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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73화 (73/212)

# 7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3화

에드가가 저주에 대해서 털어놓고 의논할 사람은 황제와 칼뿐이었다. 그 덕에 칼은 루비카와 에드가의 결혼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고 어떤 조건이 걸렸는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4년 뒤 그분이 떠나면 각하는 어찌 되실까.’

아직 에드가는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그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사람을 믿지 않고 사랑이란 것에 냉소적으로 변한 주인이었다. 그랬던 그가 어느덧 루비카에게 마음을 열고 그녀를 쫓고 있었다. 마음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불가사의 한 것이라더니, 세상에 절대 바뀌지 않는 진리란 그런 게 아닐까.

칼은 루비카가 떠난 뒤의 주인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마 그는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이전보다 더욱 차가워지거나 몸이 상할 때까지 일을 하겠지.

‘막아야 해.’

그의 주인이 간신히 마음에 담아둔 여자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가 그를 떠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주인을 위해 사는 것. 그것이 그가 에드가에게 속죄하는 길이다.

칼은 진심으로 그리 믿었다.

* * *

우아한 민트색 패널로 꾸며진 규방, 적절히 타올라 방안을 따뜻하게 만드는 벽난로 옆 안락의자에 루비카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저택에서 키우는 강아지 서넛이 앞 다퉈 누워 따뜻한 발의 온기가 바깥으로 도망치지 않게 하였다. 루비카는 그중에서 가장 큰 ‘라떼’ 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대편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앤과 엘리제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샤르망어를 조금이지만 읽을 수 있다고?”

“네.”

“그럼 유리나 자기를 구입할 때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구나.”

앤의 말에 엘리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도에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별채의 친구들을 만나 칭찬을 들은 게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원래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주변 어른들의 칭찬보다 또래의 인정이 더 효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 이외에 또 어떤 말을 할 줄 아니?”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별로 없어요. 하지만 간단한 단어나 통화의 단위 같은 건 알아볼 수 있어요.”

“그래, 그 정도만 되어도 장부를 보거나 상인을 다루는 데는 문제가 없겠구나.”

앤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성실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배우는 족족 흡수하는 게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품성도 그렇고 루비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글자는 모두 여기서 배웠니?”

“네, 마님과 각하의 배려 덕에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저 그런 귀족 가문에서 자라는 것보다 오히려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피후견인이 되는 게 교육적인 측면에서 나았다. 공작저 내에는 다양한 학문을 전공한 학자들이 살고 있었다. 식물학자 세사르경만 해도 얼마나 독특한가. 그는 어떤 식물에 독이 있고 어떤 식물이 약초가 되는지 줄줄 꿰다 못해 외우고 있었다. 덕분에 루비카는 수도원에서 얻은 지식에 몇 가지 사실을 더할 수 있었다. 아마 평범한 귀족가였다면 그런 것에 대해서 배우고 싶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앤은 냅킨을 꺼내 엘리제에게 클레이모어 식으로 접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 주기 시작했다. 루비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주의깊게 보았다. 정확히는 엘리제를 정신없이 관찰했다.

“이건 왜 이렇게 접는 거지요?”

“옛날 클레이모어의 조상 중 한 분이 남부지방으로 여행 갔을 때 만난 어떤 고블린이 알려 준 방법으로 우정을 기리기 위해…….”

앤이 하는 설명을 대수롭지 않게 듣던 루비카의 눈이 별안간 커졌다.

“잠깐, 앤!”

“네?”

“그럼 그 조상은 고블린어를 할 줄 알았던 거야?”

루비카의 말에 앤이 고개를 갸웃했다. 워낙 구전설화처럼 전해져 오는 이야기라 정확히 어떤 조상인지 조차 모른다. 앤도 선대 시녀장의 입으로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랬거나 고블린이 인간의 말을 했겠지요?”

“고블린어를 배울 수 없을까?”

“네?”

앤이 당황했다. 고블린 왕국은 멀리 있었고,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고 해 봤자 크게 쓸모가 있진 않았다. 또 물건을 팔려는 고블린이 인간의 언어를 간단하게나마 배웠으니 더더욱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루비카의 얼굴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전쟁이 난 뒤에는 고블린어가 무척 중요해.’

고블린은 사막의 이동항로에 대해서 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상의 왕국만큼이나 큰 지하 왕국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스텔라의 폭격에도 끄떡없었다. 곧 그나마 있던 물자와 돈이 탄탄하고 안정적인 고블린 왕국으로 몰리게 되었다. 고블린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안다면 전쟁초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언어학자이신 운다 경에게 물어보면 알려 주실 수도…….”

“같이 배우자.”

“고블린어를요?”

고블린어는 귀족 여인의 기초 소양이 아니었다. 아니 귀족여인을 떠나 그건 외교 관료의 소양조차 아니었다. 그 정도로 배울 가치가 없는 언어였다. 앤은 루비카의 저의를 짐작할 수 조차 없었다. 루비카는 가끔 이렇게 당황스러울 정도의 돌발 행동을 종종했다.

‘그러고 보니 지참금도 전부 자칼 은행 앞으로 해 두셨지.’

고블린이 운영하는 은행은 신뢰도가 높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자율이 높지도 않았다. 다만 오래되어 안정적일 뿐이었다. 앤은 루비카와 고블린 사이에 어떤 관련성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무역상집안 출신이기에 자신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으려니 하고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다.

“배워 두면 쓸데가 있을 거야.”

