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3화
“곤란하군.”
“그게 무슨 소리야?”
루비카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에드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에드가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 개의치 않고 미소 지었다. 어두운 촛불 아래 보이는 그 미소는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난 아름답잖아.”
기도 안 찬다. 그런 말을 제 입으로 뱉는 남자가 있다니. 하지만 그게 에드가이니 묘하게 납득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걱정 마. 당신을 사랑할 일은 없으니.”
“어떻게 확신하지?”
그녀가 자신에게 반할 거라 확신하는 말투였다. 루비카는 이럴 때 에드가가 정말 세리토스 왕국 최고의 재원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신은 아름다워. 그건 동의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리란 법은 없잖아.”
“이해할 수 없군. 왕국의 대부분의 여자가 내게 구애하는데 하지 않은 경우는 딱 하나였어. 취향이 아주 특이하거나 미적 감각이 제로거나.”
루비카는 취향이 특이하지도 않았고 미적 감각은 뛰어난 편에 속했다. 에드가는 그녀가 자신에게 반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그리 되면 요 깜찍한 여인을 제 속을 썩인 만큼 골려 줄 생각이었다.
“에드가, 저기 화병에 꽂힌 꽃 말이야. 아름답지?”
“말 돌리지 마.”
“그런데 당신 저 꽃이 활짝 피는 걸 보기 위해서 기꺼이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 예를 들어 사막에서 물 한 병밖에 없을 때 당신이 먹는 대신에 꽃에 양보할 수 있어?”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군.”
루비카는 어색하게 웃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렇게 되는 거야. 내가 아무리 아파도 그 사람이 기쁜 표정을 지으면 기쁘고, 내가 아무리 행복하고 편안해도 그 사람이 슬퍼하면 세상이 다 비참해져.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부담스러울까 망설여지는 거……. 그런 게 사랑인거야.”
에드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루비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꽃은 예뻐. 예뻐서 곁에 두고, 지켜보고, 가지고 싶어. 하지만 꽃을 위해 내 모든 걸 바칠 수 없어. 이것 봐. 지금도 꽃이 어찌되든 꺾어서 화병에 장식했잖아. 에드가, 그건 사랑이 아니야. 소유욕이야. 예쁜 걸 좋아하는 거랑 사랑하는 건 다른 거야.”
루비카가 한마디 한마디가 에드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입가에 머물렀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꽃을 보았다.
“……그래?”
“그래.”
곁에 두고, 지켜보고, 가지고 싶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가 어떤 상처를 받을지 하나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의 기분에 상관없이 왜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느냐. 왜 곁에 있어 주지 않느냐 화를 낸다. 그가 바쁘든 귀찮든 상관없이 그의 족적을 밟고 자신을 봐 달라 아우성친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한 번도 사랑받아 본 적이 없군.”
시린 목소리였다. 루비카는 언제나 자신감에 넘쳤던 그가 짓는 쓸쓸한 표정에 깜짝 놀랐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다니……. 에드가 같은 남자가 그럴 리가 없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그를 갈구하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그중에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적어도 열 명은 넘게 있으리라.
“에드가, 그렇지 않…….”
그러나 루비카가 뒷말을 잇기 전에 에드가는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을 떠나고 말았다.
* * *
클레이모어 공작저택에서 공작 부인으로서 산지도 벌써 일주일째가 되었다. 루비카는 아직 저택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예산안이나 지켜야 할 기념일, 공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등 파악하고 외워야 할 것도 넘났다. 다행히 공작 부인의 일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적응했다. 이제는 아침 문안이 두렵지 않았다. 더는 그녀에게 면담을 요청해 돈 문제로 지저분하게 구는 친척도 없었다.
루비카는 응접실에서 새로운 공작 부인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친척들을 만났다. 그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어디서 소문이 났는지 자두절임을 한가득 챙겨 온 이도 있었다.
“좋은 분께서 공작 부인이 되셔서 다행입니다. 이걸로 한시름 놓았습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에도 이제 곧 웃음소리가 가득하겠지요.”
오늘 온 친척들의 마지막 명단에 있던 가족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따스한 덕담이었으나 루비카는 콘웰 부인의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빨간 머리의 소녀를 보고 아쉽고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내 요정은 언제 오는 걸까.’
루비카는 섭섭한 마음이 드러날까 생긋 웃었다.
“좋은 이야기 고맙네. 아직 내가 부족하니 앞으로 많은 조언 부탁하네.”
콘웰 부부는 겸양하는 루비카의 말에 기뻐하며 공작가의 생활에 대한 조언과 이 계절쯤 영지 내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루비카는 그들의 말을 찬찬히 듣고 그들이 떠나는 길에 여행 경비와 공작가에서 생산하는 질 좋은 포도주를 선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럼 그대의 집안에도 평안함이 깃들 기를…….”
그리고 그들이 현관을 떠나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오전 내내 웃고 있어서 얼굴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누군가는 단순한 문안 인사만 하면 되는 공작 부인의 삶이란 편하기 이를 데 없다고 말했으나 실제는 중노동이었다.
혹 트집 잡힐 데는 없는지, 내놓은 음식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선물은 적절하지 않은지 등등 신경 쓸 것이 많았다. 가장 힘든 점은 이제 막 공작가에 와 낯설기 그지없는데 처음 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자신이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친척이 되기에 부족한 소양이 없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으아,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아침 문안을 기피하지 않고 착실히 임한 것은 간절히 기다리는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벌써 일주일째 피로연장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요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본 것은 뭐였을까? 설마 신기루?
