 데 삶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최대한 많이 만들어 줘야지.’

할 일이 생기자 힘이 났다. 엘리제는 공작가의 시녀이니 이 정도쯤 해 주는 게 공작가의 체면을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예산이 부족한 건 자신의 옷을 덜 지으면 될 것 같았다.

“마담 카나께서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카나가 공작저에 도착했다. 루비카의 평소 일과를 생각한다면 카나는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 루비카는 일과를 다 어겨 버렸다. 가끔은 이런 날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공작 부인을 연기하는 연기자지만 성실히 해야 할 의무까지는 없었다. 괜히 완벽하게 연기해서 에드가가 자신을 옆에 두는 게 낫다고 판단하면 이쪽이야말로 곤란하다.

‘어제 일도 그 사람이 내가 공작 부인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느낄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기분 나쁘고 속상해 할 일이 아니었다. 그와 자신은 그렇게 깊은 관계가 아니다. 필요에 의해 함께 부부역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에드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고 공감해 주리라 기대했던 것이 우스웠다. 왜 그런 기대 같은 걸 한 걸까?

“마님. 마담을 조금 기다리라고 할까요?”

루비카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앤이 누구보다 빨리 이를 눈치챘다.

“아, 아니. 괜찮아. 오히려 빨리 만나고 싶은 걸.”

루비카는 나쁜 기색을 얼른 숨기고 상냥히 대답했다. 어쩐지 매우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평정 위에 그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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