루비카는 제가 말하면서도 참 설득력 없다고 느꼈다. 이런 말에 설득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엘리제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잘 배울 수 있을까요?”

“마님께서 배우고 싶다면야…….”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앤도 일단 배우는데 동의한 것 같았다. 루비카는 당연히 반대 할 줄 알았던 이들의 찬성에 눈을 깜빡였다. 보통은 이런 하찮은 언어를 함께 배우자고 설득하려면 긴 노력을 해야 할 텐데 허무할 정도로 쉽게 진행이 되었다.

‘아…….’

잊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시녀다. 그녀가 하고 싶다고 하면 일단 수긍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 수밖에 없다.

‘실수한 걸까.’

두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부인과 시녀 사이는 언뜻 친밀해 보이면서도 힘의 균형이 있기 마련이다. 친구처럼 지내기 위해서는 그녀가 먼저 많이 배려해야 한다.

‘그래도 이번 건은 사실 어떤 말로 설명해도 설득은 안 됐을 거야. 지금 시점에서 고블린어 같은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까.’

하지만 배워 두면 기필코 도움이 된다. 루비카는 눈앞의 두 사람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지금 당장은 그녀에게 불만을 가져도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배워 두길 잘했다고 느낄 날이 오리라.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규방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대체 누가 의미 없는 노크 따위를 한단 말인가. 루비카가 고개를 돌리기 전 그녀가 쓰다듬고 있었던 라떼가 벌떡 일어나 뛰어갔다. 그리고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에드가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에드가는 라떼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성큼성큼 루비카에게 걸어왔다.

저렇게 꼬리를 흔들며 귀여워 해 달라는 하는 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니. 루비카는 새삼 그가 냉정한 남자라 느꼈다.

‘그런데 노크는 또 했네.’

지난 번 허락 없이 들어왔을 때 루비카는 그에게 제대로 노크하라고 경고했었다. 에드가는 그 말에 아주 불만 넘치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러겠다고 약속했고 이번에는 문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크를 했다. 착실하기는 이를 데가 없다.

‘그러니 젊은 나이에 이런 대 귀족가를 문제없이 운영하고 있는 건가…….’

솔직히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대단한 구석이 있는 사내였다. 빈정거리는 성격이나 냉정하고 차가운 태도도 그가 지고 있는 짐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스테판이 내게 내릴 벌을 청했을 때도 판결을 내리기 전에 내 의견을 물어보고자 했지.’

같은 귀족에게는 친절하고 젠틀하나 그 이하의 평민에게는 무자비하게 구는 귀족이 널렸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말은 정말 재수 없게 지껄여도 적어도 공정하고 정당하다고 판단되는 의견은 어떤 사람이 제시해도 받아들이는 그가 조금, 아주 조오금 낫긴 했다.

“루비카.”

에드가는 해가 지자마자 바로 루비카를 찾아왔다. 아늑한 규방, 벽난로 앞에 발아래 강아지들을 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그림 같았다. 아까 창문 너머로 본 살몬색 드레스를 입지 않고 있는 것은 아쉬웠으나 연노랑의 실내복을 입고 있는 모습도 제법 보기 좋았다. 목과 가슴 주변에 들어간 목련 자수가 루비카와 무척 잘 어울렸다. 이 실내복도 새로 지은 옷인 건가. 에드가는 루비카에게 예산 따위 걱정하지 말고 신나게 돈을 쓰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했다.

“에드가.”

그때 루비카가 고운 얼굴을 들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가슴 속에 파문이 일어났다. 에드가는 당장에라도 고개를 숙여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그녀의 붉고 예쁜 입이 주는 즐거움을 지나치게 빨리 맛봤다. 타는 듯한 갈증이 일어났다.

“라떼를 조금만 쓰다듬어 줘.”

에드가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니 하얗고 커다란 개는 꼬리가 사라지도록 흔들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얼굴을 빛내고 있던 개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앞다리를 번쩍 들어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에드가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개를 양 팔로 꾹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애정표현으로 받아들였는지 개는 더 난리였다.

“아까부터 당신만 쭉 보고 있었어.”

루비카가 안쓰럽다는 듯 라떼를 가리켰다. 이 귀찮은 개는 태어났을 때부터 에드가를 좋아했다. 그에 반해 다른 개들은 이미 루비카에게 갈아타기로 결심했는지 과거 영혼을 바쳐 충성했던 에드가 쪽을 흘끗 바라보고는 루비카의 발아래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한 놈은 아예 치마 속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어딜!’

에드가는 그녀의 치마 속에 있는 강아지를 끌어내었다. 실컷 잘 자고 있었던 개가 깨갱거렸다. 그는 자신은 구경은커녕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곳을 실컷 보고 있을 강아지에게 화가 났다. 라떼를 다른 개에게 관심을 보이는 에드가에게 화가 나는지 급기야 짖어댔다. 결국 에드가는 깊은 분노 끝에 이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판단을 내렸다.

“부인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모두 나가 주게.”

그 말에 앤과 엘리제가 바로 일어섰다. 눈치 좋은 강아지들도 슬그머니 일어나 앤을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하녀들도 모두 나가는데 라떼만이 모른 척 고개를 갸웃 거리면 에드가를 보며 헥헥 웃었다.

“너도 나가.”

하지만 모두 나가라는 말에 짐승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결국 라떼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규방 밖을 나가야만 했다. 엉거주춤 걸어가며 라떼는 몇 번이고 뒤돌아보더니 하녀가 규방 문을 닫는 뒤쪽에 서서 오도카니 에드가만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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