‘앉은 자리의 위치를 보았을 때 별채 쪽에서 살고 있는 친척이 틀림없었어. 그런데 오늘까지 인사가 없다니, 이건 뭔가 잘못됐는데…….’
별채에 기거하는 친척들은 객식구도 있었으나, 공작가의 사업이나 교육, 종교 활동 등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침 문안이 시작되자마자 누구보다 빨리 루비카와 인사를 나누었다. 심지어 클레이모어와 어떤 혈연적 연관이 없으나 단지 똑똑하고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공작가에서 후원하는 아이들까지 한 차례 인사를 하고 갔다.
“마님, 셰니에 부인이 뵙기를 청합니다.”
또다. 간절히 기다리는 요정은 오지 않고 불청객이 또 왔다. 셰니에 부인은 매일매일 그녀의 주요일과 중 하나인 것처럼 루비카를 찾아왔다. 그리고 공작가의 전통과 예절에 대해서 한차례 설교를 늘어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작 부인이라 할지라도 찾아온 손님을 명분 없이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비카는 하는 수 없이 셰니에를 맞아들였다.
“공작 부인께 국왕 전하를 뵈실 때 하는 예에 대해서 한 말씀 올리려 합니다.”
셰니에는 자리에 앉자마자 또다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루비카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대체 셰니에 부인은 왜 이러는 걸까? 첫날 그녀를 만났을 때 예절 교육은 따로 받지 않겠다고 답하고 물리쳤다. 그저 떠도는 바람처럼 왔다 갈 생각인 루비카는 공작 부인으로서 품위에 관심 없었다. 그런 걸 함양하는 건 시간 낭비다. 그 시간에 차라리 산책이나 하는 게 나았다.
“현재 왕세자 저하와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관계는 제법 괜찮지요. 공작 부인께서 수도에 올라가 세자빈 저하와의 만남을 청하고자 하신다면…….”
또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정보를 나불거린다. 어제는 머리가 아파 주치의를 만나야 한다고 쫓아냈고, 오늘은 무슨 수를 써야 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앤이 조용히 물었다.
“간식을 준비할까요?”
순간 머리에 종이 울렸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앤이 올린 간식을 일단 한 입 먹고 난 다음에 배를 부여잡고 아프다고 소동을 일으켜야지. 배탈이 났다고 난리를 치며 주치의를 부르면 셰니에 부인도 별 수 없이 물러날 것이다.
‘앤, 고마워. 당신은 정말 천재야.’
오래 시녀장으로 일한 앤이라면 이런 골치 아픈 손님을 쫓아내는 방법에 대해서 도가 텄겠지. 이유 없이 간식을 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앤이 물러났다.
이제 면담실에는 루비카와 셰니에 부인만 남았다. 클레이모어 친족 간의 이야기가 오고가는 곳이기에 믿을 수 있는 시녀장인 앤 이외에 다른 하녀들은 면담실에 함부로 들이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앤이 사라지자 셰니에 부인의 주름이 한결 펴졌다. 여전히 주름진 얼굴이지만 이마에 다섯 줄짜리 주름이 네 줄 정도로 보인다고 해야 할까.
“부인, 이렇게 면담 도중에 시녀장이 자리를 비우는 건 부인에 대한 무례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네?”
“시녀장이 감히 부인을 남겨 두고 자리를 비우다니요.”
“하지만 방금은 내 허락을 맡고…….”
“아직까지 시녀를 뽑지 않은 것도 그래요. 부인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셰니에가 앤을 비난할 줄 몰랐던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원래도 셰니에의 인상은 좋지 않았는데 지금은 꼭 동화책에 나오는 마귀할멈 같았다. 루비카는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직까지 시녀를 뽑지 않은 건 결코 앤이 루비카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루비카는 고작해야 준남작가 출신이라 결혼할 때 데려올 수 있는 시녀가 없었다. 그렇다고 근방의 아무 봉신의 딸이나 부인을 시녀로 삼으면 그들은 공작가 내부의 일을 바깥으로 퍼다 나르기 바쁠 것이다. 그리 퍼진 소문이 어떤 형태가 되어 돌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루비카는 이미 시녀로 삼을 만한 여인들의 리스트를 앤에게 받았다. 그러고서도 그녀와 한참 의견을 나누며 고심하느라 결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게다가 루비카는 공작 부인이 된 지 이제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시간이었다.
“정말 앤은 부인을 보필하기에 부족하군요. 수도에 가셔서 국왕 전하와 왕비마마를 뵐 때 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지 염려스럽습니다. 그녀는 예의범절에 대해서 문외한 수준입니다.”
셰니에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하면서 루비카에게 자신이 다 보듬어 주겠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루비카의 눈에 그것은 마귀할멈이 음모를 꾸밀 때나 짓는 미소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게 목적이었구나.’
공작가의 예법 선생은 결코 시녀장에 뒤지지 않은 위치였고, 월급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건 명예직에 불과하다. 시녀장은 공작 부인의 바로 곁에서 권력의 실세를 만날 수도 있었고, 사교계에 발을 넓힐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작가의 예산에 대해 직접적인 조언을 보태고 누구에게 일을 맡길지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었다.
즉, 실세였다.
루비카에게 예법을 알려 주겠다는 건 핑계이고 셰니에는 지금 시녀장 자리를 노리고 줄곧 문안을 왔던 것이다.
‘내 앞에서 앤에 대해서 나쁜 소리 하지 말라고 대꾸해야 하나.’