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2화
에드가는 거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루비카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했다. 그는 그럴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고 있었다.
“마님을 말릴 수 있는 건 각하뿐이라고……. 마님에게 미움받을 걸 각오하고 제게 이 일을 알리셨습니다.”
내가 그녀를 말릴 수 있을 거라고? 에드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진작에 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싫다거나 안 된다고 말하면 무슨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마음에 드는 아이를 곁에 두고 싶어 하자 이를 위해 제 꾀를 낼 정도였다. 그때 루비카가 활짝 지은 미소를 생각하면 에드가는 기분이 좋았다가도 나빠졌다. 왜 그녀는 이리 잘난 자신보다 그런 평범한 아이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걸까.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린 거지?”
하지만 이번 일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면 큰 화살이 돌아올 것이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주변의 비난어린 시선을 받게끔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를 말려야 한다. 아주 이상한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게의 결정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에드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이유를 알고자 했다.
“오늘 마님께서 앤과 함께 상반기 예산안을 점검하셨는데…….”
칼이 차근차근 하녀가 보고 들은 것에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보태 말을 옮겼다. 올해 돈을 좀 많이 쓰긴 했다. 갑작스레 준비한 결혼식은 비록 하객 수가 적었지만 신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영지민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등, 다른 결혼식만큼이나 성대하게 치렀다. 거기에 루비카는 본디 그녀의 영역이 아닌 것을 정원을 꾸미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세사르의 연구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거기까지면 좋았을 텐데 얼마 전에는 별채에 강림해 천사처럼 불편한 사항을 모두 고치라고 지시했다. 물론 이 일로 별채에 살고 있는 친척들이 그녀를 다시 보게 되어 좋은 소문이 나는 효과가 있었다. 색안경을 끼고 은근히 결혼식 때 루비카의 행동에 대해서 비웃던 사람들도 요즘은 아주 공작가에서 좋은 부인을 들여왔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다.
하나하나 따지자면 모두 나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일을 루비카가 동시에, 그것도 공작가에 온 지 2달이 채 안 돼서 저질러 버렸다는데 있다. 급진주의자도 이런 급진주의자가 없다. 거기에 루비카는 본디 형편이 넉넉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 시집오면서 근사한 드레스나 보석을 따로 챙겨오지 못했다. 새로운 공작 부인으로서 낯부끄러움 없이 상황과 때에 맞는 최신드레스를 구비하려면 지금부터 돈이 많이들 예정이었다. 거기에 새로운 시녀를 들이고 그녀를 위한 옷까지 산다면 정말이지 이건 예산초과를 넘어 한도초과였다.
물론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부유했다. 그러나 영지와 작위에서 나는 수익만 믿고 계산하지 않고 흥청망청 돈을 써낸 귀족들의 말로란 대체로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단순히 영지만 책임지면 되는 가문이 아니었다. 가문에 기대고 있는 수많은 연구자와 사업,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 공장을 굴리려면 매번 막대한 자금이 든다. 무기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그 새로운 무기가 얼마나 대단하고 성능이 뛰어난지 시연할 필요가 있었다. 부유하다고 해서 가진 돈을 제멋대로 쓸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칼은 슬슬 루비카가 걱정되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한 행동은 모두 선의에서 비롯되었으나 결과마저 선의에 가득 차리라고는 확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예산이 부족하다고? 예산이 부족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에드가는 칼의 설명에 경악에 가득 차 반문했다. 말할 수 없는 짜증이 아래에서 차올랐다.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이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부인이 제가 사고 싶은 옷 하나 제대로 살 수 없을 정도로 예산이 부족하다니 이건 기분이 나쁜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높다 못해 고결하기까지 한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예.”
칼은 루비카가 ‘마영석을 구하느라 사람들이 죽는 게 싫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건 굳이 전하기 않았다. 칼은 어차피 그건 구실을 찾기 위해 적당히 붙인 소리라 짐작했다.
“마영석을 구하는 걸 포기해야 할 정도인가.”
에드가는 ‘……정도로 형편이 궁색한가.’ 라고 말을 하려다 황급히 말끝을 흐렸다. 그런 말까지 하면 그의 자존심이 도저히 견디다 못해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마영석을 구하는 걸 포기하면 마님께서 매일매일 드레스를 다섯 벌 주문하고, 국보급의 보물을 사셔도 끄떡없을 정도입니다.”
“그럼 다른, 친척들에게 주는 선물이나 축제의 규모를 줄이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 에드가는 팔짱을 끼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아는 루비카는 기본적인 산수도 못할 정도의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역상을 했던 집안 출신답게 계산에 능했고 장부도 노련하게 볼 줄 알았다.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칼, 자네 예상에는 필요한 돈은 어느 정도인가?”
칼은 곧장 종이에 루비카가 옷이나 보석을 사고, 놀러 다니는데 필요한 금액을 써서 냈다. 채 1만 골드가 되지 않는 돈이었다. 에드가는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고작 1만 골드 때문에 루비카의 입장을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짜증났다. 고작 1만 골드 때문에 그녀가 고민을 하다못해 마영석을 구하지 않는다는 악수를 두게 만들다니, 자신이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남자인가 싶었다.
‘내 배려가 부족했어.’
노련히 장부를 보고 계산에 밝기에 알아서 하겠지 하고 둔 게 잘못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처음이었다. 공작가의 예산은 자그마한 공국에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 조차도 처음 맡았을 때는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 갓 공작 부인이 되어서 지출해야 할 곳이 많은 그녀를 위해서 처음부터 넉넉하게 돈을 배정해야 했었다.
‘……힘들면 내게 미리 이야기를 하지.’
그럼 에드가는 기꺼이 그녀에게 두뇌를 빌려줬을 거다. 솔라나 양의 건만 해도 그가 얼마나 근사하게 그녀에게 해법을 제시했던가. 에드가는 막힌 속이 뚫린 것처럼 좋아하던 루비카의 모습에 고작 그런 아이가 뭐가 좋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한편, 뿌듯했다. 은근 루비카가 또 고민을 그에게 털어놓아 주길 바랐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러지 않았다. 에드가는 그게 내심 섭섭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동안 한 언행은 자신이 떠올려 봐도…….
쓰레기였다.
그는 가끔 빈 보석함을 열어 원래 푸른 반지가 있었던 자리를 노려봤다. 만약 거기에 반지가 그대로 있었다면 그는 단지 루비카를 처음 만나자마자 친절하게 굴기 위해 그걸 써 버렸을지도 모른다.
“칼, 내 계좌에서 인출 준비해.”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칼은 곧 에드가의 뜻을 이해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각하.”
에드가는 팔짱을 풀고 의자에 나른하게 등을 기대고 서재 모서리를 툭툭 쳤다. 처음에는 화가 낫지만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루비카에게 예쁜 새 옷을 사란 명목으로 돈을 건네주는 게 나을까. 아님 직접 몰래 카나라는 디자이너를 불러서 옷을 주문하는 게 나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구실도 이런 좋은 구실이 없다. 마음 같아서야 확 그냥 계좌를 통째로 그녀에게 던져 주고 다 쓰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루비카의 성격상 그러면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필요한 게 1만 골드 정도라고 했으니 3만 골드 정도가 적당할까?’
루비카가 그동안 입었던 옷들이 비록 고급 천으로 만들어졌고, 공작가의 역사가 담긴 것이었으나 낡은 것이 사실이었다. 오늘 루비카가 입은 드레스는 그녀가 걸을 때마다 수놓아진 자수의 꽃이 바람 따라 팔락이는 게 모든 근심을 잊을 정도였다. 에드가는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정원으로 내려가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또?’
또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그 뒤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루비카를 멀리서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마석 램프는 낮처럼 주변을 밝혔지만 햇살과 같은 따스함이 없었다. 화창한 하늘 아래 빛나는 루비카가 보고 싶었다.
‘……왜 이러는 걸까.’
이렇게 강렬한 충동이 들었던 적은 여태 없었다. 에드가는 생소한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칼은 에드가가 테이블 모서리를 치며 얼굴이 붉어졌다 파래졌다 하얘졌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양새에 당황하다 나직이 그를 불렀다.
“각하?”
“아.”
에드가는 그제야 칼이 제 앞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무엇을 하든 한 가지 일을 바로 바로 끝냈으며 집중력이 좋았다. 그런데 요새 들어 자꾸 딴 생각에 빠져 드는 때가 잦았다. 그 딴 생각은 모조리 루비카에 대한 것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계좌 인출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칼이 당황해 대답했다. 그는 에드가가 이렇게 사소한 실수를 하는 걸 본적이 거의 없었다. 에드가는 혀를 한 차례 찬 후 금액을 지정했다.
“3만 골드. 그 정도가 적당하겠지?”
“부족한 금액은 1만 골드 정도로 제 사견에는 지나친 듯합니다만…….”
“예산은 넉넉한 게 좋아. 가끔 보석도 사고 구두도 사야 하지 않나. 갑자기 비싼 게 사고 싶어졌을 때 괜히 눈치 보느라 못 사는 꼴 보고 싶지 않아.”
“그럼 그렇게 앤에게 전하겠습니다.”
칼이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 했다. 에드가는 앤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루비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분명 기뻐하겠지. 어쩌면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할지도 모른다.
‘가만.’
자신이 직접 전달하면 바로 눈앞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가감 없는 감사 인사를 들을 수도 있는 건가? 에드가는 칼을 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
“네, 각하.”
“앤에게 말하지 마. 내가 직접 전하지.”
에드가의 입가에는 조금 기분 나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곧 칼은 에드가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그의 주인은 부인을 많이 좋아하는 눈치였다.
‘어느새?’
칼은 에드가가 어느 시점부터 루비카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짐작 가는 바가 없다. 분명 처음은 저주의 풀기 위해서 그녀를 찾았을 뿐이다. 에드가는 루비카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진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달달하다 못해 꿀이 떨어지는 부부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착오에 따른 결혼. 에드가는 달아나려고 하는 루비카를 간신히, 정말 간신히 붙잡는데 성공했다. 루비카는 에드가에게 튕긴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에드가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그녀에게 청혼한 것은 단순히 저주를 풀 단서를 찾기 위해, 그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주인의 눈은 루비카를 쫓았다. 아닌 척하면서도 에드가는 그녀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야단났구나.’
그리고 에드가와 달리 루비카는 그에게 사랑은커녕 무관심했다. 칼은 앞으로 주인이 입게 될 상처에 가슴 한 쪽이 아릿했다. 칼은 에드가가 행복했으면 했다. 이를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는 에드가와 그의 어머니에게 평생을 보상해도 갚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4년이라고 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